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믿음
수학에는 공식이 있고 자연에는 법칙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공식이나 법칙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어떤 문제든지 수학 공식이나 자연 법칙을 암기해 그대로 적용하면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공식이나 법칙에 맞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원칙에 맞지 않은 게 아니라 맞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뿐인데도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서 33장 3절은 “나를 불러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대답해 주고, 네가 몰랐던 큰일과 숨겨진 일들을 너에게 알려 주겠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금식하고 부르짖었지만 응답을 얻지 못하고 상황만 더욱 나빠질 때 혼돈을 일으키게 됩니다.
또 마태오복음 7장 7절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하고 찾고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고 일은 꼬이기만 하며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속으로 ‘성경의 그 말씀은 정말 맞는 것일까, 하느님은 살아 계시는 걸까, 하느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걸까’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1) 하느님은 보이지 않을지라도
이런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했던 사람이 바로 구약의 요셉입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항상 최선을 다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최선은 언제나 최악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형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 형들에게 갔다가 그들에게 미움을 받아 깊은 구덩이에 던져지고 결국 이방 나라인 이집트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절망하지 않았고 이집트의 경호대장인 포티파르의 집에 들어가 관리인으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포티파르의 아내가 젊은 요셉을 유혹하는 바람에 또다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정직한 요셉은 여주인의 유혹을 뿌리쳤지만 오히려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요셉은 기약도 없이 오랫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 ‘왜 내가 이곳에 들어와 있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은 살아 계시고 정직과 진실은 언젠가 통한다는 진리를 믿고 있었습니다.
요셉에 견주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 아마 다니엘일 것입니다. 그는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시대에 권력의 핵심에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느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모든 특권과 신뢰를 잃고 사자굴에 던져지고, 그 친구들은 불가마에 던져졌습니다. 이렇듯 믿음의 원칙이 상식적으로 맞지 않을 때, 하느님은 보이지 않게 되고 믿음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당신은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열심히 기도하는데, 왜 모든 일들이 원칙대로 되지 않는 거요?”라는 비아냥거림 속에 고독이 엄습해 옴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느님을 볼 수 없었지만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다니엘은 죽음 앞에서도 하느님이 도와주시지 않을지라도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결과 요셉은 30살에 이집트의 재상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고, 다니엘은 바빌론 왕국에서 외국인으로서 서열 3위까지 오르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결국 믿음의 원칙을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하느님을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신뢰하는 믿음이라면, 얼마든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그런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타와 여동생 마리아 그리고 오빠 라자로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2) 하느님의 시간 vs 인간의 시간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11,5)
예수님은 라자로의 가정과 매우 친근한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가정들을 사랑하시지만 개인적으로 특별히 라자로의 가정과 친분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라자로를 사랑하신다면,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이 가서 낫게 해주셔야 했을까요? 마리아와 마르타는 라자로가 병들어 죽을 지경에 이르자 예수님께 전갈을 보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입니다.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11,6)
예수님은 라자로의 소식을 들으시고 곧바로 베타니아로 가지 않고 이틀 동안 더 머무르십니다. 과연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고 우리를 돌보시는 방법일까요? 5-6절 말씀에 있는 갈등은 세 가지 이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첫째는 시간표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시간과 마리아와 마르타, 라자로가 생각하는 시간은 다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주님께서 오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기도도 속히 응답을 받았으면 합니다. 곧 ‘나의 시간’에 의한 것입니다. 시간에는 하느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있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들에 대해 항상 ‘나의 때’를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나의 시간에 맞춰 기도에 응답해 주시길 하느님께 원합니다. 지금 상황이 급하니까 하느님이 당장 오셔서 이런저런 방법으로 해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행히 하느님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일치한다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간과 방법은 우리의 것과 다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때와 인간의 때는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때에 맞춰 활동하십니다. 예수님은 늦게 오시는 법도, 일찍 오시는 법도 없이 언제나 정확하게 움직이십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하느님의 시간과 방법은 우리의 것과 다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나를 불러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대답해 주고,
네가 몰랐던 큰일과 숨겨진 일들을 너에게 알려 주겠다.”(예레 33,3)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