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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글마루 문학회 여러분 지난 7월 23일에 열렸던 “ 글마루의 밤 “ 행사에는 시평론 및 시 쓰기, 산문을 통해 한국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정 재분 시인을 초대 시인으로, 진솔한 삶의 이야기와 깨달음을 수필에 담아 전하는 미주수필작가 협회 김 화진 수필가를 모시고 낭송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정재분 시인은 내적 깨달음과 언어가 담은 의미를 몸의 언어로 표현한 시편들로 철학적 사유와 시의 확장으로 독자로 하여금 다중적 해석을 이끈 시세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김화진 수필가의 사람좋은 인품이 작품에도 묻어나 있으며 마라톤 달리기를 작접 참가하여 겪은 희노애락, 목표, 일상을 소개, 삶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해석과 실천을 통해 작가가 가고자하는 인생의 방향과 그 깨달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수필을 통해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휴가철이 겹쳐 많이 바쁘신 중에도 관심과 격려로 참석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아래는 정재분 시인의 시 7편과 작가노트를, 김화진 수필가의 수필<코스 없는 마라톤> 그리고 작가노트를 요약, 정리하였습니다.
1.가려움 랩소디 (정재분)
한눈파는 자율신경의 감시망을 피해서 몰래 빠져나간 손가락이 활자가 되지 못한 이마에 핀 창백한 서성거림을 점자를 읽듯 더듬고 있다
경칩 무렵이면 켜켜이 박힌 얼음이 풀리느라 부풀어 오르는 흙, 헤집고 일어서는 풀의 맹목처럼 어느새 버릇이 되어버린 그림자 찾기
해가 뜨면 보이다가 해지면 종적을 알 수 없어 엉겁결에 침 바르며 참았던 만큼보다 곱절은 더 피가 맺히도록 긁는 시간
하루의 절반 아니, 절반의 절반도 채 불을 쬘 수 없는 그림자 마른 살갗을 뚫고 솟아오른 안부에 연고를 바른다
시작 노트 시는 순간에서 발아한 생물이라서 다가온 시적 순간을 포착하는데 등한시 하면 태반이 그대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사라진 시상이 다시 찾아오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제 삶을 담보한 시상일 때 표현하려는 강렬한 욕구는 수시로 자아의 표층을 두드린다. 그럴지라도 전번 것과 양상은 다를 수 있다. 순간이야말로 참으로 시간고유의 성격을 지니며 그것이 곧 포에지가 아닐 것인가. 그러나 나는 시상이 떠오르면 몇 날 며칠 혹은 훨씬 더 오래, 마음이라는 항아리에 담아두고 묵히려고 한다. 순간들은 때때로 너무나 강렬하여 불꽃이 일고 모든 것을 살라버릴 것 같지 않던가. 이 객관성 없는 순간들이 가라앉고 아주 조그마하게 짜부라 들어서 아마도 무의식 지대로 침잠해 있다가 어떤 개연성 있는 객체와 마주쳤을 때 물의 눈동자 윤슬처럼 반짝거리며 수면위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가려움 랩소디」언젠가 두드러기가 나서 몸이 가려운 적이 있었습니다. 가려운 데를 긁어대다가 쓰게 된 시인 거죠. 가렵다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해 몸의 시스템이 역기능을 한다는 뜻인데 문제가 생길 때도 가렵지만 나으려할 때도 가려움이라는 증상을 보이지요. 특히 가렵다란 말을 심리적 공간에 대입했을 때 불편하다, 미치겠다, 온 신경이 쏠린다, 제어가 어려운 상황에 적합할 것 같네요, 바로 음악의 장르에 비교하자면 랩소디가 됩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그런 상황에 직면하곤 하는데 그런 상황이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아무튼 유쾌함과는 거리가 먼 이 증상으로 시가 되게 하려면 중층적 구조가 가렵다라는 단일한 의미를 수렴해야 시가 된다고 생각을 했지요. 그래서 계절이 바뀔 때 계절의 살갗이 무척 가려울 것 같아요. 봄이 올 때를 묘사했고 인간관계에서는 누군가가 그립다면 마음이 매우 가렵겠지요. 이런 식의 중층적 구조는 시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2.얼룩의 방정식 (정재분)
모처럼 찾아온 외진 방에 누워 먹물 튄 한지벽지를 한동안 본다 에구머니, 주근깨가 어엿이 문양이 되었으니 옹이라든가 나이테나 다름없을 터이나,
살뜰히도 박힌 점, 점, 점들을 하릴없이 지운다 코끝이 매캐해지는 배려를 짐짓 외면하듯 종내, 어떤 사진은 찢어버리듯
백지만이 드디어 오롯하다 오, 한 점 티 없는 순백은 두려움이구나 무구라는 이름이 쏘는 눈총이라든가 별 없는 밤의 어둠이라든가
서까래 드러난 천장과 한지 속 쉼표들 늑골아래 어머니의 우물에서 퍼 올리는 따옴표 고요 속에 풀벌레 소리 들어 있듯
「얼룩의 방정식」은 한국에는 창작실이 있어요. 문화예술진흥회라는 곳에서 지원하는데 신청을 하면 한 2개월까지는 숙식을 제공합니다. 그 대신 당장은 아니더라도 작품 성과물이 있어야 해요. 저는 한 2주 있었는데 배정받은 방에 누워있는데 창호벽지에 무슨 튀 같은 점들이 흩어져 있는 벽지 본적 있으세요. 점이라고 하면 얼룩의 다른 말이죠. 말 그대로라면 없는 것이 더 낫겠죠. 그런데 그 벽지는 점이 무늬가 됐어요. 점이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될 때가 있지요. 완전무결하다면 왠지 거북하잖아요. 그건 어디까지나 이상이지 현실에서 그렇다고 주장한다면 사실에 대한 은폐일 확률이 높다고 봐요. 아무튼지 병실 벽이 온통 하얗잖아요. 특히 정신병동의 벽이 말이지요. 하얀 방에 온종일 갇혀 있다고 가정해 본다면 정신이 돌아버릴지 몰라요. 그러니까 그 벽지는 아주 철학적 심리적으로 고찰된 벽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어둠 속에 별이 있고, 정적 속에 풀벌레 소리도 들어 있고 침묵 속에도 소리가 있는 인간적인 간점을 포착하고 하고자 했습니다.
3.모눈종이에 갇힌
정재분
한 줄 끝자락에서 조사(助詞), '에'도 맨 앞줄로 가 선다
정재분2005년 계간<< 시안>>으로 등단 시집, <<그대를 듣는다>>
「모눈종이에 갇힌」을 쓰게 된 것은 무언가를 노트에 적다가 얻게 된 시상이에요. 글을 옮겨 적다가 행을 바꿀 때 단어의 의미가 흐트러지는 것이 아마 안타까웠던가 봐요. 아무튼 나는 얼마간 마음이 쓰였을 것인데, 단어를 흐트러뜨리지 않게 하려면 행의 끄트머리에서 자간을 촘촘하게 적거나 행의 끄트머리를 비워둔 채 새 행으로 옮겨가는 도리밖에 없잖아요. 그렇게 한다면 이는 쓰기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으로 원칙과 상황적 분분한 이유의 대립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요. 이것은 인간조건에 개인이 대응하는 방식과도 유사할 것 같고, 같은 맥락의 갈등을 경험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지 않을 것 같아요.
4.지리산 정재분
오소소 솜털이 일어난다 급냉동시킨 슬픔인가 꺼내놓으면 언제나 푸르다 일찍 철난 아이처럼 품이 넓은 골도 재도 봉우리도 굽이굽이 다정한 격랑을 가슴팍에 껴안으며 울어버린 산
정령치 뱀사골 피아골 노고단 성삼재 바래봉 화개재......
계곡과 골짜기, 그 고갯마루와 산봉우리의 이름을 혀끝에 대어보면 느닷없이 짠하다 벼랑길을 안돌이지돌이로 지나면 앉은키보다 더 높이 자란 풀숲이 잠시 평화롭고 솨솨솨 바람소리 물소리 인기척보다 커서 몸 숨기는 자를 감춰주는 산그늘
산의 지교를 따라 왼손과 오른손을 오른손과 왼손을 깍지 끼워 등으로 나란히 하면 하루에 몇 번을 그리하면 동이족의 어깻죽지 단단히 뭉친 승모근이 풀릴까
「지리산」도 제목을 정해주고 청탁을 받은 것이에요. 지리산은 면적이 가장 넓은 산으로 산이 깊어서 육이오 동란 직후 소위 빨치산이라 불렸던 사람들의 은거지였어요. 아주 오래 전에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가 있었는데 채시라가 쫓기는 몸을 잠시 쉬면서 아이들하고 갈대가 있는 산 둔덕에서 앉아 쉬던 영상이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요. 이상하게 그런 아픈 역사의 현장이고 또 너무나 아름다운 산이어서 그런지 지리산하면 맘이 짠해져요. 지리산에 있는 지명들도 어쩌면 한결 같이 강렬한지 피아골이니 정령치니 뱀사골이니 언뜻 생각나는 것이 이 정도뿐이지만 암튼 가슴이 아픈 산이에요. 나를 울린 산이죠.
5. ‘어’라는 말은
어어어 어어 어 어 ㅓ
황급히 양팔을 기우뚱거리며
달팽이관을 깨우는 '어'
억양의 변주에 따라
리듬의 장단 반복에 따라
세계가 다르게 열리네
동공이 열리고 살짝 들어 올려진 '어'
물음표의 다른 이름 같은 종족이라네
뭉뚝하니 감 떨어지는 소리는 대답,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이라네
당신의 침묵을 맨 먼저 깨우는
말머리에 앞서 낮고 긴 '어'의 파동은
쉼표, 갇힌 생각의 길을 터주네
새벽을 닮은 어수룩하고 다정한
벙어리도 내는 덩어리 말
아가의 처음 말 어 어 어
「‘어’라는 말은」한글의 모음으로 시를 쓰는 일이 문공부 주체로 시도되었어요. 문화체육관광부 국립국어원에서 562돌 한글날과 한글주간 선포 원념을 기념하여 발간한 <한글 피어나다-문화의 옷을 입은 한글>에 게재된 작품입니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 배우였던 유인촌 문화부 장관을 하면서 기획한 시집이에요. 인지도가 있는 시인들에게 청탁을 하였는데 두세 사람이 시를 쓰지 못했어요. 엉겁결에 대타로 쓰게 된 시인데 그래도 이틀 만에 뚝딱 쓰게 되었어요. 기라성 같은 시인들과 같이 실린다는 중압감에 순간적 집중이 용이하였지요. 사실 모음은 부드러운 소리인데 달리 말하면 언어 이전의 원형성을 지진 소리지요. 아기가 태어나 처음 내는 말이 모음으로 된 소리인가 하면 무의식의 소리에요. 호흡의 각질 같은 것으로 한때 호흡이었는데 호흡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소리 같아요. 이를테면 한숨이라든지, 끙끙 앓는 소리라든지
6. 해 아래 새로운 나
검지가 종유석처럼 자라는 노인은 대꾸가 없었다 입에 문 구슬이 떨어지는 개와 늑대의 시간을 기다렸다 하, 고독을 찾아가라했다 고독이라면 내 모르는바 아니다 떠꺼머리총각처럼 날 쫓아다녔는데 함께 차 한 잔 마실 생각일랑 아예 못하고 달아나기에 급급했는데 키워드를 쥐고 있다니 키를 뒤집어쓰고 소금 얻으러 가는 오줌싸개의 발걸음만치나 면구스러웠다 입가에 미소를 물고 다가갔다 싸늘했다 그간 푸대접 받은 앙갚음인가 사뭇 사무적인 말투다 검은 것을 희게 하고 흰 것을 검게 해서 다시 오라니 아고, 마고할미를 패러디하는 것도 유분수지 아무리 생각해도 검은 것을 희게 할 뾰족 수는 없을 듯했다 하던 대로 애꿎은 일상만 문질렀다 잿물을 넣어 푹푹 삶기도 하고 방망이로 두들겨대느라, 뒷전으로 나앉은 물음표의 에스 라인이 느낌표를 닮아버렸다 그날따라 화가 잔뜩 난 거울이 나를 꿇어 앉혔다 콧등에 세 번 침을 발랐지만 여전히 발이 저렸다 참을수록 눈에 힘이 들어가 쌍심지를 켜고 거울을 쏘아보았다 아! 귀밑머리가, 그이가 한 올씩 넘겨주던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했다 쯧쯧쯧 혀를 찼다 허구한 날 머리 센 노인과 마주쳤을 터이나 몰랐던, 보고 들어서 깨닫는 건 턱도 없는, 제 살이 아파야만 아는 어처구니라니, 몫을 다해야 물리가 트이는 아둔한 모래시계라니, 미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숨넘어가던 바람이 잦아들 즈음에야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라니
「해 아래서 새로운 나」는 전도서에는 “해 아래에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요. 이 말씀을 반박하는 시는 아니구요. 우리 인간이 교훈을 듣고 조심한다고 해서 실수를 안 하는 그런 현명한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아요. 지적 수준이 상당해도 개인적으로 들여다 볼 기회가 있어서 보면 어리석어요. 교훈이 각 사람에게 극단적 상황을 구제하지 못한다는 것이에요. 달리 말하면 우리 인간은 자기 질서라는 것이 있어요. 먹어야 하고 배설해야 하고 자야하고 추우면 따뜻하게 몸을 감싸야 하고 더우면 시원하게 해야 하고 등등, 공부도 잘 해야하고 연애도 해야 하고 출세도 해야 하고 사회적 필요도 있고 신체적인 필요도 있고, 인간의 야망, 욕망이 문제인 거죠. 그러나 자기 자신과의 소통도 필요하고요. 그런데 자기 자신과의 소통은 고독을 조건으로 하는 것 같아요.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구요. 그런 생각으로 접근한 시인데 내용상 산문시가 어울릴 것 같아서 그렇게 했어요. 형식에 대한 탐구가 필요한데 형식은 용기 혹은 포장과 같이 가는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7. 항성(恒星)
해질녘
동지 지나고 언 볼보다
붉은
오, 새삼스러워라
한 오라기도 삐뚜름 없이
둥근
광채 벗으니
오랜 시간을 열고 나온
두루마리 서책
서녘의 묵언을
베껴 적는 사과나무,
그 가지가 꾸는 꿈
가까워 질 수도 멀어 질 수도
없는 궤도
둥글어야 허공을 사는가
가없이
「항성」은 해가 지는 석양 무렵에 해를 보면 해가 한 오라기 삐뚜름 없이 둥근 것을 보고 쓴 시에요. 둥근 것에 대해 사유하도록 만들더군요. 8848미터 히말라야 우리는 삼사 천 고지에 가도 고산병이 생기고 술도 못 마시고 고산병에 목욕이 안 좋다고 해요. 뛰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못하지요. 우리가 아는 지구는 지표면이 매끄러운 것이 아니라 울퉁불퉁하지요. 바다 깊이는 는 또 얼마나 깊은가요. 그럼에도 달에서 찍은 지구는 환상적인 원형의 매끄러운 푸른 별이잖아요. 그런데 제가 천문대에다 전화를 해서 왜 천체는 둥글어야 하는지 물어봤어요. 둥글어야 중력을 가질 수 있다네요. 과일이라든지, 바퀴들 자전거 바퀴 같이 둥글어야 굴러가는 거라든지,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생산적인 것들 접시나 밥주발 같은 것들도 둥근 세계를 지향하지요. 둥근 것들은 경이롭고 사랑스러우며 기쁨과 관련이 있음에도 동시에 중심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요.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 감각이 인지하는 세계로 충분할 수도 있구요 가시적 세계가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 그런 황홀한 오해는 거리감이 만든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한 거리감이 8848 미터나 솟은 산이 있음에도 매끄럽게 보이도록 하잖아요.
코스없는 마라톤
매년 3월의 둘째 주 마다 열리는 'LA 국제 마라톤 대회'가 있다. 세계기록을 가진 선수들을 비롯하여 2만여 명의 마라토너가 참가하는 대대적인 행사로 자리 잡았다. 마라톤 코스에 위치한 일부 교회들은 주일예배를 취소할 만큼 봄볕 아래의 뜀박질은 매우 성황이다.
2000년 제 23회 대회에서 나는 마라톤을 완주하였다. 두 해 전부터 우리 부부는 건강증진을 위해 뜀뛰기 그룹에 합류하여 정기적인 운동을 하였다. 작은 비지니스를 갖고있던 우리에겐 과중한 건강보험비가 부담이 되어 스스로 우리 체력을 키우겠다는 목표아래 시작한 운동이었다.
목표를 정하고 코치를 세워 제대로 뛰는 훈련을 하였다. 호흡법도 배우고 발을 내딛는 순서도 익혔다. 지금껏 달리던 방법으로는 그 먼 거리를 계속 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숨조절도 어려운 것이었다. 더우기 무릎에 부담이 되는 것은 치명적이다. 그 이듬 해 남편은 혼자서 4시간30분의 기록으로 마라톤을 완주했다. 쉰 세살의 나이그룹에서는 평균보다 빠른 기록이었다. 일 년을 더 준비하여 나도 대회에 나가게 된 것이었다.
막상 욕심을 내어 출전을 결정하였지만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과연 그 먼 거리를 계속 뛸 수 있을까, 중간에 멈춘다면 몹시도 자존심을 상할 것 같았다. 성당식구들도, 가족들도 미리 응원할 장소를 정해놓고 중간이상부터는 매 마일 마다 지켜서서 힘을 북돋아 주었다. 남편은 지난 해에 한번 뛴 경험이 있어서인지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는 나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뛰는 까닭에 함께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스타트의 신호가 떨어지고 일제히 출발점을 떠난다. 2만여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출발선에 설 수 없기에 각자의 운동화끈에 매단 조그만 컴퓨터칩이 출발선을 통과하는 각자의 시간을 기록한다. 뿐만 아니라 뛰는 코스를 다 기억하므로 행여 코스를 빗나가면 무효처리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열심히 달렸다. 마침 우리가 결혼한 지 25년이 되는 해였다. 26마일을 완주하기 위해서는 힘의 안배가 필요했고 마음의 평정이 중요했다. 매 1마일을 뛰면서 우리는 우리의 결혼 1년씩을 돌아보자 하였다.
1, 2, 3마일.. 앞으로 나아갈수록 처음엔 희망과 행복을 그렸다. 눈에 보이는 기쁨과 열매도 있었다. 10여 마일을 통과하면서 고통과 서로에 대한 실망, 죄절, 때로는 싫증까지도 느끼고 있었다. 18마일에 이르니 앞이 보이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지쳐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포기하고 싶었다. 이렇게 죽을 것같은 고통을 참고 완주하여 무어 그리 대단한 것을 얻을 것인가. 겨우 완주메달 뿐인걸. 애초에 출전을 결심하면서 스스로 내 참을성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을 품었었는데 역시 나는 끈기가 부족한 사람임을 확인하고 있었다.
결혼 20년 쯤에 우린 어떤 모습이었나. 아이들은 각각 고등학생, 중학생이었고 이민의 삶이 나름 대로의 괘도를 따라 기계적으로 돌아가던 때였다. 새로울 것이 없고 특별한 감각을 상실한 채 지친 몸과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둘이서 함께한 시간 속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았다. 그 안에 깃들었던 온갖 흔적들을 보듬고 상처를 감싸줄 수 있었다. 미처 고백하지 못한 잘못과 오해들을 다 내어놓았다. 다음날 남편은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였다. 나의 속도에 맞추어 발을 내딛느라 무릎에 무리가 간 것이다. 어쩌면 25년의 결혼생활 중에서도 때론 나의 고집에 맞추기 위해 얼마나 힘든 마음을 끌어안고 살아왔을까. 사랑으로만 평생을 살 것 같았던 착각을 깨우치며 인내와 좌절의 순간들을 지나 함께 도달해야할 그곳을 향해 오늘도 걷는다.
지금껏은 정해진 코스 대로 살아오느라 어려움도 많았다. 내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가야할 길, 세상사람들 틈에서 함께 밀려오며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달음질쳤다. 이젠 주어진 코스 완주의 테잎을 끊고 나만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 남이 가는 길에 무조건 끼어들 필요도 없다. 굳이 체면이나 의무 때문에 어려운 길을 가지 않아도 되리라. 고통이 밀려올 땐 그저 머물러 아무 생각없이 쉼을 취하리라.
태어날 때부터 우리에겐 각자의 삶의 코스가 있음이다. 그 길을 마다않고 묵묵히 가는 사람은 행복하다. 혼자서 걸어가다 문득 돌아보며 지난 길에 새겨진 기억들을 등에 업고 한번 위로 추스려 자장노래라도 부르면 즐거우려나. 얼마큼 남았는지 알 수 없는 저 앞에 놓인 삶의 도착선에 사뿐히 발을 딛을 때까지.
<작가노트>
꾸미고, 감추고,부끄러운 것을 다 빼고나면 글이 되지 않는다.자기 자신을 그대로 내어 놓는 것이 곧 수필이다.
<코스 없는 마라톤> 인생은 장거리이다. 나는 지난 날 정해진 삶대로 가야만 되는 줄 알고 살았다. 그러나 얼만큼 왔는지 얼만큼 남았는지 알 수 없는 삶의 도착성, 코스 없는 마라톤과 같이 인생은 정해진 길이 없다. 때로는 멀리도 가까이도 보일 수 있는 것이 삶이다. 내 글 그대로 살아 온 생활과 내 삶을 나누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통해 내 마음과 삶을 정리하고 또 그것을 통해 삶의 발자취를 남기고 싶은 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와 목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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