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운탁월(烘雲托月)
석야 신웅순 (중부대 명예교수)
홍운탁월(烘雲托月)은 구름으로 달을 그려내는 전통적인 동양화 기법이다. 달의 형태만 남겨두고 나머지 부분을 채색하는 방법이다. 달을 그리지 않고 달을 그려내면 달은 저절로 떠오른다.
말하자면 홍운(烘雲)은 채색이요, 탁월(托月)은 여백이다. 홍운이 있어 탁월이 있고 탁월이 있어 홍운이 있다. 구름을 어둡게 칠할수록 달은 더욱 빛난다. 여백이 명화를 만드는 것이다.
시조도 다를 게 없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말아야한다. 다른 말로 대신해야 하고 싶은 말이 저절로 드러난다. 조연 때문에 주연이 빛나는 것이지 주연 때문에 조연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홍운탁월, 이는 시에서 말하는 객관적 상관물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붓자국도 희미한 밀서 같은 길을 가다
눈부신 기척 있어 되돌아본 그 자리에
한지 빛 하늘을 이고 번져오는 묵매향기
- 유재영의 「어느날의 진경산수 1」
밀서를 가슴에 품고 가는 어느 독립 운동가. 누구의 기척이었을까. 일경의 감시의 눈 초리가 심상치가 않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한 발 재겨 디딜 곳 조차 없다. 하늘을 우러르니 한지 빛 하늘을 이고 훅, 번져오는 아득한 묵매 향기를 아, 우리는 어 쩌는가.
-신웅순,「어느날의 진경산수 1」,주간한국문학신문
시인은 진경산수화를 보고 있지만 사실은 독립운동가의 길을 보고 있다. 전자는 전경이요 후자는 배경이다. ‘붓자국, 밀서, 기척, 한지빛, 묵매향기’는 보이는 부분, 홍운이요, ‘독립운동가의 길’은 보이지 않는 부분, 탁월이다. 시인은 ‘탁월’ 이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거리가 생긴다. 전경과 배경과의 거리이다. 시인과 독자는 거리 어디에서 만나게 된다. 만나는 이 곳이 바로 감동 지점이다. 서로가 이 지점을 찾지 못한다면 시조는 어떤 의미도 없다. 이쯤에서 시인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다시 읽어보아야 한다. 객관적으로 보아야하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 시조가 길어지고 있다. 17,8세기에 와 사설시조가 성행해 대중화 되었고 1920년대에는 연시조가 생겨나 시조의 주인이 되었다. 2000년대에 와서는 시조가 점점 길어져 자유시화(?)되어 가고 있다.
시조가 본령인 단시조는 멀어져가고, 음율은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다. 음율이 보이지 않는 정형시에까지 간다면 시조는 진정 무엇이 될까. 시조는 2, 3, 4행시 같은 그냥 정형시가 아닌, 종장 첫소절에 파격이 있는, 격조 있는 우리 고유 음율의 정형시이다. 정체성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시조는 여백이다. 여백엔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거기에는 우리만의 고유한 율격이 있다. 시조는 직접화법이 아닌 간접화법이다. 에둘러 칠해야 달이 돋아나는 홍운탁월, 시조의 진정한 격조는 이런 것이 아닐까.
자신을 직접 드러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때 사람은 더욱 빛이 나는 법이다.
신웅순 1985년 시조문학 등단, 1995년 평론등단. 시조집『그리움은 먼 길을 돌아』외 평론집, 수필집, 동화집 등 16권, 학술서 『한국시조창작원리론』, 교양서 『문화유산에 깃든 시조』 등 21권. 시조관련논문 50여편, 시조예술 1-9호 발행. 2013년 고등인정교과서 국어 하(천재교육)에 논문「시조 분류고」일부 등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