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노 없는 편의점
노을이 찬란하면 그 아파트는 황금빛이다. 유리창에 반사하는 노을빛으로 가히 몽환적이다. 아파트 위치에 따라 숲세권, 팍(park)세권 같은 것이 있다면 그곳은 노을권이라고 해도 좋겠다. 산 정상이었을 그곳, 조망권은 말할 나위 없고 무한한 하늘이 배경임에 더 말해 무엇하랴.
큰길을 두 번 건너야 갈 수 있는 거리. 그래도 운동 삼아 가볼 만하지만 사람이나 물건이나 가까이 보면 실망하기 마련이어서 그대로 멀리서 보기로 했다. 하지만 환상은 우연이든 필연이든 언젠가는 깨지게 돼 있다. 십년지기인 Y가 찾아왔다. 추석 전날이라 식당을 찾지 못한 우리는 마트에서 초밥을 사 들고 적당한 장소를 찾아 헤매다 그곳이 떠올랐다.
차를 몰아 아파트 앞에 도달했으나 초밥을 든 손이 무안했다. 편의점 앞 공터는 그 흔한 의자 하나 없었다. 젊은 사장은 우리가 유난스럽다는 듯 마지못해 귀퉁이에 박혀 있던 플라스틱 의자와 탁자를 꺼내왔다. 거기서 초밥을 먹겠다는 조건으로 커피와 이것저것 사고, 쓰레기는 말끔히 치우고, 탁자도 접어서 제자리에 두기로 했다.
Y는 편의점에 들어가고 나는 초밥을 펼쳐 놓고 내려다보니 산 정상의 전망대처럼 활연했다. 시야가 확 터진 것만으로도 다른 세상이었다. 청량한 가을 햇살, 삽상한 가을바람, 수런대는 나뭇잎 소리…. 절로 깊은숨이 들이켜졌다. 발아래로 보이는 도서관도 행정복지타운도 멀리 보이는 우리 아파트도 분양사무실에 있는 조형물 같았다.
아파트는 넓은 거실 창은 없고 작은 창만 다닥다닥 있어서 큰 평수는 아닐 것 같았다. 몇 평일까. 본능에 가까운 의문이다. 이해 상관없고 살 것도 아닌데도 우리는 그게 궁금하고 때로는 평수로 사람을 평가하기도 한다. 재산 형편은 물론이고 인격까지도 합산해버린다. 그래도 저래도 알고 싶은 아파트 평수. 작은 것은 확실한데…. 그때 Y가 나오면서 투덜댔다.
“무슨 아메리카노 없는 편의점이 다 있어.”
“왜 없대?”
“물어보려다 참았어. 사장이 하도 뻣뻣해서.”
아메리카노 없는 편의점이라. 식후 숭늉에서 생수, 그리고 커피가 그 자리를 차지한 판인데 편의점에 커피머신이 없다는 게 이상했다. 팩에 든 아메리카노마저도 무설탕이 없다는 것은 확실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이유라면 팔리지 않아서일 텐데 팔리지 않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혀가 졸아들 것처럼 단 커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초밥 먹은 후, Y가 한 모금 하더니 진저리를 쳤다. 단 커피를 즐기지 않는 나로서도 영 아니었다. 의자는 왜 비치하지 않고 아메리카노는 왜 없을까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당연한 것을 왜? 그때 팔십쯤 돼 보이는 남자 노인이 편의점 뒤쪽에서 의자를 가지고 와서 칠팔 미터쯤 떨어진 곳에 앉았다. 조금 멈칫거리더니 흐릿한 눈동자를 최대한 크게 굴려 말을 걸었다.
“그거 어디서 났어요?”
우리가 마시는 커피를 말함이다. 당연히 그 편의점에서 샀다는 걸 알 텐데 그걸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닐 테고. 그러는 동안 조금씩 다가온 의자와 노인은 어느덧 우리 코앞이었다. 우리도 웬만큼 나이 들었으니 남자가 늙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계를 푼 Y가 편의점을 가리키며 공손한 말씨로 대답했다.
“저기서 샀지요. 하나 사드려요?”
나는 그녀를 쿡 찔렀고 노인은 의외라는 듯 우리 쪽으로 의자를 더 끌어당겼다. 어떤 방법으로라도 말을 걸고 싶은 눈치였다. 혹시 작업에 걸려든 건 아닐까 할 정도로 노인은 적극적이었다. 전화번호라도 딸 것 같던 노인은 커피도 번호도 아니었다. 곧 죽어도 여자에게 얻어먹진 않겠다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우리 사이 끼어들어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묵은 걸 다 토해내듯 노인의 말씀은 장황했다.
노인의 아파트 상세 정보에 따르면 아홉 평 임대 아파트이며 입주민은 거의 노인이라고 했다. 자기는 집에 섞어진 커피(커피믹스)가 떨어지지 않게 많이 있다고 자랑처럼 얘기했다. 마치 상비약이나 비상식량을 비축해놓기라도 한 것처럼. 편의점에 아메리카노가 없는 궁금증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사장은 사정도 모르면서 무설탕 아메리카노를 찾는 우리가 얄미워서 뻣뻣했던 걸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노인의 말을 더는 들어줄 수 없었다. 결코 아파트 평수 때문은 아니었다. 우리도 우리끼리 할 말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호응하지 않자 노인은 목청을 높였다.
“아줌마!”
“여사님!”
그랬다가 호칭을 드높여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애원인지 원망인지 모를 목소리로 여자하고 말해본 게 언제냐는 듯한 표정이 간절하기까지 했다. 더는 젊지도 빛나지도 않고 올라갈 곳도 없는 나는 노인의 쓸쓸한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얼마나 말이 하고 싶고, 상대할 사람이 없으면 저럴까도 싶었지만, 그만큼 들어줬으면 됐다고 생각했다.
자리를 정리하려는데 젊은 사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거창한 오토바이를 모셔 왔다. 엄청 멋지고 비싸 보이는 BMW 오토바이. 생뚱맞은 게 우린지 오토바이인지 알 수 없어도 그 자리에 의자를 비치하지 않은 이유는 확실했다. 우리는 잠시 빌렸던 오토바이 자리를 서둘러 반납했다.
그래도 아쉬워 머뭇거리던 노인. 그가 자랑삼아서 말했던 것은 불타는 저녁노을도 전망 좋은 아파트도 아니었다. 그저 단맛이었다. 그러고 보니 엄마도 연세 들어서는 달콤한 커피믹스를 좋아했다. 집요한 세월은 입맛의 개성도 앗아가나 보다. 얼굴 윤곽도 미각도 흐려지다가 종국에는 같아지는 것일까. 설문조사 없이도 아메리카노가 없는 이유는 유추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