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일 불날 (음 7.19)
"첫 주, 밥 선생님이 누구세요?"
며칠 전 다하지가 물었다.
개학 첫 주는 천지인이 네 개 모둠이 하루씩 돌아가며
밥선생을 도우며 밥 공부를 하기로 했단다.
허걱! 난데...
오래(!) 살다보니 내가 누구에게 '밥'을 가르치는 날도 오는구나.
참으로 기이한 경험을 하게 생겼도다. 거 참...
밥상 모임에서 가장 중심에 둔 2학기 천지인 밥상은 바로 '자립(自立)'이다.
자립의 반대는 '기대기' 또는 '묻어가기'.
천지인 아이들이 아직은 연습이 부족하다는 데 뜻을 함께 했다.
쌀을 세제로 씻는 줄 알고있고, 안 자른 미역으로 바로 국을 끓인다.
팽이버섯은 한 결씩 찢은 후에 밑둥을 다시 하나하나 칼로 자른다.
지금까지 엄마들의 정성과 사랑으로 천지인 밥상을 꾸려갔다면
이제는 아이들 스스로 설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어쩌면 더 어려울 수도 있겠다. 그러니 좋은 공부가 되겠지.
첫 날이다.
찬, 은성, 이령, 인, 은혁이와 함께다.
아이들이 귀교한 일요일엔
은새 생일이라고 이령이가 미역국을 끓이고,
내가 집에서 짜장밥 소스를 볶아갔다.
미역국이 제법 포스가 있다. 그런데 뭔가 허전.
아하! 마늘을 찧어 넣고, 간 좀 더 하고, 들깨까루 풀어 완성.
본디 집에서 돌아 온 날엔 (미리 잘 먹여서 보내시나?)
아이들이 밥을 잘 먹지않는다는 통념을 깨고
제비 새끼들처럼 재잘재잘하며 잘 먹어주었다.
아침은 황태 두부국 레시피만 주고 갔는데 인이가 끓였단다.
바닥에 조금 남아있어 맛을 보니 오호! 제법이다.
(이걸로 오후에 두더지와 바람별이 감탄하시며 소주 안주 하셨단다.)
# 고춧잎 나물
찬인 눈이 퉁퉁 부어있다. 컨디션이 썩 좋아보이지 않는다.
틈만 나면 어딘가에 앉아있으려고 한다.
심지어는 김치 냉장고 위에까지.
찬이가 고춧잎을 데쳤다.
예전에 시래기 데칠 때의 신공을 발휘해 보라 했다.
출근길 함박꽃이 알려준 대로
팔팔 끓으면 고춧잎을 넣고 바로 불을 끄라고 했다.
소금은 왜 넣는지 알려주니 다들 신기해 한다.
찬이는 매뉴얼대로 잘 하는 아이다.
살짜쿵 데친 고춧잎을 찬물에 바로 식히라고 했는데
다른 일 하다 얼핏 보니 한 주먹밖에 되지 않는다.
"찬아, 그게 다야?"
"네."
어쩔끄나. 진짜 한 주먹밖에 안 된다. 넉넉히 산다고 샀는데...
"다른 반찬 하나 더 할까?"
"글쎄요."
"인아, 아무래도 부족하지 않겠냐?"
"아녜요. 그냥 다른 반찬 먹어요."
"음... 안 되겠다. 양을 늘리자!"
조림용으로 비축해 놓은 두부 두 모를 으깼다.
인이랑 쑥덕쑥덕해서 대충 양을 늘렸다.
들기름과 소금 넣고 버물버물.
함박꽃이 마늘은 넣지 말랬는데
두부까지 더하니 맛이 너무 심심해서 조금만 넣었다.
그러고보니 인이 손가락이 길고 가늘다.
나물 무치기에 딱 좋은 손일세.
행여 양이 줄까봐 간도 눈꼽만큼씩만 봤다.
둘이 마주보고 히죽히죽.
인이가 달려나가 장독 뚜껑 하나 들고 온다.
이쁘게 세팅까지 완료!
# 호박잎 감자 된장찌개
지난 봄에 천지인 데리고 바람별.서로별이
텃밭에 구덩이에 거름 넣고 모종을 심었었다.
풀 땜에 잘 될까 싶었는데 꽤 주렁주렁 굴러 다닌다.
예초기 아빠들 덕에 호박넝쿨이 백 미터 밖에서도 보인다.
호박잎 넉넉히 끊고, 큼지막한 놈으로 호박도 한 덩이 뚝.
감자는 작은별네서 보관하시던 걸 보내주셨다.
은성.은혁 형제가 칼질을 맡았다.
호박 깍뚝썰기하라니 대략난감.
(둥근 걸 네모로 썰라하면 아이들이 대개 이런 반응)
시범 한 번 보이니 나를 神 보듯 한다. ㅋㅋ
은성에게 고추 어슷썰기 하라니까 갸우뚱 하더니
칼을 옆으로 눕혀 고추 껍질을 벗기듯 깨작깨작.
곁에 있던 이령이가 폭소를 터뜨린다.
된장은 은혁이가 풀었다.
형하고 얼굴이 점점 닮아간다고 했더니 피식 웃는다.
짜식, 시크하긴. 여전히 수박색 츄리닝 윗도리를 입고 있다.
"은혁아, 된장 이겨넣을 체 가져 와."
"네? (냄비 들고) 이거요? (소쿠리 들고) 이거요?"
보다 못한 형님 한 마디,
"야! 거기 그물같이 생긴 거 있잖아."
이령이는 홍일점 역할을 야무지게 한다.
오빠 동생들이 놓친 거, 헤매는 거 소리없이 해치운다.
곁에 있으니 참말로 든든하다.
호박잎은 싹싹 비벼서 씻으라고 했더니 다들,
"왜요?"
"안 그럼 뻐시대."
"........???"
"뻣뻣해서 못 먹는다고."
"아아!"
나도 순천 와서 첨 배운 말인데
요놈들은 순천 토박이들 아닌가배?
정겨운 사투리가 점점 사라져 감을 느낀다.
아쉽다. 사투리가 월매나 귄있는디...
뻐신 호박잎 비비던 인이가 멋쩍은 표정으로 다가온다.
"찢어졌어요. ㅠㅠ"
어차피 찢어서도 넣으니 괜찮다 했다.
아 참! 우리 엄마가 고추장을 살짝 풀라고 하셨지.
"얘들아, 고추장 좀 가져 와."
"안 돼요. 고추장 넣지 마요. 맛이 진짜 이상해요."
맛을 보니 정말 묘한 맛이 났다.
"저희가 이런 고추장 먹고 살았어요. 흑흑흑!"
중간에 뭐가 들어가 맛이 변한 모양이다.
조금밖에 남지 않았으니 멸치조림 등을 해야겠다.
과장된 엄살 액션으로 결국 고춧가루 넣는 걸로 타협.
다함께 '간' 모심.
찬인 낙천주의자 (괜찮은데요?)
은성인 짠돌이 (싱거워요. 제가 원래 짜게 먹어요.)
은혁이와 인이는 절대미각 (싱거워요. 된장 더 넣어요.)
이령이는 차도녀(냄새 난다고 간을 안 봤다.)로 밝혀짐.
"이대로 내가면 될까?"
"네에~"
#밥
한 번도 밥을 해 보지 않았다는 은혁이가 맡았다.
내가 보기에 밥물이 약간 적은듯 했다.
"괜찮을까?"
"네, 괜찮을 것 같아요."
"너 밥 망치면 책임져야 돼."
"네? 네..."
밥이 어찌 되었을까?
펄팩 그 자체! 고슬고슬 쫀득쫀득.
은혁이가 숨은 고수일세.
이렇게 첫 날 점심을 차려냈다.

오후 5시에 다시 모여 저녁 준비.
# 김치찜
이령이가 메인 쉐프다. 은성인 보조.
은새가 엄청 좋아하는 반찬이란다.
잘 익은 김장김치(아이들이 정말 좋아한다)를 꺼낸다.
"이거면 되지 않을까?"
"(단호하게) 아뇨! 더 해야 해요."
이령이가 한 포기를 더 꺼낸다. 과연 큰 손 문이령!
(이령이가 옳았다. 모자라서 나중에 오신 두더지는 멸치만 드셨다.)
김치찜은 기다림의 반찬이라고 했더니,
은성이가 한숨을 쉰다.
"정말 그러네요."
옆에 지키고 앉아 계속 물을 부어준다.
멸치 듬뿍 넣고 (여수 김준호 아저씨 멸친데 진짜 맛있다)
중약불에 계속 약 다리듯 고아야 한다.
그렇게 완성된 김치찜은 모두를 개운함의 세계로 안내했다.
이령이의 프로 정신에 박수를 보낸다.
(바닥에 약간 탄 게 있었는데 아주 괴로워했다)
# 달걀찜
찬이와 은혁이가 자청.
달나무 농장에서 매 주 두 판(60알)씩 공급 받기로 했다.
찬이가 달걀을 풀고 물을 맞추는 동안,
은혁인 새우젓을 다졌다. 신기해 했다.
당근, 양파 다지기도 배워서 처음 해 보았다.
(처음에 당근을 동그라미로 잘라 다지는데 애 먹었다)
"야, 조은혁! 너 아까 달걀 껍데기 빠뜨렸지?"
찬이가 새끼 손톱만한 건더기를 건져 올린다.
양이 모자라 은혁이더러 다섯 알 더 넣으랄 때 생긴 일.
은혁이 달걀 풀라고 했더니 숟가락으로 왕복 젓기만 하길래,
"그러다간 너 졸업할 때까지도 안 풀어져. 거품기를 써."
"그런 게 있어요?"
코 앞에 갖다주니 엄청 신기해 한다.
찬이가 중탕 준비를 하는데,
밖에서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아우성인데다가
합창 시작 전에 밥모심을 마쳐야 하는
민들레, 신난다, 봉봉, 다하지, 연두가 계셔
긴급히 중탕에서 직화로 급변침.
찬이가 껄껄 웃는다.
"이게 될까요? 안 탈까요?"
"약불에 계속 저으면 돼."
매뉴얼대로 진짜 성실하게 젓는다.
몽글몽글 달걀이 뭉치기 시작한다.
간이 딱 맞다.
다진 새우젓만 넣고 약간 싱거워서
찬이와 은혁이가 상의 끝에 소금을 추가했단다.
달걀찜인듯 스크램블 에그인듯한 반찬도 완성.
# 김구이
"김을 그냥 구워서 간장에 낼까, 들기름 발라 구울까?"
모두가 그냥 굽자고 한다.
"어떤 게 맛있는데?"
"들기름 바른거요."
"그러면 어떻게 할까?"
"그냥 구워요."
"..................."
이 때다.
"제가 들기름 발라 구울게요."
인이다.
(아, 이뻐! 궁딩이 토닥토닥)
한 장 한 장 들기름 바르고 소금 쳐서
후라이팬에 구워냈다. 무려 50장.
"50장 이거 저녁에 다 먹을 수 있을까?"
"다 먹을 수 있어요! (아까 이령이처럼 단호)"
"들기름은 타면 안 돼. 발암물질인 벤조피렌이 나와."
"오~ 제니스 유식한데요?"
이령이가 날 놀린다.
첫 장을 시식한 찬이가 씨익 웃는다.
"맛있긴 맛있네요."
양은 어땠을까?
인이가 옳았다.
남으면 눅눅해 질까봐 몰래 빼서 밀폐용기에 담아뒀는데
결국 내 손으로 들고나와 다 비웠다.
이렇게 저녁을 차렸다.

합창 개학이었다.
반가운 얼굴들과 노래 부르며
내내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다.
오늘 크게 배웠다.
'양에 대해서만큼은 아이들이 무조건 옳다.'
내일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