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최장순
강이 꽝꽝 얼어 있다. 누군가 던져놓은 돌을 껴안은 채 실금도 미동도 없는 저 강은 지금, 두 손을 깍지 낀 단호함이다. 제아무리 문고리를 잡아 흔들어도 기척이 없는 닫힌 문이다.
문은 소통이다. 걸음이 들고 나는 속에서 정이 오가고 말이 통한다. 살짝 열린 문으로 들여다보는 안과 내다보는 바깥은 은밀하게 통한다. 문이 없다면 벽을 허물거나 월담을 해야 한다. 월담은 불미스런 소문이 담을 넘으니 불법, 문은 정정당당한 통과의례가 아닌가.
문은 신분이다. 구중궁궐 왕이 지나는 문이 있었고, 나인들이 드나드는 뒷문도 있었다. 성곽의 후미진 곳에는 시체가 들고나는 시구문이 있었다. 솟을대문과 사립문, 형식적인 싸리문은 모두 신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문은 집 안팎을 구분하지만 방 안팎을 경계 짓는 방문이 있다. 세상과 속세를 구분하는 일주문이 있고 도성의 망루를 겸한 성문이 있다. 나제통문처럼 암벽을 뚫은 동굴도 거적을 달면 문이 된다.
보이는 것만이 문은 아니다. 의식의 문, 통과의례의 문이 그렇다. 입신출세를 위해서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등용문이 그것이다. 이때의 문은 목표 지향성이어서 기꺼이 그곳을 통과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이 문의 통과 여부에 따라 성공과 실패도 갈리고 기쁨과 슬픔이 일거나 소멸한다. 문은 절대 호락호락 저를 열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영원히 닫혀있지도 않다. 아무리 어려운 문이라도 당당히 열 수 있는 자격을 쥔 자에게는 공손해진다.
문이라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허공을 날고 싶은 인간은 새를 키워 하늘을 얻는다. 든든히 먹이를 주어 날려 보내고, 다시 그들이 수집해온 먼 곳의 소식을 듣지만, 갈증은 해소되지 않아 다른 곳으로 몸소 날아가고 싶어 한다. 그 욕구를 조금이나마 충족시켜 주는 것이 비행수단이다. 공항은 공중과 땅을 연결하는 문이다. 지상에서 발을 뗀 비행기가 최대한 오를 수 있는 허공까지를 하늘이라 한다면, 공항은 하늘을 오르거나 지상에 내려오기 위한 관문이다. 시공을 초월한 구원의 세계에서도 마음의 문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신의 영역이 아무리 두텁고 단단해도 믿음으로 부단히 두드리고 갈구하지 않는가.
씨앗은 겨우내 얼어있던 딴딴한 흙을 열고 나온다. 땅거죽을 열고나온 새순이 자라고 수많은 가지가 잎을 틔우고 꽃을 피워낸다. 꽃이 지면 열매를 맺고 겨울이면 다시 땅속으로 들어간다. 이렇듯 땅에는 계절을 관장하는 문이 있기에 봄은 문을 열고 겨울은 문을 닫는다. 인간이니 땅속으로 들어가면 죽음이다. 죽음은 닫힌 문이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가 있다고 믿는 인간은 사후의 또 다른 문을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항구와 포구는 바다와 뭍을 연결하는 문이다. 항해에 지친 배들의 휴식처인 동시에 큰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하는 곳이다. 뭍을 밀어낸 배가 먼바다로 나갈 수 있는 것은 밤새 거친 파도와 싸운 배들을 품는 항구가 있기 때문이다. 포구는 비릿한 생계를 낚은 이들의 귀환을 반기는 문, 고단한 하루를 씻어내는 왁자한 웃음을 문고리로 달고 있다.
이성과 감성이 한 몸이 될 때에야 열리는 것이 마음의 문이다. 이 문을 열어야 세상이 보인다. 마음이 따라주지 않으면 몸도 말을 듣지 않는다. 고집이 불통을 낳고, 대화 단절이 고립을 부른다. 열기보다는 닫기가 더 쉬운 문이다. 쉬운 것이 언제나 문제를 일으킨다. 믿음이 깨어진 자리, 아픈 상처는 커다란 자물쇠를 채운다. 이 문을 여는 첫 열쇠는 입은 닫고 귀를 먼저 여는 것. 입은 하나지만 귀가 두 개인 것은 말에 앞서 먼저 경청하라는 까닭이다.
오래던 어느 영화 포스터의 "통하였느냐"라는 문자가 유독 와닿았다. 통한다는 것인 상대의 마음과 내 마음이 서로 닿았다는 것, 닫힌 문을 열어젖혔다는 것, 냉기가 온기로 바뀌고, 위와 아래, 부와 빈, 좌와 우가 모두 한 통속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통은 폐쇄된 문이나 다름없다. 그건 분명 죽은 문이다. 죽은 문은 벽이나 다름없다.
빗장을 풀지 않은 강, 그 닫힌 문을 여는 열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제풀에 지쳐 스스로 깍지를 풀거나 저 안쪽 얼어붙은 마음이 스스로 풀려야만 하는 것. 그 문이 스스로 열리기까지 저 안에 봄이 스며들어야만 한다.
닫힘의 끝은 열림이다. 저 강처럼 나는 얼마나 나를 단단히 껴안고 있는가. 얼마나 뻑뻑한 마음의 깍지를 끼고 있는가. 견고한 내 안쪽을 슬쩍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