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글쓰기 22-16 젊음과 늙음(2024.10.16)
오늘은 안삼환 선생님과 <파우스트>를 읽는 날이다. 오늘 읽을 부분은 6566행부터 6818행까지다. 황제의 궁성에서 자신이 데려온 헬레나의 유령에게 반해 파우스트가 난리를 치고난 다음 장면이다. 장소는 예전 파우스트의 방인데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이곳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예전에 파우스트 옷을 입고 만났던 신입생을 다시 만난다.
이제 학사가 된 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예상대로 자신감 충만에 거들먹거림 끝판왕이다. 자기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믿는 그는 자신감이 넘쳐 거만하고 지독하게 무례하다. 그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경험이란 것! 거품과 먼지 같은 것이죠!/정신과는 동등하지 못합니다./고백하시죠, 우리들이 예로부터 알던 것,/그것이 전혀 알 만한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파우스트 >6758-6761행/안삼환 옮김)이라 다그친다. 사람이 삼십 세가 넘으면 벌써 죽은 거나 다름 없으니 때늦지 않게 때려죽이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 말하는 학사의 말에 메피스토펠레스조차 "악마도 여기선 더는 할 말이 없구나."(같은 책 6790행) 탄식한다.
한참 학사의 젊음 타령을 읽고 있는데 대학 때 지도교수님이 '깃털'이라는 한강 작가의 최근작을 보내주셨다. 덕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여쭤봤다. 내가 학교 다니던 때인 1983년이나 1984년에 브레히트 작품 <사천의 선인>을 독어독문학과 연극으로 올린 적이 있지 않느냐고. 유럽인문아카데미에서 하는 이승진 선생님의 '브레히트 희곡 읽기' 수업에서 이번 주에 <사천의 좋은 사람>을 하기 때문에 학교 다닐 때 공연한(나는 오로지 관객이었다) 기억이 났다.
선생님께서 " 1회 물리학자들1983, 2회 필립호츠1984, 3회 문밖에서,1985, 4회 마라사드1986, 5회 사천의선인1987, 내 기억으로는 이렇습니다만"이라고 답을 주셨다. <사천의 선인>은 내가 졸업한 후에 공연한 거였구나. 그런데도 내 기억에는 처음 공연한 '물리학자들'과 '사천의 선인'이 남아 있다.
"다 지나버린 옛날 이야기"라는 선생님께 젊고 무모한 선생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거라고, 선생님이 있고 제가 있고 저는 지금도 <도시의 정글 속에서>와 <사천의 선인>을 읽고 있으니 지나버린 옛날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40년쯤 전에 있었던 어떤 일은 지금도 내게 현재진행형이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기 시작했다는 선생님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메피스토펠레스와 학사의 대화를 마저 읽었다.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학사는 젊음의 가장 고귀한 소명이니 뭐니 떠들어 대다 "암흑은 등 뒤에 두고, 밝음을 향해서!"(같은 책 6806행) 선언하고 퇴장한다. 안삼환 선생님이 예습지에 달아주신 각주를 보고 2부 시작 부분 파우스트의 독백 "태양이여, 부디 내 등 뒤에서 머물러 다오!"(같은 책 4715행)를 찾아봤다. 두 구절을 함께 보니 젊음과 나이듬의 차이를 뚜렷하게 대비시킨 표현이구나 싶다.
젊어도 봤고 늙음을 경험하는 중이기도 한 나는 젊음과 늙음이 어느 한 부분만 뚝 떼어내서 말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겠다. 수십 년 전 있었던 어떤 일이 지금도 내게 현재진행형이듯이 지금 하고 있는 어떤 일은 몇 년 후 몇십 년 후의 나의 일부분이 될 것이다.
지금 잘 살아야 나중에도 잘 살 수 있다. 현재를 제대로 못 살고 미래를 꿈꾸기만 하는 건 옳지 않다. 젊음도 늙음도 존중받아 마땅한 시간들이다. 학사가 퇴장하고 박수를 치지 않는 관객들에게 메피스토펠레스가 한 마디 날린다. "하지만 악마가 늙었다는 걸 염두에 두시게/그러니, 악마를 이해하려거든, 자네들도 늙어 보시게."(같은 책 6817-6878행)
조금씩 늙어가는 내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