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몇해 전 조선일보와 국립도서관의 행사인 '길 위의 인문학'에 다녀온 기행문이다. 매월 나라 안의 중요한 역사의 현장으로 떠나서 전문가의 해설을 통해 인문학의 지평을 여는 행사에 참여한 소감문을 올린 것이다. 1박 2일 동안 전남 화순의 운주사를 돌아본 소감인데 인터넷 조선일보에 올린 것으로 조회순이 제일 많은 사람은 다음 번 여행에 초청받는다기에 안간힘을 쓴 글이다. 아마 최고의 조회수를 그것도 압도적으로 많은 조회수를 올렸던 기억이 난다. 여기 올리면서 조금 낯간지러운 느낌을 버릴 수 없다. 흉보지 마시길. 벗님들 욕을 해도 속으로 해주시고.....
***************************************** Homo est Viator 인간이란 걸어가고 있는 존재이다.
'길위의 인문학'이란 표제를 보았을 때 문득 이 말이 떠오른 건 왠 일일까? 흔히 인생을 길에 비유한다.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어디론가 걸어가는 존재라는 말이겠지. 길이란 무엇일까? 전 생애에 걸쳐 쉼 없이 어디론가 움직여 가야 한다는 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게 아닐까? 길 위에 서면 우린 늘 갈증을 느낄테고 그래서 무언가 모자란 듯해서 쉴 사이 없이 찾아나서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내 마음을 잡아당긴 거 겠지. 물론 '길 위의 인문학'이란 이런 의미로 이름 지은 건 아니지만.
솔직히 화순이란 곳은 물론, 운주사라는 절 이름조차 들어본 적도 없는 무식찬란한 제가 길을 나서자니 여간 송구스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날씨는 화창했고 늦가을에 접어드는 산천은 아름다웠다. 화순행을 위해서 상경할 때는 몹시도 날씨가 변덕스럽더니만. 다음날, 운주사로 가는 여행은 평화로웠다. 더우기 기차여행이라 운치는 더 했고. 운주사라, 별로 너르지도 않고 아담한 사이즈의 계곡에 한 때는 천불,천탑(千佛 千塔)이 계셨다는데 이제는 부처님도 세상을 뜨셨는가 듬성듬성 서 계시거나 앉아서 우리를 내려다 보고 계셨다. 운주사로 들어가는 입새였지. 산비탈에 기대고 계신 불상이 이채로웠다. 벌쭘 서 있는 분도 있었지만 앉아 있노라 피곤했던가 허리를 비탈에 기댄 불상이 무심한 표정으로 우리를 건네다 보고 계셨다. 불상이라기는 뭣하고 돌무더기 모습이 흡사 사람 닮았다고 우연찮게 부처님이라고 불렀던가? 여기가 절이라서 그랬겠지 하고 어기짱을 놓아본 건 내 심술이겠지.
석공이 손을 대기는 댄건가? 장인의 손이 거쳐간 흔적이 남아 있기는 한데 묘한 느낌이었다. 으례 부처님이라면 사바세상을 다 껴안으려는 듯 은은하고도 자비가 가득한 모습이 아닌가. 그래서 부처님을 바라보는 중생의 가슴에 벅찬 감동을 주는데 비해 운주사의 불상은 남달랐다. 뭐랄까. 다 비운 듯 텅빈 모습, 비우고 비우느라 남은 거 하나 없는 무상의 세계랄까.
운주사 부처님이 그러셨다. '그래 잘 왔다. 세상살기가 힘 들었나 보다. 엣다, 받거라' 하고 운주사 뒷산에서 따온 한 웅큼 밤이라도 주시려는 넉넉한 품은 아니었다. 그래도 외롭다거나 마음을 저미는 슬픔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올라갈 때는 일별하고 말았지만, 와불(臥佛)님도 뵙고 단풍에 곱게 물든 산허리에 계신 또 다른 석불님과 탑을 보면서 내려오다가 맨 처음 나를 마지했던 다섯 석불 앞에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 아내한테서 전화가 왔다. "모~해?" "음...운주사 석불님을 뵙고 있어" 아내는 부처님을 뵈올 때는 친견한다고 해야지 하고 유식을 떨었다.
그때서야 무심했던 석불님 중 두 손을 열십자로 가슴을 껴안고 비스듬히 서 계시는 분이 아내의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분에 비해 윤곽이 조금 또렷한 편이었지만 코는 문드러지고 둥그스레 반달 모양의 입에서 희미하지만 미소를 볼 수 있었다. 착시 현상일까? 옆에 계신 분도 그랬고 석불님들이 하나하나 표정이 살아 있는 모습으로 다가올 줄이야.
천 년의 세월이 흘렀잖은가. 무수히 스치고 지나간 바람이 부처님을 매만졌을 테고 비바람이 몹시 불던 밤에는 다섯 부처님들이 어깨를 웅크리고 어둡고 스산한 밤을 견디어 내느라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겠지. 다리쉼을 하는가 산비탈에 슬그머니 기대고 계신 부처님 얼굴에서 주변머리 없는 나하고 한세상 살아오면서 지치고 문드러진 가슴을 보듬고 있을 아내를 떠올리다니! 그리도 곱던 미스 김이, 세파에 찌들어가면서도 무던히 내곁을 지키고 있는 내 아내가 부처가 되셨나보네.
누가 그랬다. 천국문을 들어갈 때면 베드로 사도가 물어본대요. 둘 다 평생을 함께 살았다면 묻지도 않고 천국문을 열어주신다지요. 더러는 사랑도 했겠지만, 평생을 두고 고생만 시킨 내 서방, 내 아내하고 곱게 늙어왔다면 한세상 살아온 게 바로 공덕을 쌓은 거지 뭐.
운주사에 가면 다들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마치 부모형제를 찾아뵌 것 같다.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오른쪽 석벽에 비스듬히 기대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석불들을 보면 마치 오랫동안 집 떠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다정한 식구들 같다. “왜 이제 오느냐, 그동안 어디 아프지는 않았느냐” 하고 저마다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사가지고 간 만두나 찐빵이라도 내어놓으면 당장이라도 둘러앉아 다들 맛있게 웃으면서 먹을 듯하다.
그런데 그들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하나같이 못생겨서 오히려 더 반가운 생각이 든다. 그들은 대부분 코가 길고 이마 쪽으로 눈이 올라붙은 비대칭 얼굴인 데다 거의 다 뭉개졌다. 오랜 세월 만신창이가 된 탓인지 이목구비를 제대로 갖춘 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평소 내가 참 못생겼다고 생각하는데 이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싹 달아난다. 그래서 그들을 볼 때마다 부처님을 뵙는다기보다 골목에서 마주친 이웃을 만난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정이 간다. 어떤 부처님은 너무 위압적이어서 공연히 주눅들 때가 있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다. 경주 석굴암 대불이 당대의 영웅이나 권력자를 위한 석불이라면 이들은 민초들을 위한 석불이다. 나를 위로해주는 존재는 그런 영웅적 존재가 아니라 운주사 석불은 평범한 존재다. (시인 정호승님의 강의 중에서)
그들은 항상 겸손의 자세를 가르쳐준다. 가슴께로 다소곳이 올려놓은 그들의 손은 겸손하게 기도하는 손이다. 부처는 인간으로부터 기도의 대상이 되는 존재인데 그들은 오히려 인간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인간사회의 사랑과 평화를 염원하는, 이 얼마나 이타적 삶의 겸손한 자세인가.
운주사 석불 중에 눈을 뜨고 있는 이를 찾긴 힘들다. 다들 눈을 감고 있다. 눈을 감고 양손을 무릎 아래로 손바닥이 보이게 내려놓고 있는 자세는 무엇 하나 소유하지 않고자 하는,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하고자 하는 염원이 담긴 자세다. 눈을 감으면 비로소 남이 보인다. 내가 보인다 하더라도 남을 위한 존재인 내가 보인다. 그동안 나는 나를 위해 항상 눈을 뜨고 다녔다. 눈에 보이는 모든 존재는 다 나를 위한 존재였다. 이 얼마나 오만하고 이기적인 삶인가. 지난여름엔 매미가 너무 시끄럽게 운다고도 싫어하지 않았는가. 매미는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사는 것인데 나는 매미만큼이라도 열심히 산 적이 있었던가.
보너스로 정호승 시인의 "풍경 달다" 를 적어드리지요. 풍경 달다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돌아오는 길에/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풍경 소리 들리면/보고 싶은 내 마음이/찾아간 줄 알아라
시인이 운주사를 둘러보고온 소감을 시로 쓴 거랍니다. 이 여행에 정호승 시인이 함께 하여 좋은 말씀을 들려 주었답니다.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시인과 어슴프레 안면이 있었습니다. 고등학생일 때 문청으로 백일장에서 자주 만난 적이 있었거든요. 같은 도내에서 서로 잘난 채 하던 도시(경주와 안동)의 학생이어서 조금은 라이벌 의식도 있었지요. 혹시나, 니 잘 났다할까봐 변명하지요. 시인과 난 숨 쉬는 곳이 달랐지요. 하늘과 땅만치나 격이 달라도 아주 많이 다른 세계에서 살았다고 할까요. 감히 시인과 아는 채를 하다니....
고맙게도 '기다리는 마음을 새긴 화순' 이렇게 아름다운 여행 길을 나서게 될 줄이야.
어느날엔가 우리 또 길위에서 만날테지요.
첨언하면, 운주사 석불님이 아주 독특해서 '재즈붓다'라고 한국학 연구소 교수님이 강의해주실 정도로 독특했습니다. 사실 운주사는 수수깨끼처럼 절을 세운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세웠는지 모든 게 비밀투성이랍니다. 한국학 교수님은 강의에서 운주사의 부처님을 재즈붓다라고 하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