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신께서 허락한 기적
벤은 제인이 작별이 아쉬운 듯 손을 꽉 잡고 흔들 때 났던 알 수 없는 꽃향기가 그리웠다.
그건 꽃향기가 아니라 아쉬움에 설레는 사랑이었다. 체르노빌이 늘 말했던 ‘꽃향기는 사랑’이라는 말이
자꾸만 맴돌고, 결혼한 빌과 요하나의 다정한 모습을 볼 때마다 더욱 생각이 났다.
조향사가 주일에는 온전히 주님의 향기를 느끼고 싶어서 향수도 안 쓴다는데 제인에게서 났던 그 향기
의 진원지를 사랑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면 찾을 수 없는 미스테리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분명한 건 신병으로 전선에 배치되어 삶과 죽음의 전쟁이 임박한 1939년 8월31일 독일 침공 하루 전날
보초를 서던 때였다. 두려움을 이기려고 찬송가를 읊조리다가 요하나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공포가 밀려오고 꽃향기가 뒤를 따라왔다.
돌아보아도 꽃들이 없는 전선의 그날뿐만이 아니라 요하나가 아프거나 측은할 때 느꼈던 꽃향기는
신께서 남매를 측은히 여기고 돌보라는 사랑의 향기라면 제인의 향기는 남녀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사랑의향기라고 결론을 내렸다.
“내가 제인을 사랑했구나. 그때 고백하고 요하나와 결혼 결정을 내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를 했지만 제인은 다시는 만날 수도 없어 마음속에 묻어 두어야 할 한때 아쉬운 꿈이라고 생각했다.
요하나와 결혼 결정을 하러간 여행에서 뜻밖에 제인을 만나자 잠시 심경의 변화가 생겨 둘을 놓고
갈등을 하다가 제인에게 쏠렸던 자신의 행동. 그건 아무에게도 들려주어서는 안 되는 양심가책의
행동이었다.
멍한 시선 속에서는 자꾸만 제인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비온 뒤에 쨍 해가 뜨자 나무와 풀과 꽃들이
벌 나비에게 자신의 향기를 바람 우체부에실어 무료로 팔고 있을 때 숲정이 마을 삼촌 키예프와 한나
그리고 제인은 프랑크푸르트와 폴란드 숲정이를 거쳐 우크라이나를 지나 벤이 들려준 주상절리
입구 큰길에 도착했다.
강을 따라 들어가자 오데사 장교가 뿌려 주고 갔다는 해바라기와 곡물들이 보였다.
추수를 하지 않은 걸로 보아 집근처에 먹 거리가 풍성해서 여기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오지 않은 듯
싶어 키예프가 말했다.
“한나. 저 곡식들로 벤의 가족이 식량난을 해결했다니 오데사 장교의 선한 행실이 참 아름다워요.”
“그래요.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뀐다는 것이 실감이나요. 동쪽 길로 떠나면 서쪽
사람들은 평생 만날 수 없는 것처럼 주상절리 가족은 오데사를 만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그렇지요 우리처럼.”
“우리? 하하하.”
제인은 ‘우리’라는 말에 두 분이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해서 눈이 커졌다. 자신도 지금 숙모의 말대로
동쪽 길로 가고 있으며 프랑크푸르트를 떠나지 않는 서쪽 길의 선택했다면 벤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벤을 만나면 내 인생이 어떻게 변할까? 현실과 상상이 다른 법이니까 벤에게 실망하고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갈까? 만약에 벤과 요하나 언니가 결혼을 했다면? 그래도 내가 주상절리가
좋아서 모든 것을 버리고 정착할까?’
제인의 마음이 동서로 나뉘었다. 아니 세상은 변수가 많아 남북으로 나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복잡
다양한 생각을 떠올릴 때 한나는‘우리’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인. 숲정이에 살던 열 살 소년이 있었는데 그 마을은 집시들의 정착촌이었다. 마음이 맞는 남녀
집시들이 집을 짓고 모여 살았지만 자유분방한 사람들은 술과 파티와 성생활의 문란으로 마치 멸망한
소돔성과 같았다. 방랑의 집시들은 하나둘 마을을 떠나고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우크라이나
집시와 부모가 버린 소년뿐이었다. 집시는 부모의 무관심으로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던 소년이
불쌍해서 자기 고향의 이름을 따서.”
한나는 이야기를 하다가 눈시울이 뜨거워져 잠시 멈추었다. 제인은 숙모가 한 호흡 쉬어가게 하려고
소년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키예프라고 지어주었지요?”
“제인은 참 똑똑해요 하하하.”
한나는 한바탕 웃고 말을 이었다.
“키예프는 마지막 집시를 따라 가려고 프랑크푸르트로 나왔다가 둘은 갈 곳이 없어 교회에 들어갔는데
마침 사찰 할아버지를 만나 집시마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공동체 마을이 이상향
이라며 가족과 교인들을 데리고 집시마을로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
“아하~ 바로 벤의 가족 정착기네요 그리고 삼촌은 마을 삼촌으로 불렸고요.”
“하하하 제인은 하나를 말하면 열을 안다니까 하하하.”
숙모의 이야기가 길어지자 키예프는 인생 후반의 이야기를 도착지점에 맞추어 끝낼 수 있도록 주변
경관을 살피며 차를 천천히 몰았다.
“아이는 물론 아가씨도 없는 마을에서 노총각 삼촌을 장가보내려고 가까운 독일로 보내려는데 10살
소년 ‘막시밀리언’ 따라 나섰고 두 사람은 우리 교회에 왔는데 막시는 자라서 목사가 되었지.”
“아~ 삼촌 회사를 세운 훌륭하신 군인 목사님 요?”
“맞아. 나는 그 당시에 남편이 사고로 사망하고 두 살 반 어린 아이와 살았는데 목사의 딸이라는 내가
아이러니하게 우울증에 시달릴 때였다. 키예프는 장로님 가게 일을 돕고 있었는데 항상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고 다정하고 자상한 모든 면이 위로가 되어 안정을 찾았다. 키예프는 결혼을 했으니
숲정이로 돌아가야 하고 나는 몸과 마음의 치료를 위해 흔쾌히 숲정이로 따라갔던 거야.”
“그래서 숙모님은 마을 숙모님이 되셨고요. 하하하.”
“맞아. 그렇게 우리는 창조자께서 인도하신 동쪽 길 끝 숲정이 에덴동산에서 살게 되었지.”
제인은 지금 가는 자신이 길이 벤을 만나 ‘우리를 만드는 동쪽 길 끝 에덴동산’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윽고 차가 들어 갈수 있는 막바지에 도착했는지 멀리서 벤 가족이 타고 왔다는
버스가 보였다. 곁에는 작은 차도 보이고 한나가 말했다.
“제인 주상절리에 방문객이 있나본데?”
“예 숙모님. 벤이 다녀간 뒤로 같이 사는 숲정이 가족이 생겼을지도 몰라요.”
“그럼 좋겠다.”
버스 뒤에 정차를 하고 세 사람은 녹슨 버스와 처음 보는 이상한 보라색 차를 보고 말했다.
“숙모님 보라색 차가 이상하긴 한데 아주 예뻐요 한 번도 보지 못한 차에요.”
“나도 그래 하하하.”
“한나. 이 차는 독일의 퀴벨바겐과 슈빔바겐을 개조한차인데 어떤 정비사가 만들었는지 정말
훌륭한 솜씨네요. 하하하.”
두 사람이 체르노빌의 차를 살펴보는 사이에 제인은 버스로 눈길을 돌렸다. 문에 달린 팻말을 보고
삼촌을 불렀다.
“삼촌 숙모님 여기에 팻말이 있어요. 주상절리까지 3시간 요하나라고 적혀 있어요.”
두 사람은 팻말을 보고 요하나를 찾기라도 한 듯 기뻤다. 세 사람은 3시간이라는 말에 마음이 들떠 빨리
가자고 서둘렀다. 키에프는 권총을 차고 제인은 배낭을 메고 벤이 말해준대로 나타나는 이정표를
따라갔다.
쨍쨍 나는 햇볕에 더웠다. 숲 속 너른 바위가 여럿이 있어 해를 피해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하지만
쉰다는 것이 먼 길에 피로가 몰려와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모두 다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잠이 들어 주상절리가족을 만나는 꿈을 꾸었다.
제인은 조향사의 직업정신이 꿈속에서도 활동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좋은 향이 나는 꽃을 보면 향수로
만들어 보려는 실험 정신으로 많은 무리의 꽃잎을 따 배낭 안에 담는 꿈과 갈대밭에서 벤과 숨바꼭질을
하는데 꽃향기가 풍겨오는 꿈을 꾸었다.
제인은 갑자기 다가오는 꽃향기에 잠을 깼다. 이상했다. 지금까지 향기를 맡지 못했는데 꿈속처럼 코가 뻥
뚫린 느낌으로 숲속의 모든 향기가 들어왔다. 정신을 차리고 저마다 다른 꽃들의 향기를 맡으며
‘이건 신께서 하락한 기적’이라며 감격했다. 감격을 혼자만 느끼기엔 너무 가슴이 벅차 숙모를 불렀다.
“숙모님 제 코가 뚫렸어요. 아주 좋은 꽃향기가 마구 들어와요.”
숙모와 삼촌은 제인의 외침에 깊은 잠에서 깨고, 꽃향기를 맡았다는 제인이 신기해서 물었다.
“제인~정말 코가 뚫렸어? 꽃향기를 맡았어?”
“예. 숙모님 저는 지금 기적 같은 일에 놀랍고 신기해서 숙모님을 불렀어요.”
“아멘~ 창조자의 놀라운 치유의 기적이다.”
“아멘~”
세 사람은 말로만 듣던 숲속 길 이정표를 따라 키예프가 앞서고 제인의 온 신경이 조향사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마을에 도착하면 향수를 제조할 목적으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꽃들의 향기를 맡은 뒤에
꺾어서 배낭 안에 담으며 따라갔다.
두 마리의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키예프는 소리만 듣고도 전에 키우던 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가움에 키예프 특유의 휘파람을 크게 불었다. 하지만 개들은 나타나지 않고 여전히 짖는 소리만 크게
들려와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다.
“한나. 늑대나 맹수가 있어서 개들을 묶어 놓고 사나 봐요.”
“무서워요 마리아님이 돌아가신 늑대의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르니까.”
“쏘리 취소합니다.”
헤이든이 근친 교배의 피해를 들려주자 요하나가 그걸 막으려고 자기 집 앞에 묶어둔 이후로 자유를
빼앗긴 개들은 후각과 청각이 더욱 놀랍게 발달하였는지 키예프 일행을 알아차리고 큰소리로 짖어댄
덕분이었다.
루카스는 유난히 짖는 개들을 보고 문 밖으로 나와 가로수 먼 길을 살펴보았다. 분명 이 소리는 무언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잠시 후 누군가 세 사람이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구지?’
혼잣말을 하다가 큰소리로 가족들을 불렀다.
“리나. 오스카 누군가 우리 집으로 오고 있어요.”
제일 반가운 것은 사람이었다. 제일먼저 달려온 가시거리가 가장 먼 체르노빌이 말했다.
“남자 같은데요? 그 뒤에 여자가 두 명인데 한 사람은 30여 미터 떨어져 오는데 무언가 발견하고
살펴보는 것 같아요.”
곁에서 실눈을 뜨고 찬찬히 바라보던 요하나가 소리쳤다.
“아버지 키예프 삼촌이에요 숙모님도 오고 계세요.”
“뭐라고 키예프가 독일에서?”
“삼촌~ 숙모님~”
요하나가 달려 나가며 큰 소리로 불렀다. 키예프도 요하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 불렀다.
온 가족이 가로수 길로 달려 나갔다. 만남의 기쁨에 서로를 얼싸안고 이름을 부르며 인간만이 흘리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포옹이 끝나고 제일 늦게 따라온 제인이 밝은 미소로 주상절리 가족에게
인사를 했다. 시선이 제인에게 쏠리고 오스카가 물었다.
“키예프 이 아가씨는 누구지? 딸은 아닌 듯 하고 어디서본 것 같기도 한데?”
“예? 모르시겠어요? 돌아가신 케인 부부의 딸 제인입니다.”
“케인의 딸이라고? 와 정말 몰라보게 아름답게 자랐구나. 올해 몇 살이지?”
“스물 네 살이에요. 오스카 아저씨. 키예프 삼촌과 숙모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에요.”
요하나 제인 리나와 이자벨라의 눈물과 포옹의 인사가 길었다. 여자들의 포옹이 끝나고 그때야 나온
벤이 제인과 눈이 마주쳤다. 제인과 만남은 기뻤지만 기쁨을 감추고 어색한 손을 내밀었다.
제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벤의 손을 힘껏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때 벤의 코에 꽃향기가 풍겨왔다. 그것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났을 때 맡았던 꽃향기는 아니었다.
제인은 그리운 사랑을 찾아 왔으니 무척 반가웠지만 벤은 뜻하지 않게 요하나와 남매라는 사실이
밝혀져 운명적 상처를 입은 상태라 꽃향기에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뜻밖에 찾아 온 제인에게서 또
다른 꽃향기를 느끼자 하늘을 난 듯 기뻤지만 속말을 했다.
“이건 사랑의 향기다.”
제인이 반가움에 흔드는 손에 배낭이 들썩 거리고 배낭 안에 꽃들이 향기를 뿜어냈다.
벤은 이를 제인에게서 나는 향기로 알고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찾은 듯 기뻤다.
제인과 헤어질 때 풍접초의 향기를 제인의향기로 착각했던 것처럼 착각의 연속이었다.
요하나가 물었다.
“제인, 벤이 좋아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