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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피에르 항의 농무(濃霧)<1>
1.
“쌔−ㅇ!”
갑자기 제트기가 지나가는 것 같은 폭음과 함께 베란다의 대형유리 한 장이 박살났다. 초속 50미터의 제18호 태풍 ‘차바’가 아파트 정면으로 휘몰아친 것이다. 깜짝 놀라 일어나 보니 새벽 5시 35분이었다. 30여년을 이곳에서 살아왔지만 태풍에 유리창이 깨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일기예보 때 신문지를 물에 적셔 유리창에 발라놓으라는 말은 공연한 것이 아니었다. 밤새 비가 흩뿌리고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날이 새면서 두 시간동안 놋날 같은 폭우가 쏟아졌다. 비가 그치자 가득 끼어있던 운무도 차츰 걷히기 시작했다. 남부민동 고지대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남항은 여전히 물결이 높다. 오전 9시가 지나자 구름발은 건너편 봉래산 위에 걸려있고 푸른 하늘 한 조각이 얼굴을 드러냈다.
박영훈 관장은 서둘러 남항 어선원종합복지회관으로 출근을 했다. 인도에는 여기저기 점포의 간판이 떨어져 나뒹굴어 있고 비스듬히 스러진 가로수도 보였다. 통행차량이 뜸한 아스팔트길에는 군데군데 물마가 져있었다. 회관 앞 골목길은 빗물이 몰아낸 생활쓰레기들로 지저분하다. 회관3층 외항선원 사무실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드나든다. 5층 사무실에서 내다보는 남항대교에는 끊임없이 높은 파도가 엉겨 붙고 있다. 내항은 대피한 소형선박들로 빼곡하다. 엊그제 까지만 해도 외항에 가득히 정박해있던 대형선박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거제도나 신항 쪽으로 대피한 것 같다.
박 관장은 아직도 심한 태풍이 몰아치면 원양어선을 타고 있을 때 느꼈던 불안이 엄습해온다. 오늘처럼 세차게 폭풍우가 창문을 두드릴 때면 선반위에 얹혀있는 물건들이 떨어져 깨트려질까봐 습관처럼 손으로 붙잡는다. 20여 년 전 그때는 모두가 죽은 목숨이었다. 넓은 바다는 백파로 뒤덮이고 바다 고유의 갈맷빛은 흔적이 없었다. 한차례의 거센 파도에 상갑판의 핸드레일이 엿가락처럼 휘어져 버렸다. 입항 후 확인한 사항이지만 선체 측면 한 부분이 30센티나 쭈그러들었다. 잇달아 밀려오는 파도로 선박조종은 어려워졌고 안전항해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여차하면 SOS를 타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인근의 한국 참치선 하나가 조난을 당하여 SOS를 치는 다급한 신호가 수신되었다. 본선으로부터 서남쪽 300마일 지점이다. 하지만 백파에 휩쓸리는 본선은 조난선을 구조할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가 1등 항해사로 냉동운반선에 승선하고 있을 때였다. 선장과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했으나 위급한 본선이 다른 조난선을 구조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보다는 현재 본선의 위험을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급선무였다. 조타수는 항로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선원들 대부분은 멀미로 비틀거렸다. 도리 없이 1항사인 그가 키를 잡았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두 다리를 벌려 버티며 양쪽 발에 온 힘을 쏟아 부었다. 두려워 떨고 있는 선원들의 목숨은 그의 손에 달렸다. 잇달아 산더미 같은 파도가 몰아치자 갑판위로 해수가 쏟아져 들어왔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갑판의 물은 배수구로 빠지게 되어있지만 물은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본선은 라바울에서 냉동수산물을 가득 적재한 상태였다. 계속 갑판의 해수가 빠지지 않는다면 배는 그대로 침몰할 수도 있었다. 배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선장은 배수구를 뚫기 위해 갑판장을 내보냈다. 경험이 많지 않은 갑판장은 몰아치는 파도에 겁을 집어먹고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할 수없이 그가 라이프라인으로 몸을 단단히 묶고 갑판위로 뛰어들었다. 난간이 2단으로 되어 있는 갑판은 파도에 파손된 상자와 흐트러진 짐짝들로 배수구가 모두 막혀버렸고 나무 조각들이 물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몰아치는 파도에 그의 몸은 한쪽구석으로 밀려 처박혀버렸다. 선장은 브릿지에서 “파도가 몰려온다. 피해라!” 마이크를 잡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위기에서 배를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엉금엉금 기면서 물위에 떠다니는 상자와 나무 조각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20여분동안 혼자서 쓰레기를 치우고 배수구를 뚫으니 물이 ‘촤르르 촤르르’ 소리를 내며 시원스레 빠져나갔다. 갑판의 배수구는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
급박한 상황을 마무리하고 물에 빠진 새앙쥐처럼 침실로 기어 들어가서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쉴 틈도 없이 옷을 갈아입고 다시 브릿지로 올라갔다. 선장을 보좌하여 배를 태풍권에서 벗어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밤에는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했고 이때까지 밥 한 술 먹지도 못했다. 이렇게 파도가 몰아칠 때면 선체의 요동으로 인해 주방기기는 온통 뒤집혀버린다. 주방장은 밥솥을 그러안고 울부짖었다. 큰 가마솥에 쌀을 씻어 넣고 불을 집히려고 시도하지만 솥은 바닥으로 굴러 떨어져버렸다. 주방 바닥에는 쏟아진 쌀과 국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도저히 밥을 지을 수가 없었다. 번갈아가며 전기포트에 물을 끓여 컵라면으로 식사를 대신했다.
이런 상황이 사흘 째 계속되다보니 대부분의 선원들은 절망에 빠져버렸다. 나이 많은 선원들 몇은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족을 작별하는 유서를 쓰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손톱 발톱을 깎아 모았다. 그리고 물이 들어가지 않는 폴리백에 넣고 붉은색 부이를 달아 바다에 던졌다. 이대로 가면 죽음뿐이라는 생각이었다. 폭우는 계속 쏟아져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굵은 빗방울은 물대포를 쏘듯 쏟아지고 있다. 기항지 까지는 아직 70마일이 남았다. 배의 속력은 자꾸만 떨어지고 엔진엔 과부하가 걸리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괌의 아가페 외항에 도착하여 입항을 시도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폭우로 인해 앞을 분간 할 수 없었다. 벌써 다섯 번째 입항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입구를 확인하고 접근하면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이더에는 시커먼 먹구름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밤이 되면 묘박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파도와 싸워야 한다. 입항할 때 1항사의 정위치는 항상 선수이다. 빗방울에 눈을 뜨지 못하고 얼굴이 따거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선장님! 한번만 더 시도해봅시다.”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소리쳤다.
“스텐바이−!”
선장은 과감히 배를 밀어붙였다. 이렇게 배가 계속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도선사의 보트가 나타났다. 죽음으로 치닫던 분위기의 선원들 얼굴에는 살았다는 안도감으로 생기가 돌았다. 배를 부두에 계류시키고 나자 선원들은 서로서로 손을 맞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항해사님, 고맙습니다. 죽은 목숨이었는데−.”
선원들은 갑판을 정리하여 배가 침몰하지 않도록 한 공로를 모두 그에게 돌렸다. 어떤 이는 10여년의 선원생활 가운데 처음 당해본 공포였다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목숨을 건지자 서둘러 유서백을 바다에 던졌던 선원들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는 유서를 파도에 띄운 사람들과 함께 선원회관으로 가서 빨리 집으로 무사하다는 전화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도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아버님, 어머님, 평안하시지요. 저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곳엔 폭풍우가 몰아쳐 괌에 대피해 있습니다.”
“오냐, 집 걱정일랑 말고 니 몸이나 잘 돌봐라.”
위급할 때는 부모님의 음성만 들어도 위안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는 아버지 생각만 하면 악몽 같은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그의 아버지는 전통적인 유교를 믿었고 어머니는 독실한 원불교 신자였다. 그가 어릴 때는 놀이터란 것이 따로 없었다. 학교에 다녀오면 또래 아이들은 땅 따먹기를 하거나 딱지치기, 자치기를 하며 놀았다. 여자 아이들은 고무줄넘기를 했다. 집 가까이에는 거성교회가 있었다. 동생이 먼저 주일학교에 나갔고 그도 동생을 따라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가 되면 소고기 국밥을 얻어먹는 것이 좋았다. 틈나면 교회 놀이터로 달려가 놀았고 주일예배에도 빠지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학습을 받게 되었다. 교회에 재미를 붙였지만 7남매 중 둘째인 그는 집에서는 언제나 환영받지 못했다. 형은 장남이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막내는 여느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아버지가 다른 사람 앞에서 어머니를 부를 때도 형의 이름이나 막내의 이름만 붙여 ‘OO엄마’라고 부르는 것도 못마땅했다. 중간 동생들은 눈치 빠르게 처신해 부모님의 사랑을 나눠 받았다.
그는 언제나 아버지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의 가족은 아버지가 철도 역장이었기 때문에 90평이나 되는 거제동 관사에서 살았다. 넓은 집안을 청소하고 화단을 관리하는 것은 모두 그의 차지였다. 좀 더 자라난 뒤의 일이지만 텃밭에 똥장군을 져 나르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아버지는 퇴근하면 막내 동생을 무등태우고 틈나면 장남과만 함께 놀아주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그때 그는 아버지에게 ‘데려온 자식’이었고 언제나 혹사당했다는 기억밖에 없다. 어쩌다 아버지 서랍에 넣어둔 돈이 한두 푼씩 없어지면 그를 다그쳤다. 그것은 철없는 동생들이 한 짓인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니 형제들과 함께 노는 것마저 싫어졌다. 잘 나가던 교회도 그만 두고 동래성당으로 출석하면서 세례도 받았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부터는 힘든 일은 모두 그에게만 시켰다. 아버지는 애완견을 좋아했다. 아버지가 기르던 개는 요즘처럼 작은 종류의 개가 아니라 덩치가 큰 도베르만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아침마다 개를 몰고 뒷산으로 올라가 똥을 뉘어야 했다.
한번은 아버지와 함께 개를 몰고 산에 오르는 기회가 생겼다. 모처럼 아버지를 따라 놀러간다는 생각을 하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아버지는 등산로의 체육공원 철봉대에서 턱걸이를 시켰다. 유감스럽게도 그때 그는 한 번도 턱걸이를 하지 못했다.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본 아버지는 개 목줄로 그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마치 흑인 노예에게 매질하는 백인 주인 같아보였다. 어쩌다 개가 병들 때면 가축병원으로 몰고 가서 주사를 맞혀야 했다. 부산에서 가축병원은 대청동 미 문화원 옆에 있던 백견사가 유일했다. 거제리에서 대청동까지 왕복 50리 길을 개를 몰고 가축병원에 다녀오면 하루해가 저물었다. 그러다보면 숙제를 하거나 공부를 할 시간도 없었다. 저녁에는 술집에 가서 아버지가 즐겨 마시는 막걸리를 받아오고, 이틀에 한 번씩은 쇠미산에 가서 생수를 길어오는 것도 그의 책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는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놈이 공부를 하면 뭐하나, 싶었다. 입대를 하고 전방에서 군대생활을 마쳤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그를 면회 온 적이 없었다. 꿈을 갖는 것도 헛된 일, 잘 사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왔다. 새엄마는 기독교 신자였지만 계모는 계모였다. 새엄마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막내에게만 맛있는 음식을 주었다. 아버지는 아내의 권유에 이끌려 한 차례씩 교회에 출석했다. 그러나 몇 년 후 그가 원양어선 선장이 되었을 때 어느 날 아버지는 말했다. “내가 다른 아이들보다 네게 투자를 했더라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때가 지난 아버지의 후회였다. 그는 아버지의 이 말을 듣고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 곁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집을 떠나 윤활유 수입상을 한 적이 있지만 경험부족으로 가진 것을 몽땅 날렸다. 유서를 써놓고 바다에 몸을 던지기 위해 동백섬으로 달려간 적도 있었다.
그즈음 매일 들여다보는 것은 신문광고의 구직난이었다. 「선원모집. 월 280,000/400,000원 이상 목돈마련. 경비 및 숙식제공. 친절상담. 바로 취업.」 몇 개의 수산회사에서 낸 광고가 눈에 띄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학력·경력 무관 등 특별한 자격이 없어도 가능했다. 건강한 사람이 결단만하면 바로 승선하여 ‘목돈’을 만져볼 수 있는 것이었다. 비슷한 광고가 나란히 실려 있었다. 하던 사업을 말아먹은 사람에게 가장 솔깃한 것은 거액의 목돈이었다. 인생의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고 생각하니 결심은 의외로 쉽게 할 수 있었다. 맨 첫 번째 광고의 전화번호를 돌렸다. 신호가 한번 울렸을 때 전화는 재깍 연결이 되었다.
“선원모집 광고를 보았습니다. 배를 타려고 하는데요.”
“서류를 준비하셔야 합니다. 주민등록 2통, 예비군이면 초본 1통, 그리고 속옷 등 짐을 준비하여 사무실로 오시면 됩니다.”
여자 사무원은 자세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수속절차가 까다롭지 않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사흘 후 오후시간 남부민동 사무실로 찾아갔다. 회전의자에는 풍채 좋은 사장이 앉아있었다.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고 나서 내일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회사 옆에 있는 숙소를 잡아주었다.
“급여는 언제 지급됩니까?”
가장 궁금했던 점을 먼저 물어보았다.
“기본급 280,000원이고, 3개월마다 보합금(조업기간의 일정비율 성과급)을 정산합니다.”
“보합금은 얼마정도 됩니까?”
“봄철엔 3개월이면 거의 5백만 원 정도 됩니다. 가을철엔 그 두 배정도입니다.”
“한번 출항하면 육지에는 언제쯤 들어옵니까?”
“선박마다 달라요. 한 달에 한번정도 들어오는 배도 있고, 2년 동안 타는 원양어선도 있어요.”
사장은 의외로 자상하고 친절했다. 처음에는 1년여 동안 연근해 선망어선을 탔다. 그때는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씩 집에 올 수 있었다. 그 후 그가 처음 탄 원양어선은 가쓰오(가다랑어)선이었다. 한국선박으로서는 처음 개척되는 분야였다. 당시 천성수산에서 시작한 가쓰오선은 낚시로 가다랑어를 낚아 올리는 어법을 사용했다. 일본에서 처음 선박을 인수하고 귀국하여 다시 선원들을 태우고 부산항을 떠났다. 일본 사세보 항을 거쳐 하와이 호놀룰루로 향하는 10여 일 동안은 하루도 빠짐없이 멀미를 했다. 그는 ‘멀미대장’이란 말을 들으며 죽을 고생을 했지만 다른 선원들은 “이때껏 멀미로 죽은 사람은 없다.”며 무관심했다. 멀미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멀미하는 사람의 심정을 모른다. 온몸이 항상 나른하고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미식거리다가 먹은 것을 다 토해낸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밥 냄새를 맡기가 싫어진다. 동료가 위로한답시고 어깨라도 쓰다듬어주면 그대로 토해버린다. 먹지 않고 계속 토하기만 하다보면 쓸갯물 같은 노란 물이 올라온다. 흔히 ‘똥물’이라고 말한다. 동료들이 플라스틱 바가지에 가득 따라주는 소주를 억지로라도 마시고 나면 어느 정도 진정되기도 한다. 따뜻한 햇볕이 드는 창가에 처량하게 기대앉아 있으면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뱃멀미는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 그러나 그때까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항해사들은 처음으로 승선한 선원들의 멀미를 고쳐주기 위해 호된 훈련을 시켰다. 가장 흔한 방법은 멀미하는 선원을 선박의 제일 높은 마스트에 올려 보내는 것이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발을 헛디디거나 잡은 손을 놓치면 그대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랑이 같은 항해사의 눈길이 무서워 마스트로 기어오른다. 어떤 때는 배가 접안할 때 충격을 완화시키는 타이어펜더를 어깨로 끌고 갑판 위를 뛰어다니게 한다. 그렇다고 멀미가 곧 낫는 것은 아니다. 주위가 빙빙 돌아가며 발이 제대로 갑판에 닿지 않고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기를 반복한다. 초보자는 사흘 쯤 지나면 어느 정도 멀미에서 해방되기도 한다. 그렇게 심하게 멀미를 하다가도 육지만 보이면 신기하게 멎어버린다. 하와이를 출항하여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며 발보아 항구에 입항할 때까지 그는 계속 멀미대장(?)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그 후 산크리스토발 항구를 지나 카리브해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부터는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할 수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가쓰오 어업이 개척이다 보니 일본인 기술자가 동승했다. 어로장, 기관장, 갑판원3명 등 총 5명이 비싼 임금을 받고 기술이전을 위해 승선하고 있었다. 한국인 선원25명은 연수자에 불과했다. 초보인 그는 일본의 기술자들이 지시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떤 때는 잠 한숨 자지 못하고 키를 잡고서서 머리는 생각하고 귀는 들으면서 눈을 뜨고 자는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상상하기조차 힘들지만 부끄럽지 않은 선원이 되기 위해 의지로 견뎌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뱃멀미로 이따금 정상적인 식사를 하지 못했다. 찬물에 밥 한술을 말아 훌훌 들이마시고 양파 한 조각을 된장에 듬뿍 찍어 먹는 것으로 한 끼를 때웠다.
20여 일간 더 항해를 계속한 결과 가쓰오선은 아프리카 가나의 황금해안 테마(Tema) 항구에 입항할 수 있었다. 항구가 좁아 배를 입항시킬 때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선박을 계류하기 위해 부두에 접안을 하니 후끈, 뜨거운 열기가 덮쳐왔다. 염소처럼 새카만 사람들이 맨발로 뛰어다니는 모습이 신기하게 보였다. 입항수속을 끝내고 초대 가쓰오선의 기지장인 K씨의 안내를 받아 오랜만에 육지에 올라 식사를 했다. 잠은 다시 선박으로 돌아와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은 쉴 틈도 없이 가쓰오 출어를 했다.
가쓰오는 농어목 고등어과에 속하는 다랑어의 일종으로 다랭이로도 불리고 있지만 가장 익숙한 이름은 가다랭이이다. ‘참치’라는 명칭은 해방 후 해무청 어획담당관이 이 말이 당시 동해연안의 사투리라는 사실을 모르고 보고서에 기록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가다랭이는 넓은 해수면가까이에서 유영하며 서식하는 표층 외양성 어류로 전 세계 열대 및 온대해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몸길이는 40~50센티, 한 마리 무게는 약4 킬로그램에 이른다. 최대 5만 마리까지 무리를 지어 유영하는 습성이 있으며 가장 큰 것은 1미터가 되는 것도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채낚기 어선이 처음으로 원양에서 시험 조업에 들어간 것이다. 가다랭이 어선의 특징은 700~800톤 규모의 배이나 좌우현에서 낚싯대로 고기를 잡아 올리기 때문에 이에 알맞게 특별히 설계되어 있다. 다른 어선에 비해 선원의 수용능력이 더 커야하고 또한 미끼용 활어창(活魚艙)과 냉동보관을 위한 살수장치(撒水裝置)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다음날 가다랭이선은 첫밗에 만선으로 입항하여 하역작업을 시작했다. 가다랭이를 담은 수조에 냉각수를 채우면 고기는 물 위로 떠오르고 이것을 건져서 보관창고로 옮긴다. 이 일은 현지 주민들에게 맡겨진다. 이들이 하역을 끝내고 하선할 때는 커다란 작업복 속에 가다랭이 한 두 마리씩을 숨기고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배가 도착하면 부두에는 이미 광주리를 든 여인들이 늘어서 있다. 작업인부들은 훔친 가다랭이를 공공연히 이들에게 팔아넘긴다. 그들은 차가운 고기를 옷 속에 숨겨나가다 들켜도 그냥 ‘와이(why)’하고 웃으며 태연히 선원들 앞을 지나간다. 그들이 완전히 하선하기까지는 안심하지 못한다. 주위에 어슬렁거리던 현지 인부는 닫아놓은 보관창고의 해치커버를 열고 가장 큰 고기를 골라 안고 바다로 뛰어든다. 이런 일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그리고는 유유히 헤엄쳐 뭍으로 올라가 고기를 팔아넘긴다. 많은 일손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들을 사전에 통제하기는 어렵다. 어떤 이들은 아프리카라면 야자수 그늘이나 바나나, 파인애플 등 열대과일을 떠올리겠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그 옛날 우리나라의 달동네와 흡사했다. 원양어선을 타는 한국선원들의 가정형편이나 생활수준도 오늘날에 비하면 너무도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연근해 어선원들은 흔히 막장인생이라 할 만큼 최후의 선택을 한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