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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의 전사’로 불리던 시인!
흔히 김남주를 이렇게 부르고, 또 그가 남긴 시들을 보면서 그러한 평가를 수긍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이후 남과 북으로 갈힌 한반도에서‘남조선’이라는 단어는 매우 불온하게 여겨지는 단어였다. 더욱이 권력의 의도에 따라 가혹한 국가 폭력이 자행되던 독재정권 시절 이른바 ‘남민전’으로 약칭되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 조직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했고, 그로 인해 10년 동안의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그의 일생을 재구하여 평전 형식으로 정리한 저자는 ‘김남주가 비밀조직에 가담한 것은 그의 일생에서 단 한 번 돌출된 최대의 모험’이라고 규정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님민전의 전사’라는 호칭을 원했으며, 오히려 ‘시인이라는 표현은 혁명가에 대한 모독이자 통한의 생에 대한 누명’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동안 김남주의 시는 냉혹한 현실에 맞선 저항으로서 평가를 받았으나, 저자는 '삶의 위대한 여정을 이끈 정신적 유산으로 재평가되고 연구되어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삶과 문학 세계를 재구하는 이 작업 역시 이러한 일환으로 시도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의 삶을 누구보다 가깝게 지켜봤지만, 저자가 이 책을 완결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너무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아무 자료를 참고하지 않고도 쓸 수 있다고 생각헸‘지만, ’막상 쓰려고 보니 내가 제대로 아는 게 한 가지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상 기록을 남긴다는 것이 다 그렇듯이, 특히 누군가의 삶을 재구성하는 평전은 단순히 자료의 나열이나 글쓴이의 주관적인 느낌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10여 년 전 대학원생들과 해남 일대로 문학 답사를 갔다가, 김남주의 생가에 들렀던 경험이 있다. 옛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농가에는 김남주가 생전에 사용했을 법한 가구와 책들, 그리고 마당에 ‘노래’라는 작품이 음각된 커다란 시비가 놓여있었다. 대학 시절 사람들과 더불어 목놓아 부르던 노래의 가사이기도 했기에, 당시에도 시비에 적인 작품을 보면서 까마득한 옛 기억을 떠올랴보기도 했다. 그렇게 노래 가사로 만난 김남주의 시는 당시에 당국에 의해 ‘볼온하다’는 판정으로 출판금지가 되어 쉽게 구하지 못했고, 누군가 손으로 적은 것이나 혹은 여러 번에 걸쳐 복사해서 희미해진 활자로만 볼 수 있었다. 그 이후 간혹 시집에 수록된 작품으로만 대하던 김남주를 이 책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평전’이라는 글쓰기 형식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수많은 자료들을 모으고 섭렵해서 한 사람의 일생을 재구하는 것이 평전의 형식이다. 그러나 자료를 통해 일생을 재구하여 서술하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하지만, 대상이 되는 인물의 생각과 고민까지 담아낼 수 있다면 더 좋은 평전으로 완성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자신이 알던 김남주에서 나아가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김남주의 생애는 물론, 그때그때 마다의 생각들을 읽어내려고 노력했다고 여겨진다. 너무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아무 자료를 참고하지 않고도’ 평전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쓰려고 보니 내가 아는 게 한 가지도 없었다’는 저자의 고백이 잔솔하게 다가왔던 이유라고 하겠다.
김남주를 알기 위해서는 가계의 내력을 아는 것이 중요하기에, 저자는 섬에서 나와 해남의 문부자짐에서 ‘깔담살이’를 했던 부친의 이야기에서부터 평전의 서술을 시작하고 있다. 외가인 문부자의 집에서는 ‘시종 변치 않는’ 아버지의 태도를 보고 딸과 결혼을 시켰고, 결혼을 한 이후에도 머슴으로 들어갔던 ‘모습 그대로 평생을 일만 하며 살았다’고 한다. ‘머슴’이라는 출신으로 인해 외가에서 무시당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면서 살고자 평생을 일관되게 지켜냈던 김남주 사상의 원천을 바로 이 지점에서 읽어내고 있다.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나 광주일고에 진학했지만 자퇴했고, 대학에 들어갔다가 반유신 투쟁을 하다가 투옥되어 제적되었던 사실 역시 그의 기질을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특히 서슬이 시퍼렇던 독재정권에서 반유신 지하신문 <함성>을 발간하여 옥고를 겪어야 했으며, 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해 남민전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15년 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그 이전에 이미 창바에 ‘잿더미’ 등의 시를 기고하면서 시인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저자는 당시 옥중에서 김남주의 시집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으로 광주교도소에서 근무하던 교도관들의 도움을 꼽고 있다. 시국사범으로 당국의 관리를 받던 김남주는 우유갑이나 낙엽 등에 날카로운 물건으로 자국을 남겨 쓴 시들을 교도관들을 통해 밖으로 전달되었고, 여러 매체에 수록되다가 마침내 1984년 첫 시집인 <진혼가>가 출간되었다.1988년 형집행 정지로 석방된 후 옥바라지를 하던 아내와 결혼식을 올리고 아들까지 낳았지만, 그가 원하던 세상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1994년 췌장암으로 끝내 숨을 거두고 벗들이 묻힌 광주 망월동에 안장되었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다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시 ‘종과 주인’ 전문)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김남주의 짤막한 이 시를 통해 ‘김남주를 기록할 용기’를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시의 내용이 너무 섬뜩하다는 주장에 김남주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으로부터 인격적인 수모를 당했을 때 그냥 참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김남주와 그의 작품들을 지켜봤던 저자는 ‘김남주의 진면목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은 그가 쓴 시’라고 여기면서, 생전에 그와 함께 지냈던 다양한 사람들의 진술과 각종 기록들을 주요 자료로 참고하고 그의 시를 전면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김남주 평전>을 완결지었다고 이해된다. ‘강렬함과 전투적인 이미지’로 평가되는 그의 시들은 그의 삶과 철학을 반영한 결과물이며, 현실에서는 “이웃들과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 일상의 경쟁에서 언제나 ‘자발적 무능’의 길을 선택했”던 김남주를 오롯이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여겨진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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