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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와 함께 온 데카르트
여러분! 제비 새끼 네 마리가 보이시나요? 어미는
아마 데카르트 선생님을 찾으러 나갔나 봅니다.
올 봄에 제비 한 마리가 데카르트 선생님과 함께 저에게 왔어요. 저는 참 반가웠어요. 그 동안 외로웠거든요. 새끼 네 마리가 둥지에서 서로 머리를 내밀고
어미를 기다리고 있네요. 아직 눈을 뜨지 못한 것 같아요.
아! 방금 제비가 데카르트 선생님과 함께 돌아 왔네요. 그리고
저에게 반갑다고 재잘거리며 인사하네요. 저도 반갑게 두 손을 흔들어 주었어요. 그리고 데카르트 선생님에게 정중하게 인사하였지요.
“데카르트 선생님! 만나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라고 말이지요. 그 분께서는 말씀하셨어요. 자! 그럼
우리 함께 즐거운 사유의 여정을 떠나 볼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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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부터 가을까지, 데카르트와 더불어 그가 걸어왔던 길을 제비와 같이 날아보고자 합니다. 봄에 다시 돌아온 제비처럼, 저도 다시 돌아왔고 그리고 함께 날아보고자 했습니다. 이성의 세계를 말이지요! 데카르트가 근대 정신의 여명을 열었던 사유를 같이 품어 보고자 했습니다. 저는 제비와 같이 둥지를 틀고, 사유의 알을 낳고, 한 여름 동안 그 새끼들을 보듬었습니다. 이제 어느덧 가을 바람 불어, 어른이 된 그 제비 새끼들은 다시 먼 형이상학적 세계로 날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곧 날아가겠지요. 빈 둥지만 남겨두고 날아갈 것입니다. 아니 날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지난 겨울은 무척이나 추웠습니다. 중세기적 추위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찬란하게 꽃 핀 모든 사상들이 꽁꽁 얼어 붙었습니다. 고대 도시국가이자 민주주의 사회였던 아데네의 아고라 광장을 “등애”와 같이 어슬렁거렸던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만나 보았지요. 몽매한 민중들을 향해 그가 끊임없이 외치던 목소리! “무지의 지”를 설파하며, “너 자신을 알라!” 하고 외치던 목소리가 생생하네요. 그리고 죽음을 불사한 그의 철학적 신념과 그 용기 는 그나마 추운 겨울에 따스한 햇볕이었지요.
고대 그리스 철학이 역사 속에서 사라진 후, 중세기적 추위가 찾아왔습니다. 그 추위는 모든 철학을 종교의 시녀로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하여 “신” 즉, 하나님만을 찾았습니다. 로마 교황청이 그 시대를 지배하였습니다. 교황청이 성 베드로 성당을 짓는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였다니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요? 특히나 우리나라는 형태만 달라졌지, 요즈음에도 가끔 그러한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을 보고 있노라면, 황금만능주의 속의 중세기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 즉,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 같은데, 교회에만 가면 모두 죄의 사함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인가요? 데카르트의 지적처럼 말보다 행실이 올 바라야 하지 않겠어요. 참! 말들은 잘하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는데! 그런 면에서는 “에포케(판단유보)”를 주장하는 고대 회의론자들의 삶의 지혜도 괜찮은 방법인 것 같아요. 아무튼 중세기는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4-5세기 로마제국의 몰락에서부터 15-16세기에 이르는 중세기적 추위가 천년 세월 동안 지속되었다니 참 끔직하기도 하네요.
겨울이 추우면 추울수록 봄은 더 황홀하지요. 올 봄이 그랬어요. 후회와 가책의 몸부림 속에서 고뇌에 찬 추운 겨울을 보낸 시간들은 그만큼 더 성숙한 봄을 맞이 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 그 봄은 르네상스입니다. 다시 “소크라테스”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을 통하여 르네상스의 봄은 새로운 전기를 철학에게 제공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리 제비가 나에게 찾아 왔다는 것은 무엇인가 좋은 길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올 봄에 찾아 온 제비는 둥지를 틀었어요. 데카르트의 철학나무에서 가지들을 물어와, 자신의 침(정신)을 발라 둥지를 만들었어요. 철학나무의 뿌리에 있는 형이상학 가지, 물리학 줄기에 달린 의학, 기계학, 윤리학 가지들을 부지런히 물고와 하나 하나 견고하게 자신의 집을 지었습니다. 이제 곧 태어날 새끼들을 위해서지요. 아마도 그 제비는 데카르트의 품속에서 새끼들을 기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새끼들의 행복한 결말을 기대하고 말이지요.
그러나 둥지를 트는 일이 그렇게 쉽겠어요? 제비는 본능적으로 둥지를 트는 방법은 알고 있었지만, 여건이라는 것이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지요. 비바람도 피해야 하고, 온 갓 세상 사람들의 시선과 손 탐도 피해야 하고, 또 먹이도 손 쉽게 구해야 하는 그야말로 제일 안전한 장소가 필요 할 것이니까요. 이 제비는 처마 밑에 둥지를 틀었네요. 처마 밑이 데카르트의 따뜻한 난롯가 같았나 봅니다.
아마도 제비는 둥지를 틀면서,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시행착오를 거쳤을 것입니다. 자기자신만의 부리로서 철학나무 가지들을 처마 밑에 물고와, 회의(의심)의 날개 짓을 펄럭이다가, 어떤 때는 떨어뜨리고, 어떤 때는 요리조리 잘 꿰어 맞추고, 잘 되지 않을 때에는 비탄의 재잘거림에 잠기기도 하면서, 자기 본성(이성)의 감각으로 불철주야 노력해야만 했으니까요. 데카르트가 “학문들에 대한 고찰”에서 “좋은 정신을 지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그것을 잘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방법서설, 146p) 라는 그의 생각이 제비에게 전이된 것일까요? 데카르트가 좋아했던 수학적 방법으로 “확고부동”한 둥지를 틀기 위해서, 그래서 그 제비는 데카르트와 함께 온 것일 것입니다.
또한
제비는 둥지를 틀 때까지 수많은 “두려움”에 처했을 겁니다. 아~ 벗어나고
파! 아~ 아 벗어나고파!
사랑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파 절규하며 노래를 불렀던 윤시네처럼, 제비는 그 얼마나 많은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날개 짓을 했을까요? 데카르트도 마찬가지였어요. 데카르트에게 있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확신”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 내 행동을 분명히 직시하면서 확신을 갖고 이 삶을 살아가지 위해서 참된 것을 거짓된 것에서 구별할
수 있기를 늘 극도로 갈망했다”(방법서설, 158p)
여러분! 데카르트의 확신을 향한 갈망에 찬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윤시네의 노랫소리가 들리시나요? 그러나 “두려움”이 크면 클수록, 갈망하면 갈망 할 수록, 그 “확신의 희망”은 그 만큼 더 절절하지
않을까요? 모진 비바람과 광풍이 몰아친 후, 밤 하늘에 뜨는
달은 그 얼마나 청명한가요? 그래서 광풍제월(光風霽月)이라고 옛 사람들은 노래했던 가요?
기존의 학문들에 대한 “의심의 날개”를 한 것 펴고, 오직 자기자신 속으로 만 걸어가고자 했던 데카르트! “세상이라는 책”속에서 공부하고 얼마간의 경험을 쌓는데 몇 년의 세월을 보낸 후에 나는 어느 날 나 자신 속에서 연구하기로, 또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선택하는 데 정신의 온 힘을 기울이자고 결심했다. ”(방법서설, 158p) 비장 감이 느껴집니다. 데카르트는 제비와 함께 잘 온 것 같아요. 봄이 무르익어가고 있어요. 개나리와, 진달래도 피고, 목련과 벗 꽃도 피었네요? 모내기가 한 창이네요? 참으로 경이로운 계절입니다. 제비도 둥지를 다 완성했어요. 얼마나 포근하겠어요. 데카르트도 제비와 같이 편안한 상념의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찰의 시간이 다가 온 것입니다. 제비는 알을 낳을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제비가 자신의 “방법의 주요규칙들”이란 알을 낳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또한 “몇 가지 도덕 격률들”이란 풀들을 둥지에 깔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제비도 포근하고 푹신푹신한 데카르트의 풀 방석이 필요하리라고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비가 알을 낳고, 알을 잘 품어야 되잖아요.
제비는 극심한 산고 끝에 4개의 알을 낳았어요. 경이로운 계절에 새 생명의 탄생은 또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가요? 새로운 생명의 탄생! 그것은 아픔과 고통이 수반됩니다. 그래서 어머니라는 이름은 숭고한 것이지요. 그러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암흑의 중세기를 넘어, “회의주의” 가 판 치고 있던 르네상스 시기에, 그것은 제비의 산고와 같이, 아울러 데카르트에게도 피할 수 없는 “성찰”의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를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알의 탄생은 생물학적인 것이지만, 데카르트의 “새로운 생명의 알”은 중세철학과 근대철학을 확연히 구분 지우는 사상의 경계선이며, 유럽 대륙의 “이성적 합리론”의 출발을 알리는 팡파르였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 철학 수업시간에 잠깐 샛길로 빠졌던 “고대 회의주의”에 대하여 부언 설명 할 생각은 없지만, 이 말만은 하고 싶네요. 르네상스 시기에 “고대 회의주의”를 화려하게 부활 시켰던 “몽테뉴”를 만났다는 사실 말입니다. “몽테뉴”는 “고대 회의주의”에서, “에포케(판단유보)” 와 “아타락시아(마음의 평안)”를 받아드려 그의 글, 즉, “에세”를 통하여 자기자신의 삶을 통찰하였고, 데카르트는 이러한 “몽테뉴”의 회의주의 사상을 극복하고자 노력함으로써 그 유명한 “방법적 회의”를 통하여 그의 철학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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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봄에서 여름의 문턱을 넘어서려고 하고 있네요. 먼 산 데카르트의 철학나무들도 연 초록색에서 짙은 녹색으로 변하고 있어요. 제비는 자신이 낳은 4개의 “방법적 회의”의 알들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이 알들은 “명증성의 규칙”, “분해의 규칙”, “합성의 규칙”, “열거의 규칙”이라고 말 합니다. “첫째, 명증적으로 참이라고 인식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둘째, 검토할 어려움들을 각각 잘 해결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작은 부분으로 나눌 것, 셋째, 내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 나아갈 것, 즉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 쉬운 대상에서 출발하여 마치 계단을 올라가듯 조금씩 올라가 가장 복잡한 것의 인식에까지 이를 것, 넷째, 아무것도 빠트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완벽한 열거와 전반적인 검사를 어디에서나 행할 것”(방법서설, 310p) 입니다.
제비는 데카르트가 그의 “성찰”을 시작했을 때에 같이 있었던 것 같아요. 데카르트가 23살이던 독일의 울름이란 작은 마을에서요. 산행도 같이 했어요.
“왜
사람들은 편한 길로만 다니려고 하죠?” 제비가 물었죠.
“그러니까 말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저 바위와 낭떠러지가 있는 길로 가 볼까?”
“바로 저 길이 직선 코스이거든. 인생은 스스로 혼자서 개척해 나가야만 해! ”
“그리고 네가 알을 낳을 때쯤 성숙해지면 내가 다시 알려 주마!
그래서 제비는 4개의 알을 낳고, 그 알들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제비는 둥지에 깔린 데카르트의 따뜻한 풀 방석에서 알들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오직 모성애라는 본능, 즉, 직관에 따른 것이죠. 자기의 본능적 직관과 조상들과 친척들이 하였던 가장 사려 깊은 방법에 따라 알들을 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재잘거리는 소리(말)만 가지고 알이 깨어나겠어요? 항상 따뜻하게 품에 품어 주는 행동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제비의 모성애는 오직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비의 직관(앎)은 품는 것이요, 품는 것은 바로 모성애적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모성애라는 행동은 곧 앎이고, 앎이 곧 모성애이니까요?
언행일치! 저는 데카르트의 첫 번째 도덕격률을 이 한마디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어떤
것을 믿는 사유 작용은 그것을 믿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유작용과 다른 것이며, 이 양자는 각기 다른
하나 없이도 종종 가능하기 때문이다. (방법서설, 174p)”
데카르트의 이 말은 실생활에서 가장 사려 깊은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는 것은 바로 언행일치가 되는 사람들을 찾아 그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비와 같은 모성애! 그것은 바로 데카르트의 첫 번째 도덕격률을 따르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만 해서 되나요? 인간사! 제비보다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안 나요.
아! 이제 알겠네요. 그래서 데카르트는 가장
사려 깊게 제비와 함께 온 것일 거예요.
제비의 모성애는 확고하고 결연합니다. 알들을 깨어나게 하겠다는 일념 밖에 없습니다. 하루 온종일, 그리고 때가 될 때까지 품고 또 품는 오직 이 한 길! 이 생명 다하도록 오직 이 한 길! 그대를 사랑하리라! 신파 조 같나요? 제비에게는 후회와 자책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겠군요. 왜냐하면 “행동에 있어서 가능한 한 확고하고 결연한 태도를 취하고, 아무리 의심스런 의견이라도 일단 그것을 취하기로 결정했다면 아주 확실한 것인 양 따라야 한다”(방법서설, 175p) 라는 데카르트의 두 번째 도덕격률이 풀 방석에 아로새겨져 있을 테니까요. 참으로 제비는 데카르트의 훌륭한 제자입니다.
만일, 제비에게 욕망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 제비의 욕망을 인간들은 이해할까요? 아마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를 포함해서요.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할 수 있을 거예요. 단순하고 바보 같은 질문이죠. “제비는 왜 봄이 오면 날아 올까요?” 조류학자에게 물어볼까요? 그냥 제가 답을 할래요. 웃지 마세요. “봄이 되었으니까!”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요.. “한 마리 제비가 날아왔다고 봄이 오는 것은 아니다. (one swallow does not make a spring)” 그러나 한 마리, 두 마리, 계속해서 제비가 날아오면 봄이 오고 희망도 따라 오지 않나요?
저는
제비의 욕망은 봄이다 라고 생각해요. 봄은 “희망”입니다. “두려움”의
반대말이 “희망”인가요? 데카르트에 있어 “희망”은 그가 세 번째 도덕격률을 만들고, 그 것을 그대로 실천하고 노력하였던 것이 아닐까요? 그의 세 번째
도덕격률은 아래와 같습니다. .
언제나 운명보다는 나 자신을 이기려고 노력하고, 세계의 질서보다는 내 욕망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우리가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생각 밖에 없으므로, 우리 외부에 있는 것에 대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여전히 이루지 못한 것은 우리에게 전혀 불가능한 것이라고 믿는데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방법서설, 176p) 이러한 세가지 도덕격률은 그 자신을 지도하려고
설정된 것이었으며, 이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극도의
만족감”을 느끼며 “내 모든 계획은 내 스스로 확신하고, 무른 흙이나 모래를 젖혀두고 바위나 찰흙을
발견하자는 것이었다”(방법서설, 180p) 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데카르트는 봄을 기다리고 있어요.
두려움을 넘어 희망으로! 가는 데카르트!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이는 누구나 다 아는 이 충무공의 정신입니다. “두려움을 넘어 희망으로!” 이는 사상가인 데카르트의 길이였고, “生卽死,, 死卽生!” 이는 무인인 이 충무공의 길이였으리라! 데카르트에게는 회의주의라는 적이 있었고, 성웅 이순신에게는 왜군이라는 적이 있었으리라! 한 사람은 유럽 근대 철학의 아버지였고, 또 한 사람은 대한민국의 성웅이었으리라!
“희망”을
듬뿍 안고, 올 봄에 제비와 함께 온 데카르트!
데카르트의 자신감에 힘입어, 위대한 탄생의 역사가 창조되었습니다. 드디어, 제비 새끼들이 알을 깨고 나왔어요. 얼마나 탐스럽고 귀여운지 모르겠어요. 저것 좀 보세요. 서로 먹이를 먹으려고 안달이 났네요. 이젠 완연한 여름입니다. 먹이는 지천에 있을 겁니다. 어미가 더욱 더 바빠지겠네요. 조금 있으면 눈들을 뜨겠네요. 보푸라기 같은 털들이 사라지고 제
모습을 찾을 때쯤이면 여름은 막바지로 치달을 것입니다.
아~ 참~! 이름을 지어야겠어요. 옆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데카르트에게 물어보아야 하겠어요. 무엇이
좋을까? 뭐 라고요? 데카르트씨! 알았어요. 으음! 그것이 좋겠어요. 4마리니까, 우선 실한 놈 두 마리는 각 각 “명증” 과 “분해” 라고 하고, 나머지
두 마리는 각 각 “합성” 과 “열거” 라고 부르겠어요. 귀여운 녀석들아! 잘 먹고 무럭무럭 자라거라! 나중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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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습니다. 열대야에 좀 시달렸어요. 이제는 밤 공기가 제법 서늘합니다..
계절이 바뀔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 세월이 빠르네요. 가을이 왔어요! 귀여운 요 놈들 어떻게 하고 있나 가서 좀 볼 까요. 이젠 완전히 어른 제비들이 되었어요 하루 온 종일 부지런하게 형이상학 뿌리에 있는 벌레들을 잡아먹고, 철학나무 가지들에서 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다르네요. 각자 무엇인가 골몰히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머리를 갸우뚱 거리며, 오직 진리 탐구에 전념하는 모습입니다. 철학나무 가지들에서 무엇인가
깨달은 것이 있나 봅니다.
“명증”이가 무엇이라고 재잘거리고 있어요?
“애들아! 우리들도 이제 이 곳을 떠날
때가 된 것 같아!”
“우리도 이제 성숙한 나이가 되었으니, 이 곳을 떠나기 전에 추억들을 정리하여 보자!”
“마침 오늘 우리 배불리 먹었고, 이 철학나무가 너무 포근하고, 고요한 것 같아!”
“우리 지금부터 정신을 집중해서 각자의 생각들을 말해 보자!”
“명증”: 나는
말이야! 데카르트 선생님이 우리 엄마랑 같이 이 곳에 온 뜻이 있는 것 같아!내 이름도 "명증”이라 지어 주시고…... 그러니까 우리 “방법적 회의”를 시작 해 보자!
“분해”:“방법적
회의?”좋아! 내가 보니까 이 세상은 의문투성이야! 믿을 것이 하나도 없어! 그래서
우리가 떠나기 전에 한번은 모든 것을 철저하게 전복시켜 최초의 토대에서부터 다시 시작 해야 한다는 각오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
“합성”: 너 참
말 잘했다! 그런데 모든 의견들을 다 검토하다 보면, 이
밤이 지나도 모자랄 거야! 일일이
검토해 볼 필요가 없어! 우리들이 “회의주의” 철학자는 아니잖아! 그들은 한 물 갔어! 따라서 기존 의견들의 원리들 자체(ipsa principia)를
바로 검토해 보자!
“열거”: 그래
맞아! 그렇지만 그들의 방법을 따를 필요는 있어! 의심 하는
방법 말이야!왜냐하면 이에는 이라는 말이 있잖아!
저기 나뭇가지에 거미 보이니? 거미가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을 풀어내어 집을 짓는 것처럼, 명석 판명하게 우리 생각들을 풀어 내 보자!
“명증”: “방법적
회의”란 다른 것이 아니야! 우리 눈과 세계 가운데에 있는 색안경, 즉
선입견과 편견을 제거하고 투명하게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야! 그 방법이 바로 직관이야! 직관은 참된 지식을 얻도록 인도 해주는 방법이지! 참된 지식은 감각의
눈으로 볼 수 없어! 이성의 눈으로 우리 이성이 명하는 바를 따르면 돼! 직관은 수학처럼 합리적이거든!
“분해”: 감각은 종종 우리들을 속이고 있어. 지렁이인줄 알고 먹으려고 보니 아닌 적이 여러 번이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재잘거리고 있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닐까? 봐! 내가 두 다리로 서서 너희들을 보고 있잖아! “명증”아! 너 지금 뭐하고 있어! 내 말 안 듣고! 만약 “명증”이 네가 없어져도 나는 너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
“합성”: 역시 너 답 구나! 사람들은 우리들 보고 제비라고 부르잖아! 우리들이 모두 강남으로 날아가서 여기에 없어도 말이야!“제비”라는 말은 일종의 상(imagines), 즉,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본유관념이야!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태어나! 그래서 내년 봄에 우리들을 기억하지!
“열거”: 그러면 본유관념이 진짜네! 우~와~ 대단하다! 우리가 없더라도 사람들은 우리들을 기억하니까. 이왕이면 우리 다 함께 노래 부르자! 사람들이 더 잘 기억하도록 말이야! 무슨 노랠 부를까? 그래! 맞아! “비발디의 4계”를 부르자! 그 중에서도 “봄”의 노래를 부르자!
아름다운
노래 소리를 듣고 어미와 데카르트가 그들을 찾아 왔습니다.
“너희들 여기 있었구나!”“데카르트 선생님께 인사 드려라!”
그 들은 모두 인사 드리고 나서, 지금까지 자기들이 했던 이야기들을 어미와 데카르트 선생님에게 말씀 드렸습니다.
데카르트는 그 말들을 듣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어요.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지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회의론자들이 제기하는 가당치 않은 억측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주목하고서, 이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일원리로 거리낌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방법서설, 185p) 이는 형이상학적 의심의 터널 속에서, 일생에 한 번은 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전복시켜 최초의 토대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데카르트가 발견해낸 그의 철학의 제일원리이자 진리였던 것입니다.
의심이 발견해 낸 의심할 수 없는 진리! 모든 것을 의심하고자 노력하는 자가, 의심을 하고 있는 한,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는 없다는 점과, 그렇게 사고를 하고 또 다른 모든 것들은 의심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는 없는 존재란 육체일 수가 없고 우리가 영혼이나 사유라고 일컫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나는 이러한 사유의 존재를 제일원리로 받아드렸다. (철학의 원리 532p)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것이 무엇인지 좀 더 따져 볼까요. 여기에서 존재한다고 입증된 것은 “나” 라기보다 내 생각이며, 내 생각의 활동, “나”의 사유 작용입니다. 생각하는 누군가가 없다면 생각도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나”는 바로 이 생각의 주체이며, 따라서 생각하는 주체인 “나”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존재할 까요? 그것은 육체처럼 연장된 것으로, 어떤 공간을 차지하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의 본질은 연장이 아니라 생각인 것입니다. 이리하여 데카르트는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구별하는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계속해서 생각합니다. “나”만 있으면 뭐합니까? 친구도 있어야 하고 나를 풍요롭게 해 줄 세계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자기 관념들을 뒤지기 시작합니다. 뭔가가 없을까? 그런데 관념들 중에는 “신의 관념”이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이 “신의 관념” 으로부터 세계 전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도출 합니다. 어떻게 도출 할까요?
“계속해서, 내가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 또
의심하는 것 보다는 인식하는 것이 더 큰 완전성이므로 내 존재는 아주 완전한 것이 아님을 반성했다. 그런
다음에 내가 어떻게 해서 나보다 더 완전한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고찰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실제로 더 완전한 어떤 본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명증적으로 알게 되었다. (방법서설, 187p)”이 “신의 관념”은 내가 멋대로 지어낸 것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보다 훨씬
급이 더 높기 때문이지요. 데카르트가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 그것은
불완전성 때문이지요. 만일 내가 완전한 존재라면 내 생각이 맞을까라고 의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내가 불완전성을 느낀다는 것은 실제로 완전한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완전한 것! 이것이 바로 신 아닌가요?
“그러나 내 정신 속에는 오래된 한 가지 의견이 새겨져 있다. 즉,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또 지금의 내 모습대로 나를 창조했을 신이
존재한다는 의견이다. 그렇다면 땅, 하늘, 연장적 사물, 형태, 크기, 장소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을 지금 보는 그대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저 신이 만들지 않았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제1성찰, 38p)” 용의주도한 데카르트입니다. 한편으론 자신감에 차 있네요.
“신에 대해 말한 것은 일종의 우화라는 것만을 인정해 두겠다”(제1성찰, 39p) 하면서
말이지요. “우화”에서“진리”를 말하고 있으니까요. “아프리카의
우화”에서 가젤은 새벽이면 일어나 달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살아남기 위해서지요. “좋다! 이 세계가 우화라고 쳐보자!” “그래 좋다. 우리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치자”(제1성찰, 36p)
그래? 좋다! 한 판 붙자! 결의에 찬 데카르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꿈을 꾸고 있는 “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신은 “가장 완전한 존재자”가 아니냐고 말입니다.
“가장 완전한 존재자”인 신이 “있음”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은 악령처럼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식하는 내가 있다고 하는 것은 진리이며,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내 육체, 하늘과 땅, 수학적 공리도 모두 진리인 것입니다.
이제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토대는 완성 되었습니다. “이성이 우리에게 분명히 명하는
바는, 모든 우리의 관념 혹은 개념은 어떤 진리의 토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아주 완전하고 진실된 신이 이런 토대 없이 관념들을 우리 속에 집어넣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방법서설, 195p)
이와 같이 “이성의 명증 성”에 의해 신과 정신에 대한 인식을 확보한 후, 그는 세계의
존재를 구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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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들이 만해 마을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다고 연락이 왔어요. 저 머나먼 강남으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네요? 우리 철학 도반님들 같이 가지 않을래요. 가서, 설악의 단풍이 왜 물드는지,
물든 다음에 왜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지, 그리고 엄동을 맞을 비장한 차비를 왜 하는지, 생명의 운행이란 자연의 법칙은 왜 진행이 되는지를 물어 보아야 되지 않겠어요? 그러한 것들을 자신에게 묻고 답하기에는 설악 능선 만해의 하루
밤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척이나 기다려지네요!
나무는 뿌리만큼 자란다고 합니다. 저의 철학나무 뿌리가 얼마나 자랐을까요? 저의 철학나무 뿌리는 영혼을 찾아 헤매는 마음(minds)이자 정신입니다. 영혼은 생명의 원리이고 형상의 원인입니다. 영혼을 찾아 헤매는 마음! 그것은 바로 “생각하는 나(thinking thing)”이며 제가 존재하는 유일한 제일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나무의 뿌리가 있는 한, 제가 존재하는 한(res cogitans), 그 나무의 줄기와 가지와 잎들과 저 아름다운 설악의 능선들(res extence) 은 거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이라는 신의 협조아래 말입니다. “생각하는 나(thinking thing)”가 유한한(finite) 것이라면 신(res cogitans)은 영원한(infinite) 것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나에 비해 신은 완전한 존재자이기 때문에, 신은 혼돈(chaos)이 아닌 대 자연의 질서(cosmos)를 우리 영혼 속에 각인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법칙들은 신이 자연 속에 확립시켜 놓은 것이고, 또 그 개념을 우리 영혼 속에
각인시켜 놓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반성만 한다면 세계에 있는, 또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서 그 법칙이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음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방법서설, 196p)” 데카르트는 여기에서 자신의 자연학이
연역적 체계, 즉 원인에서 결과로 나아가는 체계로 형성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방법서설, 295p)
데카르트는 신의 무한한 완전성이라는 원리에만 의거해서 자연의 법칙을 증명하려고 노력했으며, 그 자연의 물질들이 이 법칙에 따라 어떻게 배치되고 정돈되어야 하는지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 물질들이 빛의 천공을 넘어, 지구와 유성과 혜성을 형성하며, 태양과 항성을 넘어, 이 곳 설악능선에 이르기 까지, 만해 마을에 머무르기 까지, 또 그 원리들을 우리 영혼 속에 본래적으로 있는 어떤 진리의 씨앗에서만 끌어내려고 했음을(방법서설, 222p) 우리는 만해 마을 밤에 만끽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여 봅니다.
또한 그에 따르면, 짐승은 이성이나 정신을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즉, “감각적 영혼”이나 “식물적 영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혼은 오직 “이성적 영혼” 혹은 정신일 수 있으며, 인간만이 정신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 이외의 모든 생물체는 기계와 다름 아니고, 그래서 그 활동은 모두 기계적인 운동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동물은 정신을 전혀 갖지 않고 있고, 기관의 배치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 바로 그의 자연이며, 이는 바퀴와 태엽만으로 만들어진 시계가 우리의 능력 이상으로 정확하게 시간을 헤아리고 때를 측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방법서설, 216p) 라고 말하고 있지요.
우리 인간만이 정신을 갖고 있다면 정신은 무엇인가요?
정신은 뭐지? 걱정 말아! (No Matter: 단어
그대로는 물질이 아니라는 뜻이 되므로, 실제의 의미와 괴리하고 있는 데에 착안한 말 장난이다) 육체는 뭐지? 신경 쓸 것 없어(Never
Mind: 마찬가지로 단어 그대로는 정신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데카르트는 정신(사유)과 육체(연장)는 아주 상이한 두 종류의 존재라는 이원론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하나의 물음을 야기합니다. 만약 이 둘이 다른 것이라면, 육체가 어떻게 정신에 변화를 일으키고 정신이 육체에 어떻게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요? 예를 들면 우리는 물질적인 대상들을 지각하고, 우리의 의지로 신체의 부분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데카르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을 까요. 그 답은 철학나무의 열매에 있습니다. 정신과 육체의 일치 문제, 즉 도덕학입니다. 데카르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인간의 육체, 감정, 정념(passion), 이러한 것들은 이성과 달리 절제할 줄도 모르고 굉장히 불안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안정되게 만들거나 억제하기 위해서 이성을 동원하는데 그다지 잘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 삶과 직결된 문제가 바로 정신과 육체의 일치, 이성과 감정의 일치가 아니겠어요?
데카르트의 철학나무 뿌리는 형이상학이며, 그 줄기는 물리학입니다. 그리고 그 줄기에서 뻗어 나오는 가지들에서 의학, 기계학, 도덕학이란 열매들이 맺힙니다. 그리고 도덕학이 이러한 열매들 중 최고의 열매입니다.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알아야 하듯이, 우리 자신의 육체를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육체를 알아야 합니다. 그 육체에서 파생하는 감정과 정념을 규제하고 그 힘을 조절하려면 감정과 정념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영혼과 육체를 구분하는 그의 이원론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던 엘리자베스 공주의 요청에 의해 마지막으로 “정념론”이라는 책을 씁니다. 우리들은 “정념”에 대해 살펴 보았지요. 이예진 학생이 정리한 “프로토콜 8”의 앞 부분을 살짝 요약하여 봅니다.
“모든 “정념”은 영혼과 관련된 것이다. 다만 정념은 영혼이 능동적(action)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passion)인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정념은 “닥쳐오는 것”이며, 그 정념의 원인이 되는 것은 외부자극이나 어떤 상황이다. 데카르트에 있어 이러한 정념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 근거는 데카르트가 정념론에서 한 주장에 있다. 212개의 단상으로 이루어진 정념론 중 212번째 단상에서 데카르트는 “삶의 모든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정념에 의존한다” 물론 지혜는 우리가 정념의 주인이 되게 하고 정념을 여러 기술로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가르쳐준다. 이렇게 함으로서 정념이 일으키는 나쁜 것들을 견디게 해주고 나아가 기쁨을 끄집어 내도록 해준다.”
그래서 데카르트에게는 “어떻게 육체를 이성적 영혼으로 통제할 수 있을까?” 라는 문제를
다루는 “도덕론”이 바로 그가 서있는 “도덕론”의 기초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 본 임시
도덕을 넘어서, 그의 “도덕론”은 “정념론”에서 성립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방법서설 5부, 자연학적
문제들 마지막에서 “이성적 영혼”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성적 영혼은 물질의 힘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창조된 것이며……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감각과 욕망을 지니고, 그래서
진정한 인간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이성적 영혼은 신체와 결합되고 합일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 영혼이
신체와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알게 된다면, 우리 영혼은 본성상 신체와 전적으로 무관한 것이고, 따라서 신체와 더불어 사멸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근거들을 훨씬 잘 이해할 것이며, 아울러 영혼을 파괴할 수 있는 어떤 원인도 발견할 수 없으므로 영혼불멸이라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것이다.”(방법서설, 217p)
요컨대 그는 인간의 감정과 이성의 화합을 통해 영혼의 도덕적 주체의 본성을 규명함으로써, 도덕의
주요한 유용성을 확립하고자 하였으며, 영혼과 육체의 결합체로서 인간이 어떻게 주체적 존재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더구나 불멸에 이르기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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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능선의 단풍들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어요. 저것 보세요. “명증” 과 “분해”, “합성” 과 “열거”네 마리가 어미와 같이 비상하고
있어요. 데카르트 선생님도 와 계시네요.
우리들의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어요.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 일까요?
창공을 넘어, 이성의 빛이 비추는 영혼 속으로 힘차게 날아갈 것입니다. 데카르트 선생님도 작별의 손을 흔드시며 말씀하시네요?
“여러분! 인생길이 아무리 외롭고 두렵더라도 확신에 찬 삶 속에서 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내년 봄을 다시 기대하여 봅니다. 모두들 안녕히 계십시오. -끝- 2014년 10월 2일 고상기 씀
첫댓글 멋지십니다!
제가 보답하는 길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을 뿐입니다.
토마스님, 대단하십니다~~!존경스러워요~~!
너무 과찬이십니다. 하릴없이 이생각 저 생각하다가 제비집을 발견하고는...
우리 반장님의 역작 고대합니다.
저도 70대에 이런 글 써 보고 싶습니다...꾸~벅~^^
원장님! 제 육체는 70대가 아닌 60대라도 제 이성은 20대이거든요?
더구나 제 영혼은 언제나 철학적 청춘에 머물고 싶네요.
깊고 풍부한 토마스님의 세계를 엿본듯합니다 대단하십니다~~
머물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토마스님
귀쫑의 대표 철학자세요
어이쿠! 이제 보았네요!
저를 키워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