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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로 주세요
음력설을 쇘으니 이제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 10여 년 전, 사우나에 갔던 때의 일이다. 프런트에 앉은 아가씨가 할인표를 주었다. 아직은 경로우대까지 가지 않은 나이였는데, 머리털이 좀 하얗게 보였던지 내게 경로우대 할인을 해 준 것이다. 나는 당황하고 황당하기까지 해서 “아니야, 아직 경로 아닌데…”하면서 할인액 1,000원을 되돌려 주었다. ‘아직은 늙어 보이기 싫은데…’하는 마음에서였다.
한데, 요번의 경우는 달랐다. 이제 ‘경로 우대’에 길이든 터라 조금이라도 절약하고자 하는 마음이 발동했다. 음력설 연휴를 보내고 아이들이 모두 떠나버린 날. 우리 내외는 여느 때처럼 쾌적한 온천을 찾아갔다. 창구에서 “광주에서 왔고, 남녀 두 장 주세요.”라고 주문했다. 카드결재가 되는 걸 보니 경로우대가 아니고 일반 성인으로 요금을 정산한 것이다. “아니, 목욕비가 올랐나요?” “아니에요.” “그럼, 왜 1,000원이 더 붙었나?” “경로세요?” “그래요. 경로로 주세요.” “미리 경로라고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아, 네.” 1,000원을 되돌려 받으려니 카드 금액을 다시 환불하여야 하고 새로 정산을 해야 하므로 번거로운 일이었다. “불편하면 관두세요.” “아니에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결국1,000원을 거슬러 받으면서 10년 전의 나의 모습과 오늘의 내 모습을 떠올리며 우리 내외는 서로 보고 웃었다. 우리는 돌아다니기를 좋아해서 국립박물관이며 민속박물관, 또는 국립공원을 갈 때마다 무료입장의 혜택을 받으면서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요새는 노인 우대가 너무 과하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도 그럴 것이 노인이 가는 곳마다 우대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여수해양엑스포나 순천정원박람회만 해도 그렇다. 노인은 일반인의 반액으로 입장하게 했고, 단체 관람인 경우는 그의 절반도 못 미치는 요금만 냈다. 자연히 자주 박람회장에 가게 되고 갈 때마다 새로움에 취했던 것이다. 다 경험, 다 체험, 다 학습이 이루어진 것이다.
지하철 이용객 중에는 노인네들이 많다. 광주의 지하철1호선만 봐도 노인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다. 소위 ‘지공대사’(지하철 공짜로 타고 다니는 사람)가 많다. 소태역에서 타고 송정역에서 내리면 볼거리가 많고, 송정역에서 타고 소태역에서 내리면 먹을거리가 많다. 서울 친구의 얘기를 들으니 지공대사의 하루가 더욱 가관이다. 서울에서 천안까지 공짜로 내려가서 온양에 들러 온천욕하고, 주변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은 뒤, 다시 서울로 공짜 여행. 하루가 넉넉하고 시간도 잘 보내고 친구도 많다. 좋은 세상이다.
우리 늙은이들이 만나면 세월이 너무 빨리 질주한다고 푸념이다. 당연하지. 이 좋은 세상에 하루라도 더 많이 살아야 하는데, 인명은 정해진 것이라. 하루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간다.
정말로 알았네.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정말로 알았네. 인간 사는 곳이 수려하다는 것을. 정말로 알았네. 우리 삶이 사랑스럽다는 것을.
경로 우대는 그것만이 아니다. 구청에서 후원하고 대학이 운영하는 구민체육센터 시설이용료도 노인들을 우대한다. 심지어 승용차 주차비도 반액이다. 그러다 보니 체육센터에는 노인들이 많다. 서로 인사 나누고, 이용법을 가르쳐주고, 친목도 다지게 되니 몸 건강, 마음 건강 일거양득이다.
노인들도 스마트폰 시대에 접어들었다. 최신 스마트폰을 구입해서 전화며, 인터넷이며, 음악이며, 동영상이며, SNS까지 멀티플하게 활용하고 있다. 나도 LTE-A폰을 하나 구입했다. 문제는 요금폭탄이다. 동네 목욕탕에서 1,000원을 아끼는 사람이 월 이용료로 7-8만원을 납부해야 한다면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그래도 편리한 기계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써 왔다. 설날에 큰딸이 정보를 주었다. 경로는 월정액을 10,000원대로 낮출 수 있다는 것. 그날 바로 요금제를 바꾸었다. 이 또한 경로 우대 아닌가!
노인에게 주는 사회적 혜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대를 받는 만큼 우리 노인들이 가진 재능의 일부라도 기부하여야 한다. 노인들은 대접만 받으려는 편협함이 있다. 그러나 받는 것이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노인이 노인 대접만 받으려 하지 말고 젊은이를 대접하려는 마음이 먼저이고 싶다.
10년 전 ‘경로 우대’란 내겐 짐이었으나, 지금의 내겐 ‘경로 우대’가 너무 익숙해져서 탈이다. ‘경로 우대’는 성숙한 노인만이 받는 보너스가 되어야 한다.
노년기에는 인생을 통정하여야 한다.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고 평생과업을 재조명하면서 현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마무리할 수 있도록 자중자애, 아름다운 유산을 남기는 생의 통합이 이루어져야하지 않겠는가.
(201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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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수시대에 경로우대를 과하게 받고 있지는 않는지 ---- 청년실업, 저출산,백수,전문직의 추락,하우스푸어등 젊은이들이 힘드는 시대에 경로우대를 받는것이 조금은 미안한 마음입니다.
경로우대는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장수시대에서
젊은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경로 대상자들도 무조건 우대만
받을 것이 아니라, 젊은이들을 위해 베풀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하고 부양의 대상에서 사회적 조언자로 본생을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