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 인간의 ‘속됨’과 ‘성스러움’이 만나는 자리
세상 창조 때 하신 하느님 말씀, “보시니 좋았다.”(창세 1,12) 무엇이 좋으셨을까요? 당신께서 지으신 세사에 대한 흐뭇함이었을까요? 아니면 창조된 세상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본 성경 저자의 확신이었을까요? 혹시 무질서한 현실 세계에서 태초의 창조질서가 지닌 아름다움을 되찾고자 하는 희망의 메시지는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결코 조화롭거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교개를 돌리실 정도입니다. 어두움과 무질서, 혼돈과 파괴가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살인과 자살, 폭력과 전쟁, 환경파괴와 자연재앙, 이른바 죽음의 문화와 죽임의 문화가 기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세상의 속됨은 인새의 진흙탕을 뒹굴어본 사람일수록 더 처절하게 느낍니다. 물질적 풍요에 가려진 가난의 현실, 가진 자와 배부른 자 뒤편에는 여전히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고, 먹고 싶어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결코 공평하지도 평화롭지도 사랑스럽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만 그런 건 아닙니다. 우리 자신도 그렇습니다. 내 안에 자리한 엄청난 어두움을 피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보고 싶지 않은 또 다른 내 모습, 누구한테 행여 드러날까 두려워 숨겨야 하는 내 나약한 모습이 있습니다.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할수록 자신 안의 모순을 더 분명히 느끼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사제가 되고 나서 내 안에 견디기 힘든 모순들이 있음을 절감하며 지냅니다.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것과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무척 다릅니다. 사람들은 나한테 말도 잘하고 똑똑하고, 심지어 잘 생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때로 말만 잘하는 내 모습, 똑똑한 척하는 내 모습, 능력 있어 보이지만 우유부단한 내 모습을 봅니다. 누군가 나한테 잘 생겼다고 하면 거울을 보고 ‘좀 그런가?’ 하다가 이내 배불뚝이 못난 내 모습에 자조 섞인 웃음을 짓기도 합니다. 영성생활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나는 바쁜 일상에 쫓겨 기도할 시간도, 성경 읽을 시간도 없이 지냅니다. 사람들한테는 무척 바쁜 사제로 알려져 있지만, 시간이 나서 책상 앞에 앉으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를 때도 많습니다. 인간적 욕구와 욕정, 교만과 위선의 그림자를 나 또한 떨쳐버리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게 사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하느님 없이 사는 날도 많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정작 나의 십자가는 외면합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려 해도, 예수님을 친구처럼 벗 삼으려 해도 내 마음에 남겨진 어두움은 나를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영성의 대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어둔 밤’이 그랬고, 평생 하느님을 숨결처럼 느꼈던 성녀 소화 데레사가 죽음 직전에 남긴 “못된 유물론자들의 망령이 나를 엄습합니다.”란 말이 그랬습니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성녀 마더 데레사도 “내 안에 너무나 끔찍한 어둠이 있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물며 나는 어떤가요?
나와 세상의 이러한 ‘속됨’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속되고 추악한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18세기 계몽주의가 드러낸 이성의 광기가 종교적 삶의 의미를 조롱하고, 종교 없는 유토피아를 꿈꾸던 세상에서 루돌프 오토(1869-1937)란 종교학자는 인간의 원초적 체험은 바로 ‘거룩함’ 또는 ‘성스러움’의 체험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번쯤은 일상에서뿐 아니라, 바오로 사도처럼 뜻밖에 다가오는 ‘거룩함’의 현현 앞에 무릎을 꿇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인물이든, 대자연이든, 어떤 특정한 사건이든 간에 우리를 엄습하는 성스러운 체험 앞에서 인간은 ‘두려움’이나 ‘경외심’과 동시에 ‘감탄’과 ‘매력’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단맛 쓴맛을 다 겪으신 어느 신부님의 어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아요. 이미 세상에 살면서 천국과 지옥을 다 경험해 봤으니 그 어떤 심판도 두렵지 않아요.” 실상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형태와 정도는 달라도 지옥 같은 순간을 경험해 봤고, 천국처럼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도 경험해 봤습니다. 천국은 그 어떤 것도 더는 필요하지 않은 가장 완전한 행복, 곧 속된 세상살이에서 꿈꾸던 ‘성스러움’의 강렬한 체험입니다.
반대로 지옥은 행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락의 체험입니다. ‘성스러움’의 소멸입니다. 만일 우리가 거룩한 실재 앞에 서게 된다면 기쁨보다는 두려움을 갖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성스러움’ 앞에 선 나의 속됨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체험은 내 생각과 가치관, 행동까지 뒤바꿔 놓을만한 엄청난 ‘성스러움’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체험의 순간을 뒤늦게 발견할 수도 있고, 무시할 수도 있으며,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런 ‘성스러움’의 체험을 세상 밖에서는 결코 경험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속된 세상 안에서 체험합니다.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세상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은 곳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혼돈 속에서 창조질서와 조화를 이루시고, 죄와 타락의 역사 속에서 용서와 구원의 손길을 뻗치십니다. 우리가 속되다고 치부하는 삶의 모든 영역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으로 찾는 여정입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초고속 인터넷과 디지털 문화의 범람 속에서도 여전히 단순함과 노동으로 성스러움을 살아가는 가난한 농부들의 손길에서, 엄청난 죄의 대가로 죽음의 문턱에서 살면서도 회개와 용서를 청하는 눈물에서, 누구도 딛고 싶지 않은 버려진 땅에서 생명을 지키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손길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벗어나 타인의 생명을 구하려는 자기희생의 열정에서, 수도원 울타리 안에서 세상의 성화를 위해 바치는 단순한 기도에서 그리고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나한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려는 결심에서 우리는 세상 안에 존재하는 ‘성스러움’을 바라봅니다.
세상은 속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은 우리가 ‘성스러움’을 만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세상을 벗어난 거룩함의 체험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세상에 사는 이유입니다. 삶의 모순 속에서도 우리가 여전히 세상에서 살며 하느님을 찾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
아멘. 아멘. 아멘.~~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는 것.
세상 안에 존재하는 ‘성스러움’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