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은 하고 싶고 주머니는 비었고
"꼭 사복 입고 가야 한다"
"네"
큰어머니의 당부에 대답은 찰떡같이 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새 교복에 가 있었다. 큰어머니 부엌에 계시는 틈을 타 얼른 새 교복을 차려입고 재빨리 대문을 나섰다. 교통수단을 이욯할 일이라고는 없던 어린 내게 땡전 한 푼 없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 이미 걸어서 갈 작정을 했지만 초행길이 두려울만도 한데 그저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누구라도 내 교복 입은 모습을 봐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가슴속은 자랑으로 부풀었다.
입학식을 앞 둔 2월의 어느 날이었다. 중학교 진학을 위해 6학년 말에 서울에 온 나는 용산 큰댁에 신세를 지고 있었다. 우리 식구들은 봄에나 이사 올 예정이었고 아버지는 영등포에 계셨다.
그날 나는 아버지를 뵈러 가야 했다. 혼자 외출할 일이라고는 없는 어린 내게 새 교복을 입고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런데 큰어머니는 그냥 평상복을 입고 가라며 설레는 마음에 슬쩍 침을 놓는다. 차비 때문이었다.
땡땡거리며 도로 가운데로 전차가 다니던 그 시절에 초등학생까지는 교통비가 공짜였다. 그러니 중학생입네 하고 교복을 입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큰어머니가 차비를 주기 싫어 그런 것은 아니었을 터, 아직은 초등학생으로 보여도 되는데 구태여 돈을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셨으리라. 어쨌든 두 말 없이 말씀을 따른다고 했으니 큰어머니의 주머니에서 차비가 나올 리 없다.
짙은 감색 서지 교복에 하얀 칼라, 자랑스러운 학교 빼지에 졸라맨 허리띠의 반짝이는 버클을 나는 도무지 집에 묵혀 둘 수가 없었다. 백합 문양이 그려진 자주색 버클은 내 자부심에 다름이 아니었다. 지방에서 그것도 6학년 끝무렵에 전학온 내게 선생님은 가고 싶은 학교에 원서를 못 내게 하셨다. 실력이 안 되어 틀림없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떼 한 번 써보지 않고 자란 내가 13년 생에 처음으로 다짜고짜 책상에 엎드려 큰 소리로 울었다. 난감해진 담임은 할 수 없이 원서를 써주시며 '떨어져도 내 원망을 하지 말아라' 하셨다.
사촌 언니가 다니고 있던 학교에 대한 내 선망은 곧 그 버클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6학년 말에 지방에서 올라와 입시준비를 할 때 내 목표는 오로지 그 학교였다. 목표는 그랬지만 입시를 위한 다른 노력은 하지 않았다. 언니의 중학교 교과서가 재미나 내 교과서는 밀쳐놓고 읽다가 잠에 빠져들기 일쑤여서 오빠가 잠을 깨우려 일부러 게임도 시키곤 했다.
그때 내 입시공부를 도와주던 고3 오빠는 서울의대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나의 한심한 모습을 늘 빙그레 웃으며 봐주던 오빠는 시험에 떨어지고, 날라리 동생은 거짓말처럼 교복을 입었다. ‘너한테 인생의 한 수를 배웠다’ 알 듯 말 듯 했던 오빠의 말을 잊을 수 없다.
용산에서 영등포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알 필요도 없었다. 아직 물러나지 않은 추위도 아랑곳없었다. 내가 교복을 입었다는 사실만 자랑스러웠다. 나는 걷기 시작했다.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렇게 느긋하면서도 확신에 찬 걸음을 걸어본 적이 있을까. 아무도 봐주지 않았지만 내 생각엔 다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큰집이 있던 용산을 출발, 신용산을 지나 얼마쯤 더 걸어 한강대교에 이르렀다. 세찬 강바람이 자칫 날아갈 것 같았지만 무섭지 않았다. 다리를 건너면 노량진, 그리고 대방동을 거쳐 신길동에서 오르막을 넘자 저 아래로 아버지가 계신 영등포가 보였다.
드디어 해냈다는 뿌듯함이랄까, 안도감에 오르막을 내려가며 마주 본 저무는 태양이 차라리 따스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걸어왔다는 내 말에 너무나 놀라 꽁꽁 언 두 손을 꼭 감싸주던 아버지의 손길도 잊을 수 없는 따뜻함이었다.
아무것도 자랑할 일 없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철없던 그 시절의 내 자랑질, 비록 하찮은 것이지만 그 순도는 높았다. 자랑할 일이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후 별 것도 아닌 일에 그렇게 자랑스럽던 일은 다시 없었다.
아주 오래 전의 그 자랑질이 지금까지도 2월이면 생각난다. 걷는 동안 계속 스쳐가던 2월의 찬 바람결도....
첫댓글 복희성 이야기인가요?
2월 14일 국민학교 졸업식날 눈이 퉁퉁 붓게 울었던 아픈 기억 "기성회비를 납부치 못해 우수상 주기가 곤란함"
생활기록부에 적혀있던 ㅠㅠ 우수상을 이담에 돈벌어서 기성회비 납부하고 찾아가겠다고 소리치고 졸업식장을 뛰쳐나왔던 기억이 밑거름되어 50대 말 중학생이 되었고 그이후 18년(중고등 학교 대학교 방송대 2개 학부)동안 학생증을 소지했기에 그날의 슬픔이 모두 희석되었네요
수옥씨도 참 사연 많아요. 그러니 글을 안 쓸 수가 있나요?
참 요즘은 누구 팬 클럽에서 덕질도 한다면서요?
뭘 하든 즐거우면 되지요.
그래도 면학의 의지가 수옥씨의 오늘을 만들었으니 나보다 훌륭해요.
@이복희 복희성 누구가 정동원(JD1)인거 아시죠
그아이 가슴으로 키우는 재미로 회춘하는 행복한 착각하며 살아요
복희성도 늘 건강하세요
당찬 신입 여중생 모습이 보입니다. 도로 가운데로 전차가 다니던 그 시절. TV에서나 보던 시절입니다.
새 교복 당연히 입고 싶을 나이네요. 차비가 문제인가요.
왠 용기였던지, 무모함이었던지. 지금 생각하면 우스워요.
지금도 아마 버스로 정거장 수가 상당한 거리일 걸요?
그때는 잘도 걸었건만. 지금은 걸어야 산다니 숙제처럼 걷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