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史記 31회》
☆장양왕의 사망과 政의 등극
장양왕 자초는 왕위에 오른지 4년차 되는해 5월에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신하들의 노고를 치하 하고자 위수(渭水)에서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한참 흥이 오르는 찰라에 장양왕은 승상 여불위에게만 살짝 "내가 먼저 궁으로 들어갈테니, 개의치 말고 연회를 계속하라"고 일르고 먼저 자리를 떴습니다.
연회는 여불위가 상석에 앉아 문무백관들과 함께 늦게 까지 계속하다 헤어졌는데, 집에 와서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궁에서 내관이 찾아와 임금이 위독하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불위는 내관의 전갈을 받은 즉시 그러면 다음 대권은? 이것을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이었습니다. 여불위는 장사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동물적인 감각이 남달리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의관을 갖추고 궁중으로 들어가니, 내실에 왕비와 영정, 그리고 왕족 몇명이 장양왕을 둘러싸고 있었고 장양왕은 식물인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병인(病因)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곽란(위 경련)이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의 주치의가 진맥을 하더니, 맥이 다시 뛰기 시작하였으니, 가족들만 남고 모두 나가라고 해서 여불위도 밖으로 나와 접견실에서 다른 신하들과 담소를 나누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새벽에 다시 내관이 달려와 대왕마마께서 붕어 하셨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여불위는 다시 궁으로 달려들어가보니, 왕비 조희를 비롯해 모든 왕족들이 넋을 잃고 있었습니다.
여불위는 시신을 내려다보며 "이 사람과 나라를 공동으로 운영하자고 맹세를 했는데, 이제 말 못하는 저세상 사람이 되었으니, 어쩌랴,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장례를 치르고 나면 미련없이 떠나리라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여불위가 처리해야 할 급선무는 다음 임금을 누구를 세우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결정권자는 夏태후(장양왕의 생모)였습니다. (장양왕은 큰어머니 화양부인과 자신의 생모 夏姬를 나란히 태후로 받들었음)
태후 화양부인은 식물인간이 된지 오래되어 의식이 없으므로 夏태후에게 의중을 여쭈었습니다.
夏태후는 장양왕의 여러 아들들을 꼽아보며 얼른 결정을 못하고 있는데, 왕비 조희가 "正妃의 자식인 政이 있잖아요. 무얼 따질 일이 있습니까."라는 발언으로 좌중을 압도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여불위에게 눈치를 주었습니다.
하태후는 "승상도 그렇게 생각하시오?"라고 물으니, 여불이는 "예, 왕비마마의 말씀에 동의합니다."라고 하니,
하태후는 못이기는척 "다음 왕위는 政으로 결정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사실 하태후가 왕실의 어른이라 고는 하지만, 현존하는 왕비의 발언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불위는 즉시 밖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는 문무백관들에게 다음 임금은 政으로 결정되었다는 조서를 발표하였습니다.
政의 나이 13세였습니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왕비인 조희가 태후가 되어 섭정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왕위 계승 문제를 번갯불에 콩구워 먹듯이 신속하게 처리 한 것은 이 문제는 오래 끌면 내분이 일어날 소지가 크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신이 없을 때 잡음이 없도록 끝내버린 것입니다.
이는 여불위의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이 돋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장례는 政이 상주가 되어 잘 치루었습니다.
여불위는 파트너가 없어졌으니, 더 있을 필요가 없다며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짐을 꾸리고 있는데, 채택(蔡澤), 몽오(蒙鰲), 왕의(王儀) 세 원로(元老)들이 찾아와 "대감의 심정은 알겠으나, 계속 남아서 승상 자리를 지켜주십시오. 지금 어린 임금을 두고 떠난다면 나라와 조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늙어서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꼭 떠나신다 해도 군사를 동원해서라도 막을 것입니다."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불위는 그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며 고향인 韓나라 양척으로 떠났습니다.
함양을 떠난지 이틀만에 해가 질 무렵 역양을 지나는데 임금의 스승인 모초(茅焦)가 백여기의 기마대를 이끌고 길을 막아서며 " 승상! 어명(御命)이오. 돌아가십시다."라며 돌아가자고 재촉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불위는 할 수 없이 함양궁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32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