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30)
*가련과의 은밀한 만남
김삿갓은 안변사걸들이 넋을 잃은 것을 보자 심히 통쾌하였다.
뻘줌해진 연회 분위기는 가련이 때문에 바뀌었다.
"참 훈장님은 시상이 무궁무진 하신가 봐요. 마르지 않는 샘처럼 말이예요. 말이야 바로 말이지 요즘 세상에는 돈 있으면 양반 행세를 하잖아요? 족보도 산다는데요. 뭘."
가련이가 이렇게 말하자 문첨지가 호통을 쳤다.
"예끼 이년, 방자하게 어디서 입방아를 찧느냐! 아직 젖비린내 나는 것이 뭘 안다고."
"호호호, 첨지님은 항상 쇤네를 미워하시더라. 언제 살풀이를 해야겠어요."
가련이가 이렇게 받아넘기자 문첨지 입이 벌어진다.
"살풀이 거 좋다. 네 집 안방에서 하자꾸나. 오늘밤에 가랴 ?"
"아이, 서 진사 어른 허락부터 받으셔요."
"허허, 그런가?"
웃음이 한바탕 일자 좌중의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훈장님, 시 한수만 읊어 주셔요. 쇤네의 청을 들어 주시겠죠?"
"애야 ,너도 시를 아느냐?"
조 석사가 핀잔을 준다.
"석사님도 모르시는 말씀을 하시네요. 쇤네는 시를 지을 줄은 모르오나 읽어 새길 줄은 안답니다."
가련이가 곱게 눈을 흘기며 조 석사를 반박했다.
이런 가련의 청순한 교태가 청춘의 김삿갓의 가슴에 무엇인가 찌르르 전해진다.
"옳치, 너는 당송 팔대가도 잘 알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네가 시제를 한번 정해 보거라."
사또가 가련을 그윽히 바라보며 이렇게 말을 했다.
"가인 (佳人) 이라 하면 어떠실런지요."
"아름다운 사람이라, 그것 좋네!"
김삿갓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붓을 들었다.
嬌態 교태
抱向東窓 弄未休 포향동창 농미휴
그대 살풋이 안고 하룻밤을 지새울제
半含嬌態半含羞 반함교태 반함수
그 모습이 교태 반 수줍음 반이구나
低聲暗問 相思否 저성암문 상사부
내가 좋으냐고 나직이 속삭이니
手整金釵 笑點頭 수정금채 소점두
금비녀 매만지며 끄덕 웃고 있네.
"하하하하, 역시 훈장님다운 솜씨요. 마치 서 진사와 가련이의 모습을 그린것 같소이다."
사또는 탄복하였다. 사또의 말을 들은 서 진사는 처음으로 입을 헤벌죽 벌리고 웃었다.
가련은 새카만 눈을 들어 김삿갓을 은근히 쏘아 보았다. 그리고 눈길이 마주친 김삿갓에게 싱긋 웃음을 보여 주었다. 추파였다. 김삿갓은 가슴이 떨려왔다.
안변 사걸들도 이 글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제각기 몇 번씩 낭송하며 기생의 허리를 껴안으며 술잔을 들었다.
연회는 밤이 늦어서야 끝이 났다. 숙소로 돌아온 김삿갓은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옷을 입은채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흘렀다.
동짓달도 중순으로 접어들자 날씨가 매섭게 차가워졌고 눈까지 많이내렸다. 겨울이 한층 깊어진 것이다.
김삿갓은 선규를 가르치며 한겨울을 사또 곁에서 보내리라 마음먹고 있는터라 되도록 하루하루를 편한 마음으로 지내려고 하였다. 어차피 방랑에 나선 몸, 한 두해로 끝날 방랑이 아니기에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눈이 소담스럽게 내린 어느날, 관노 한 놈이 작은 쪽지를 들고 김삿갓을 찾아왔다.
"훈장님, 소인입니다."
관노는 김삿갓 방문 앞에서 그를 이렇게 찾았다.
김삿갓은 방문을 열었다.
"자네가, 무슨일인가?"
"예, 어느 총각녀석이 훈장님 드리라고 이 쪽지를 주고 갔습니다."
"쪽지를?"
"예, 여기 있습니다."
김삿갓은 쪽지를 받았다.
관노가 물러가자 그는 방문을 닫고 쪽지를 펴 보았다.
쪽지에는 언문으로 또박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김선생님 전상서.
소녀가 이렇게 외람되이 글월을 올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오늘은 천지가 온통 은백색으로 변하였습니다. 이런 때 선생님의 시를 경청할 수 있다면 무상의 즐거움을 얻겠나이다.
원컨데 금일 저녁 소녀의 누옥으로 납시어 주옵소서.
지필묵을 준비하고 오시길 기다리겠나이다.
가련올림.
내용은 평범한 초청장이었으나, 언문이지만 가련의 글씨가 달필인 것에 김삿갓은 저윽이 놀랐다.
쪽지를 읽은 김삿갓은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버들가지인양 교태가 자르르 흐르면서도 가을 하늘아래 피어있는 한떨기 국화처럼 청초하기 그지없는 가련의 자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야지. 암 꼭 가고말고."
김삿갓은 혼잣말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저녁 공부가 끝나자 김삿갓은 바쁜 걸음으로 관아를 빠져나왔다.
협문지기가 김삿갓을 보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며 물었다.
"훈장님 어디를 가시는뎁쇼?"
"내 오늘 밤 늦을 것이니 혹시라도 사또님이 찾아, 묻거든 뽕을 따러 갔다고 말씀드리게."
"뽕을요? 겨울에도 뽕이 있습니까?"
"암, 겨울에도 따는 뽕이 있다네."
김삿갓은 이렇게 관아를 나선 후 재빠른 걸음으로 가련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가는 길이었지만 통인에게 자세히 물어 두었던 터라 가련의 집을 찾는데는 어렵지 않았다.
"이리 오너라."
그는 대문 앞에서 낭랑한 소리로 아랫 것을 불렀다.
이내 대문이 열리더니 계집아이가 나타났다.
"뉘시온지요?"
"삿갓이 왔다고 가련아씨께 알려라."
"그러셔요? 훈장님이시군요. 어서 안으로 드셔요. 우리 아씨께서 기다리고 계셔요."
계집애의 호들갑이 보통이 아니었다. 김삿갓은 계집애가 안내 하는대로 따라 들어갔다.
"어서 오셔요."
분홍빛 호박단 치마 저고리를 입은 가련이가 섬돌 아래까지 내려와서 김삿갓을 맞았다.
"그간 잘 있었나?"
"네, 쇤네는 무고하였사옵니다."
가련은 김삿갓의 손을 잡고 방안으로 인도했다.
"오늘은 웬일인가? 나 같은 훈장을 다 초청하고."
가련은 눈을 곱게 흘기며 말을 했다.
"전 혹시 안 오시면 어떡하나 하고 가슴을 졸이고 있었어요."
"허허, 내가 무슨 뚝심으로 안 올 수가 있겠나? 오히려 감지덕지하며 달려왔네, 헌데 .. 오늘 이후 내 두 다리가 성하게 될지 그게 염려스럽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가련이는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김삿갓을 요염하게 바라보았다.
"자네 눈치가 그렇게도 없었나? 서 진사가 이 꼴을 본다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게 아닌가?"
"아이, 훈장님도 서진사와 제가 어쨌다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하긴, 절 좋아는 해요. 별의별 소리로 나를 어찌 해 보시려는 것 같은데, 기생의 몸으로 부르면 아니 갈 수도 없는 일이라서 상대는 하고 있습니다만, 별 깊은 관계는 아닌 걸요."
"알았네. 내 별 뜻이 있어서 한 말이 아닐세."
술상이 들어왔다. 김삿갓은 이전과 달리 가련과 단둘이서 술상을 놓고 앉아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훈장님. 처음 뵈올 때 부터 아무래도 보통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숨기고 계신 일이 있으신 것 같아요."
술이 몇잔 기울여지자 가련이 말문을 열었다.
"그건 어째서인가?"
김삿갓은 취기가 오른 눈으로 가련을 건너다 보며 물었다.
"글쎄요. 삿갓을 쓰고 계셔서 그런가 ..호호호, 아녜요, 훈장님의 시를 읽고나서 그런생각이 들었어요."
"거, 훈장님 훈장님 하지 말게. 자네가 자꾸 훈장을 찾으니까 절로 시가 떠오르네."
"어머 .. 그렇지 않아도 한 수 청하려고 했는데 들려 주세요."
김삿갓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련이가 내미는 붓을 들었다.
訓長 훈장
世上誰云訓長好 세상수운훈장호
세상에 훈장을 누가 좋다고 했던가
無烟心火自然生 무연심화자연생
연기도 없는 불길이 절로 타오르네
曰天曰地靑春去 왈천왈지청춘거
하늘 천 땅 지 하는 사이 청춘이 가고
云賦云詩白變成 운부운시백변성
시와 문장을 논하다가 백발이 되었네.
雖誠難聞稱道語 수성난문칭도어
정성껏 가르쳐도 칭찬 듣기 어렵고
暫離易得是非聲 잠이이득시비성
자리를 잠시만 비워도 비난받기 일쑤다
掌中寶玉千金子 장중보옥천금자
천금같은 귀한 자식 훈장에게 맡겨 놓고
請囑撻刑是眞情 청촉달형시진정
잘못하면 매질하라 진정으로 부탁하네.
"호 -"
시를 읽고 난 가련이는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