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마음의 평화를 찾는 이유
많은 종교인이 신앙을 찾는 가장 큰 이유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인간이 종교에 귀의하는 이유가 현실에서 겪는 불안과 모순, 고통과 죽음의 문제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떤 종교든 마음의 평화를 심어 주려는 노력이야말로 종교의 존재 이유처럼 여겨질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반복된 일상 속에서도 불현 듯 다가오는 불안의 그림자와 수시로 닥치는 내 영혼의 메마름과 혼란스러움은 설령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영혼의 신음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갈망하는 것은 일상에서 자주 반복되는 분노와 미움, 감당할 수 없는 좌절과 회의로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이나 긴 한숨을 내쉬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면 더 간절해집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가톨릭 신자들이 신앙을 갖는 첫 번째 이유로 마음의 평화를 꼽는 반면 개신교 신자들은 ‘구원과 영생’을 얻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더 많이 한다는 점입니다. 말 그대로라면 가톨릭 신자들은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보다 마음의 평화를 얻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인데 과연 그럴까요?
내 생각에 가톨릭 신자들은 내세에 이루어질 것 같은 구원과 영생이라는 교리적 표현보다는 현실에서 찾는 마음의 평화를 좀 더 가깝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피부와 와 닿지 않는 골치 앞는 교리내용보다는 가톨릭교회가 지닌 외형적 이미지, 곧 성당의 조용함과 거룩함, 전례음악의 아름다움, 오랜 전통에서 내려오는 시각적인 엄숙함 등의 복잡한 현대 사회의 일상을 벗어나 조금은 마음에 내적 평화를 가져다 주는 이미지들로 받아들여지는 모양입니다.
예비신자 교리반을 맡으면서 예비자들에게 왜 성당에 나오게 되었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한 예비자는 부인이 열심한 개신교 신자인데 함께 교회를 나가자는 말에 몇 번 쫓아간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예배 분위기를 따라가지 못해 무척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집주변에 있는 성당에 우연히 가게 되었는데, 미사 분위기가 좋아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성당에 앉아 있는 것이 평화롭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처음 보는 얼굴이 나타나면 곧바로 달려들어 인사하고 안내하고 교우로 만들기 위해 애쓰겠지만, 성당에 오면 누구 하나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니 그것도 간섭받지 않는 평화로운 체험에 속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개신교의 열정적인 찬송과 긴 설교와 달리 천주교의 조용한 미사 분위기와 상대적으로 짧은 강론, 게다가 미사가 끝난 후에는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성당을 찾은 예비자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가 찾는 영혼의 평화를 어떻게 채워줄 수 있는지 고민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믿음은 교회의 분위기나 특정한 교리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성경이나 교리에서 찾은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내 영혼의 아픔과 두려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어두움 속에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고달픈지 진지하게 묻고 탄원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참 역설적입니다.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면 이럴 수는 없다.’는 인간적 탄식이 오히려 그러한 탄식을 들어줄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은 두렵고 가슴 떨리는 일입니다. 단순히 가톨릭교회의 외적 매력에 끌려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례하면서 믿음이 시작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이 ‘거룩한 신비’를 실감하며 사는 것은 그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안타까운 점은 가톨릭교회를 찾는 많은 이가 영혼의 어두움 속에서 발견하는 작은 표징들을 따라 교회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입교한 후에는 그들이 갈망하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의 평화를 주기보다 무거운 십자가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더 많아진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가톨릭 신앙이 믿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 단순히 믿음의 절대성이나 감성적 체험만을 강조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가톨릭 신앙의 특징이 무조건 ‘믿습니다.’를 외치거나 ‘아멘’ ‘알렐루야’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신비의 영역으로 넘겨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은 말 그대로 보편적 인간성의 다양한 면모를 믿음의 행위 안에 포괄하고 있기에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 속에는 인간인 나를 이해하는 진지한 내적 성찰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구약의 인물인 욥 이야기에서 잘 드러납니다.
욥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 하느님을 향한 탄원을 그치지 않습니다. 욥이 드리는 탄원의 부당성을 자신들의 논리로 강요하던 세 친구를 거슬러 욥은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 19,26-27)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몰이해와 적당히 타협하거나, 내 생각의 몫을 믿음 한편에 숨겨두지 않고 끝까지 하느님께 매달리며 기어이 자신의 눈으로 그분을 뵙고자 했던 욥의 탄원에서 하느님을 찾는 신앙의 원형을 발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믿음은 분명히 마음의 평화를 구합니다. 하지만 마음의 평화란 그저 믿는다는 막연한 말뿐인 고백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당에서 나름대로 봉사하고 열심히 미사에 참례한다고 해서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알고자 하는 사랑의 갈망을 필요로 합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만 좇아 살아가는 이들이 누리는 마음의 평화는 진흙탕 같은 위기가 닥치면 이내 사라집니다. 마음은 빛만 사랑하지 않고 어두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평생 하느님 현존의 어두움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가 마침내 깨닫고 고백한 것은 하느님의 빛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을 휘감고 있는 어두움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애써 얻은 평화를 잃게 될까 두려워 좋은 것만 찾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삶의 어두움과 두려움,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신뢰에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마음의 평화가 샘솟아 오릅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이 말입니다.
첫댓글 참된 믿음은 삶의 어두움과 두려움,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신뢰에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신부님
아멘. 아멘. 아멘.~~
"믿음은 애써 얻은 평화를 잃게 될까
두려워 좋은 것만 찾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삶의 어두움과 두려움,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신뢰에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 19,26-27)
아멘.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