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의 모순과 불공평, 견뎌낼 희망
세상은 요지경입니다. 귀에 익은 대중가요 가사처럼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무리 내 처지가 그렇다 해도 이건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남들은 부모를 잘 만나 걱정 없이 부모덕을 보며 사는데, 왜 나는 힘없고 가난한 부모를 만났는지 속상하기만 합니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 정상인데, 이 사회는 여전히 가진 사람들에게만 기회가 열려 있고,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이들에게는 아무리 애를 써도 좀처럼 인생 역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왜 세상은 이토록 모순덩어리인지, 이 불공평한 세상에서 살아갈 의미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던지는 삶의 모순과 불공평에 대한 물음은 흔히 사주팔자나 운명론에서 다루어지는 주제입니다. 태어난 운명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신세에 대한 자괴감으로 자신의 처지를 달래는 정도에 그칩니다. 하지만 신앙인에게 이 질문은 전혀 다른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곧 교회에서 배운 대로라면 하느님께서 그토록 선하고 정의로우며 사랑 자체이시라면 왜 세상의 모순과 불공평에 눈을 감아버리시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탓 없이 삶의 밑바닥에서 헤매는 사람들, 진실하고 소박하게 세상의 정의를 위해 투신하면서 참된 영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불의하게 박해를 받거나 고통을 당하는 일은 없게 해야 참으로 공평한 하느님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악의 문제, 고통의 문제는 인류의 시작과 함께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생한 인간 본연의 물음에 속합니다. 종교 또한 이 질문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종교가 세상의 불의와 모순에 해답을 줄 수 있다면, 그 답은 지금의 모순과 불공평을 견뎌낼 수 있을 만큼의 납득 가능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까요?
종교학자 벨테B.Welte는 우리가 유한(有限)과 무한(無限)의 겨룸터에 있다는 표현을 쓴 바 있습니다. 세상 속에 사는 내가 어쩔 수 없니 겪을 수밖에 없는 유한의 모순들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선사된 자유 덕분에 우리는 서로에게 제한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에 열정을 쏟으며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소유와 애착이 생기고, 내 열정 밖에 놓여 있는 것에 무관심하거나 배제해 버리는 일이 생깁니다. 아무리 내가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고 이해한다 해도 내가 표현해낼 수 있는 말과 행동, 마음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보여 주고 싶은 것은 많은데 보여줄 수 없는 것 때문에 상처 받고 오해받고 무시당합니다. 그래서 힘들고 아픕니다.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배우자와 가족, 친구와 동료 신자들이 밉고, 그 미움이 커지면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냅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의 악순환이 일어납니다.
불공평한 세상도 이와 비슷합니다. 내 딴에는 성실하고 열심히 살지만 내가 차지할 수 있는 영역은 다른 사람들의 성실과 열정으로 제한을 받습니다. 누구나 더 많이, 더 편히, 더 높이 오르고 싶지만 제한된 이 세상은 우리에게 공평함과 정당함을 늘 약속해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 인간이 본질적으로 지닌 모순 때문입니다.
소유 욕구에 비해 실제로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욕구만큼이나 나의 평화와 행복을 제한하는 또 다른 사람들의 욕구가 내 삶을 제한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제한된 땅과 재화, 쉽게 넘어설 수 없는 규범으로 뭉쳐진 권력과 사회구조 때문에 우리의 욕구와 자유는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 특정한 가치관과 이념이 나의 고유한 가치관과 자유를 지배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박탈하는 일도 생깁니다. 그래서 세상의 부조리와 불공평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립니다.
이 부조리한 세상의 모순과 불공평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솔직히 살면서 가장 모순적이고 불공평한 것은 나 자신한테서 나온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영원을 움켜잡을 수 없는 존재의 부조리, 시찌프스 신화처럼 아무리 정상으로 돌을 굴려 올려도 결국에는 또 다시 굴러 떨어지고 마는 우리의 실존(實存) 말입니다. 그래서 실존적 모순을 넘어서는 유일한 길은 우리 자신이 유한한 세상에 갇혀 생生을 둘러싼 모순과 부조리 앞에서도 내 영혼의 자유, 곧 죽음을 넘어서 영원을 향한 희망의 자유는 어느 누구도 억압하거나 박탈할 수 없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사한 고유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사제로 살면서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이자 외로움은 내 안에 갇힌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할 때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삶이 있고, 내가 살고 싶은 사제의 삶이 있지만, 내 현실의 자화상은 늘 그런 이상적 자아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내 삶의 부조리, 내 존재의 모순을 느낄 때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 7,15)
나는 분명히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내 존재의 모순과 같이 나를 악으로 이끄는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것이 두렵기도 합니다.
신앙은 이런 자신의 내적 모순과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나는 결국 죽을 운명이라는 것, 세상의 불의와 고통이 인간이 제한된 자유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내 자유의 몫을 찾는 일에서 벗어나 영원 안에서, 무한하신 하느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존재의 바닥도 모르면서 무조건 자신이 만들어낸 하느님을 우상처럼 모시고 청원기도만 바치는 그런 신앙은 시련이 닥치면 언젠가는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 이런 신앙은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께 맡기신 분, 세상의 모순과 불공평에 주저앉지 않고 하느님을 향한 희망 속에 철저하게 자신을 내어주신 분, 십자가 위에서 고통의 악순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분, 그래서 고통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 되고,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 단어가 아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분, 그분의 삶 속에 신앙인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보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마태 4,19) 하시는 예수님을 따라나서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