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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제도 | 내용 | |
세조 3년 1457년 | 5위 | 義興衛, 龍驤衛, 虎賁衛, 忠佐衛, 忠武衛 | |
임진왜란후 | 5군영 | 訓練都監(선조 27년 1594) | 삼수병(포수, 살수, 사수) (삼수미세 징수 : 1결당 2.2두) |
摠戎廳(인조 2년 1624) | 경기일대 방어 | ||
御營廳(인조 2년1624) | 남한산성 방어 | ||
守禦廳(인조 4년1626) | 북벌의 중심기구 | ||
禁衛營(숙종8년 1682) | 왕실 궁궐 수비 | ||
고종 18년 1881년 | 2영 | 武衛營, 壯禦營 | |
고종 19년 1882년 임오군란후 | 5군영 | 訓練都監. 摠戎廳. 御營廳.守禦廳.禁衛營 | |
고종 21년 1884년) | 親軍 5營 | 親軍 5營(左右前後別營) | |
고종 32년 을미개혁 | 2대 | 親衛隊, 鎭衛隊 |
① 정조 17년 1793년 장용영 : 정조의 친위부대
② 1907. 7.24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 군대해산과 차관정치, 정미의병
④ 대마도 정벌 : 고려 32대 창왕 1년 1389년 박위(朴葳), 조선 태조 5년 1396년 문하우정승 오도병마처치사(門下右政丞 五道兵馬處置使) 김사형(金士衡) 및 세종 원년 1419년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가 왜구의 근거진인 대마도(対馬/津島, つしま, 쓰시마, 己亥東訂)를 정벌하였다.
⑤ 양인개병주의 : 노비 등 천인을 제외한 양반 장정(16세~60세)이 국방의무를 지는 제도
28. ② 숙종 15년 1689년 소의(昭儀) 희빈 장씨 소생의 아들 윤(昀, 경종)의 세자책봉 문제로 일어난 기사환국(己巳換局, 기사사화)에 관한 내용이다.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 등 서인이 이를 지지한 남인에게 패배하고 정권이 西人에서 南人으로 바뀌었다. 이 여파로 계비 인현왕후 (仁顯王后) 민씨가 되었으나 폐위되었다가 5년후 1694년 갑술환국의 여파로 왕비(王妃)로 복위했다가 괴질이 발병해 신체가 썩어 들어가는 고통 아래 투병하다가 1701년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사망했다. 서오릉의 명릉(明陵)이며 시호는 효경숙성장순원화의열정목인현왕후(孝敬淑聖莊純元化懿烈貞穆仁顯王后)이다. 남인은 서인에 대한 처벌을 두고 다시 청남(강경파, 우의정 許穆, 尹鑴)와 탁남(온건파: 영의정 許積, 權大運)으로 나누어 진다.
① 명종 원년 545년 을사사화 : 왕실의 외척인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세자(인종, 장경왕후 윤시 소생)의 외숙인 윤임(尹任) 일파의 대윤과 경원대군(慶原大君,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尹元衡) 일파의 소윤 사이에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암투가 벌어 졌는데 1544년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이 득세했다.
③ 1623년 이괄(李适)의 난
④ 효종과 효종비의 사후 조대비의 상복문제로 2차례 예송(1659년 기해예송, 1674년 갑인예송)이 있었다.
⑤ 동서분당 : 선조 8년 1575년 동인 김효원과 서인 심의겸(명종비 인순왕후 동생)의 대립
29. ② 국학연구는 역사(안정복 동사강목과 열조통기, 한치윤 해동역사, 김정희 금석과안록, 이긍익 연려실기술, 이종휘 동사, 류득공 발해고), 지리(한백겸 동국지리지, 신경준 강계고, 정약용 아방강역고, 한진서 해동역사지리고, 이중환 택리지, 신경준의 도로고와 산수고, 정상기 동국지도, 김정호 청구도와 대동여지도), 국어(신경준 훈민정음운해, 류희 언문지, 황윤석 자모변, 권문해 대동운부군옥, 이의봉 고금석림, 정약용 아언각비) 백과사전(이수광 지봉유설, 이익 성호사설, 이덕무 청장관 전서, 서유구 임원경제지,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홍봉한 외 동국문헌비고)등이다.
ㄱ. 발해고 : 정조 8년 류득공
ㄴ. 팔도지리지 : 세종 14년 1432년 팔도지리지
ㄷ. 아방강역고 : 순조 11년 1811년 정약용
ㄹ. 동국통감 : 성종 16년 1485년
30. ④ 세시풍속에 관한 문제로서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삼월 삼짓날(음력 3월 3일)과 진달래 꽃으로 봐서 봄이다. 삼짓날은 상사(上巳), 원사(元巳), 중삼(重三), 상제(上除), 답청절(踏靑節이라고도 한다.
① 백중 음력 7월 15일 ② 칠석 음력 7월 7일 ③ 대보름 음력 1월 15일(上元) ⑤ 한가위(가배, 중추절) 음력 8월 15일
31. ⑤ 순조 11년 홍경래난에 대한 내용이다. 홍경래란은 순조 11년 1811년 서북인에 대한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고 홍경래, 우군칙, 이희저, 김사용, 홍총각 등 잔반과 광부, 영세농민, 중소상인 참여하여 거병하여 가산동 다복동에서 시작하여 순식간에 청천강 이북 9읍 점령했으나 정부군의 반격으로 정주성에서 패하여 4월만에 진압되었다.
① 청의 군대 개입 :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운동
② 선혜청과 일본공사관 공격 : 고종 19년 1882년 임오군란시 구식군대(무위영과 장어영) 군졸들과 왕십리, 이태원 빈민들은 선혜청,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집(민겸호 척살), 포도청(수감자 석방), 일본공사관(별기군 장교 堀本禮造 살해, 공사관 방화)을 습격하였다.
③ 몰락양반 출신 류계춘, 이계열 주도 : 1862년 진주농민봉기(진주민란)
④ 남접과 북접의 연합 전개 : 동학 2차 봉기후 1894. 10. 16 논산에서 남북접 연합전선(전봉준과 손병희)
32. ①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에 관한 내용이다. 속대전은 영조 22년 1746년 편찬한 법령으로 경국대전 이후의 교령(敎令)을 편찬(경국대전+대전속록, 대전후속록, 수교집록). 흥선 대원군(李昰應)의 개혁정책(1863~1873)
왕권강화정책 | 세도정치 타파 | 안동 김씨를 정권에서 축출하고 4색(老少南北) 고루 등용 |
통치기구 정비 | 1864년 비변사 축소・폐지(1510년 3포왜란때 설치되어 1555년 상설기구) 의정부(정치), 삼군부(군사) 기능회복 | |
법전정비 | 대전통편, 육전조례, 종부조례 | |
경복궁 재건 | 1865~1867, 결두전(결두전, 농민, 1結 100文) , 도성문 통행세(門稅), 원납전(願納錢) 강제 징수, 당백전(當百錢) 악화 발행 | |
민생안정정책 | 삼정개혁 | 전정 : 양전사업 실시하여(은결 색출) 누락된 토지 발굴하고, 지방관과 토호의 토지 겸병 금지 군정 :호포제(戶布制) 실시. 상민에만 부과하던 군포를 호포라 하고 상민・양반 모두 부과 환곡 : 환곡을 사창(社倉)으로 개혁 |
서원 철폐 및 정리 | 고종 2년 1865년 만동묘(萬東廟, 송시열의 유명으로 제자 권상하가 세운 것으로 만력동정때 군대를 파견한 명나라 임금 신종과 마지막 왕 의종을 모신 사당) 철폐 고종 8년 1871년 전국 서원 47외 모두 철폐 | |
대외정책 | 쇄국정책 | 통상수교 거부정책 고종 3년 1866년 독일상인 Oppert 두차례 통상요구. 고종 3년 1866년 미국 상선 General Sherman 호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이르러 통상요구하다 평안 감사 박규수와 군민들에 의해 화공에 소실 고종 3년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 Ridel 신부, 해군제독 Roze 군함 7척. 강화읍 점령하고 군기・서적 약탈. 문수산성(文殊山城, 韓聖根)과 정족산성(鼎足山城.梁憲洙)에서 패퇴 고종 5년 1868년 독일상인 Oppert 충남 덕산에 있는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무덤 도굴사건 고종 8년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 북경주재 미국공사 Low와 아시아함대사령관 Rodgers Colorado호 등 군함 5척으로 초지진(이렴), 덕진진, 광성보(魚在淵・魚在淳 분사)점령, 갑곶(甲串)도 강화수비병 저항으로 패퇴 고종 8년 1871년 척화비 건립: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丙寅作 辛未立 |
문화정책 | 천주교탄압 | 고종 3년 1866년 병인박해. 남종삼, 프랑스 신부 9명 등 j |
33. ①
㈎ 박규수 ㈏ 최익현이다. ㈎ 박규수(朴珪壽, 1807~1877)는 박지원(朴趾源)의 손자로서 오경석, 유홍기(유대치) 등과 통상개화론자로서 조부의 사상을 이어받고 서양의 신문물에 대한 서적을 읽고 문호개방과 서양문화 수입을 주장하였다. 1862년 진주민란시 안핵사로 파견되어 삼정이정청의 설립을 건의하여 삼정개혁을 추진했고 고종 31년 1866년 미국상선 General Sherman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 이르러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평양감사 박규수와 평양군만들은 배에 화공을 가하여 소훼해 버렸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 체결시 역관 오경석이 우의정 박규수를 움직여 통상수교방침을 결정하게 하였다. ㈏ 최익현(1833~1906 )은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서원철폐는 조선의 아름다운 학문연구 기풍을 파괴하는 행위이다”라고 하여 대원군의 서원철페에 강력 반발했고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하야에도 기여했다. 최익현은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하여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주장하고 고종 13년 1876년 1.월 23일 5불가소(五不可疏, 持斧伏闕斥和議疏)를 제기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체결후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청토오적소(討五賊疏)와 재소를 올려서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위정척사운동은 집단적·무력적인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하였다. 1906년 윤4월 전라북도 태인에서 74세에 제자 임병찬(林秉瓚)(전낙안군수)과 함께 의병 궐기하여 일군에 체포되어 대마도에서 옥사하였다.
② 북학의 : 박제가 및 이덕무 둘다 다 북학의와 연기가 있다.
③ 대한광복회 : 1913년 채기중이 조직하여 후에 강화되어 실제로는 1915~1918년까지 존재한 채기종, 박상진, 김좌진 등이 조직했으며 공화주의를 표방하고 친일부호를 처단했으며 만주에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군자금 모집한 의병단체
④ 조선책략 유포 : 1880년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오면서 청국 참차관 황준헌으로부터 朝鮮策略(황준헌 저)과 易言(정관응 저)을 얻어 가지고 왔는데 조선책략은 러시아의 남침을 막으려면 “親中國, 結日本, 聯美邦”하여 자강을 꾀하여야 한다는 내용으로서 나중에 1881.2 李晩孫의 嶺南萬人疏 및 1881, 7 洪在鶴의 辛巳斥邪訴(萬言斥邪訴)의 빌미가 되었다.
⑤ 박규수는 통상개국론자이고 최익현은 위정척사론자이다.
34. ⑤ 1876년 2월 26일 체결된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은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계기로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하여 군함 3척, 운송선 4척, 약 800명의 육군을 거느리고 강화 갑곶에 상륙하여 협상을 강요하였고 역관 오경석이 박규수를 움직여 통상수교로 방침을 정하고 판중추부사 신헌(申櫶)과 부총관 윤자승(윤자승)을 파견하여 고종 13년 1876년 2월 26일에 강화도 연화당에서 12조의 조일수호조규(병자수호조약, 강화도조약)가 체결되었다. ⑴ 조선국은 자주국가이며 일본과의 평등지권을 보유한다. ⑵ 조선국 부산 초량진에는 일본 공관이 있어 오랫동안 양국 인민의 통상 구역이 되어 있다. 또한, 조선국 정부는 2개 항구를 열어 일본국 인민의 왕래 통상함을 들어 주어야 한다.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의 연해 중 통상에 편리한 항구 2개처를 택하여 20개월 이내에 개항한다.(인천, 원산)가 주요 내용이다. 1876년 부산, 1879년 원산, 1880년 인천 개항
① 갑신정변의 결과 체결된 조약 : 1884년 한일간 한성조약과 1985년 청일간 천진조약과
② 민영환 자살 :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체결후 유생과 전직 관리들은 상소투쟁을 벌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 전(前)의정(특진관) 조병세(趙秉世), 전(前)참판 이맹재(李孟宰), 법부주사 송병찬(宋秉瓚), 전 참정(參政) 홍만식(洪萬植), 참찬(參贊) 이상상(李相尙), 주영공사 이한응(李漢應),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哲), 병정(兵丁) 전봉학(全奉學)·윤두병(尹斗炳)·전(前)참판 송병선(宋秉璿)·이건석(李建奭) 등의 중신과 지사들은 죽음으로써 조국의 수호를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청국인 반종례(潘宗禮)와 일본인 니시자카(西坂坡豐)도 투신자결로 조약 반대의사를 천명하였다.
③ 천주교 포교 허용 조항은 없다.
④ 외국에 대한 최혜국대우조항 : 병자수호조약에는 없고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등에 포함되어 있다.
35. ④ ㈎ 1776년 김기수를 단장으로 하는 일본에 파견된 1차 수신사고 ㈏ 1881년 김윤식을 단장으로 하여 청에 파견된 영선사 내용이다. ㈎ 수신사는 일동기유(日東紀遊)를 통해 일본 신문물을 소개했고 ㈏ 영선사는 천진의 기기국을 방문하여 재원부족과 임오군란으로 철수했으나 기기국을 세우는 성과를 거두었다.
① 에도막부(江戶幕府, 1603~1867) : 그 당시 존재하지 않았고 그때 통신사가 12번 갔다.
② 암행어사(暗行御史) : 조선 시대에 몰래 지방에 파견되어 지방관의 감찰과 백성의 사정을 조사하는 일을 비밀리에 수행했던 국왕 직속의 임시 관리로 부사의 일종으로 수의(繡衣), 직지(直指)라고도 한다.
③ 보빙사(報聘使) :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액의 이후 친선사절단
⑤ 대한제국 : 1897년
36. ③ 우정국 낙성식은 1884년이었는데 갑신정변으로 무산되었으나 고종 32년 1895년 우체사를 두고 우편사무가 개시되었다. 원산학사(元山學舍)는 고종 20년 1883년 원산에 덕원부사 정현석이 원산상공회의소 회원들과 지방민의 요청으로 설립한 근대적 사립학교의 효시(嚆矢)이다.
① 만민공동회 :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1898, 3. 관민공동회는 1898. 10
② 경인선 개통 : 1899년 경인선, 1905년 경부선, 1906년 경의선
④ 한성전기회사 : 왕실과 미국의 합자회사인 한성전기회사는 광무 2년 1898년 설립
⑤ 원각사(圓覺社)의 은세계 공연 : 1902년 협률사 설립→1908년 원각사 개명. 1908년 11월 15일 은세계 공연 시작(보름간)
37. ⑤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내용이다. 일본은 근대화 명분으로 차관을 도입하라고 하여 1907년 차관 1300만원이었는데 재정수입으로는 갚을 수 없었다. 국채보상운동은 광무 11년 1907년 대구 광문사에서 徐相敦・金光濟이 발기한 국채보상기성회에서 비롯되어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대되고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도 호응하고 담배끊고 절약하고 비녀와 가락지를 팔아 호응한 결과 3개월만에 1만원이 모였다. 대한매일신보(양기탁), 제국신문, 황성신문, 만세보 등 언론기관 의연금 모금으로 확대되자 위기 의식을 느낀 일본은 양기탁을 횡령 혐의로 구속(나중에 무조 방면) 방해공작을 하고 주도층의 분열로 실패로 끝났다.
① 근우회 : 1927년 유영준, 김활란 등 여성들이 조직한 신간회 방계 단체로 신간회 활동 동조
② 평양에서 시작되어 전국 확산 : 1920년 조만식이 조직한 평양 물산장려회, 1923년 서울 조선물산장려회가 주도한 자급자족, 국산품 애용, 소비 정략, 금주 금연운동. “조선이 만든 것을 먹고 쓰자” 구호
③ 조선 사람 조선 것 : 1920이후의 물산장려운동
④ 러시아 원산 및 절영도(絶影島) 조차(租借) 요구 거절 : 1898년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와 청의 간섭도 한몫 했다.
38. ⑤ 1894년 7월 군국기무처에 관한 내용이다. 조선은 재정 개혁을 위한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일본은 경복궁에 납입하여 김홍집과 대원군을 내세워 신정권을 수립했다. 신정부는 김홍집을 총재로 하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여 개혁안을 의결했다. 군국기무처는 고종이나 대원군이 간섭할 수 없는 초정부적 기관으로 약 5개월동안 208건의 현안을 의결했다. 주요 내용은 개국기원 사용, 과거제 폐지, 재정의 일원화, 조세 금납제 도량형 통일, 공사노비법 혁파, 조혼 금지 과부 개가허용 등이다.
① 건양(建陽) 연호 제정 : 1895년 을미개혁대. 1896년 건양 원년
② 신식군대 별기군 창설 : 1881년 5영을 2영(武衛營과 壯禦營)으로 개편하고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 敎鍊兵隊) 창설하고 양반 자제 100명 선발하여 士官生徒라고 하여 신식무예 교육
③ 양전사업 지계 발급(1898~1904) : 양전지계사업(量田地契事業)은 대한제국 정부가 1898년부터 1904년까지 실시한 사업으로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정하고 조세 수취 대상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양전이 끝난 지역에 대하여 토지소유권 증서인 지계를 발행했다. 지계(地契)는 2부를 작성하여 하나는 본인에게 발급하고 하나는 지방 관청에서 보관했다. 토지가 매매되면 매수인에게 새로이 발급해주었다. 지정된 지역 외의 토지를 불법으로 소유한 외국인에게는 지계를 발행하여 주지 않음을 원칙으로 했다. 지계 발행은 우리나라에서의 근대적 토지 소유 확립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나 러·일 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어 전국적으로 실시되지는 못했다.
④ 지방행정구역 8도에서 23도 개편 : 2차 갑오개혁때
39. ④ 조선사편수회, 청구학회 등이 주도하는 식민사관은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에 대한 식민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왜곡된 한국사관으로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패배적 역사의식을 주입하는 식민사관을 강요하였다. 주요 내용은 지리적 결정론(타율성론. 반도적 숙명론), 정체성론, 당파적 민족성, 일선동조론 등이다. 식민사학,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민족사학, 사회경제학이다. 민족사학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하여 민족사학을 수립하고 만족문화를 수호하고자 했다. 우리 여사의 주체적 발전과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여 독립운동을 고취하고자 했다. 박은식, 신채호, 문일평, 정인보 등. 사회경제사학은 유물사관에 토대하여 세계사의 보편적 법칙에 입각한 한국사의 발전을 강조하고 식민사관의 정체성을 비판하였다. 선구는 안확(安廓)의 조선문명사(1923), 백남운(白南雲) 조선사회경제사(1933), 조선봉건사회경제사(1937). 해방후 연합성 신민주주의 제창. 그 외 김광진, 김석형, 박시형, 이청원, 전석담 등
ㄱ. 이종휘 동사 : 실학. 고구려에 대한 큰 비중
ㄴ. 신채호 조선상고사 : 낭가사강 강조
ㄷ. 조선사편수회, 조선사 편찬 : 식민사관
ㄹ. 백남운 조선사회경제사 : 사회경제사항
1. 민족사학
가. 등장배경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하여 민족사학을 수립하고 민족문화를 수호하고자 했다. 우리 여사의 주체적 발전과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여 독립운동을 고취하고자 했다.
나. 내용
박은식 | 조선의 혼(魂) 강조. 국혼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역사 주목. 국난극복사를 강조하고 조선멸망 원인파악. 한국통사(韓國痛史, 1915, 고종 즉위 1863~1911년 105인 사건까지 일제의 침략과정 폭로), 한국독립운동지혈사(獨立運動之血史, 1920, 독립을 위한 우리 민족의ㅡ 패맺힌 투쟁과정 서술) |
신채호 | 낭가사상(娘家思想) 강조. 문동학교 설립.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 주필. 민족항쟁사를 강조하고 한국고대사를 체계화. 조선상고사(1948), 조선사연구초(1929), 조선사. 조선상고문화사, 독사신론(1908), |
문일평 | 조신의 심(心) 강조. 조선사운동 전개. 대미관계50년사(1934), 한국의 문화 |
정인보 | 조선의 얼 강조. 조선사연구(오천년간 조선의 얼, 1935) |
안재홍 | 1934년 정약용 서거 99주년을 맞아 정인보, 문일평과 함께 조선학 운동 전개, 조선상고사감(1947), 불함철학대사전(1940), 조선철학(1944). 해방후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이론 주장 |
최남선 | 아시조선(兒時朝鮮, 1927) |
2. 사회경제사학
유물사관에 토대하여 세계사의 보편적 법칙에 입각한 한국사의 발전을 강조하고 식민사관의 정체성을 비판하였다. 선구는 안확(安廓)의 조선문명사(1923), 백남운(白南雲) 조선사회경제사(1933), 조선봉건사회경제사(1937). 해방후 연합성 신민주주의 제창. 그 외 김광진, 김석형, 박시형, 이청원, 전석담 등
3. 실증주의(實證主義) 사학
1934년 역사학자 이병도(李丙燾), 이상백(李相佰), 김상기(金庠基), 고유섭(高裕燮), 이선근(李瑄根), 문일평(文一平), 신석호(申奭鎬), 국어학자 이윤재(李允宰), 이은상(李殷相), 이재욱(李在郁), 이희승(李熙昇), 김윤경(金允經), 김태준(金台俊), 김효경(金孝敬), 이병기(李秉岐) 및 민속학자 손진태(孫晉泰), 송석하(宋錫夏), 김두헌(金斗憲), 박문규(朴文圭), 백낙준(白樂위원으로 뽑혀서 실무를 맡고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회원인 이윤재·濬), 홍순혁(洪淳赫) 등 진단학회를 조직하고 이병도, 이윤재, 이희승, 손진태, 조윤제 등이 이희승·이병기 등이 일본경찰에 붙잡혀 활동이 중단되었다. 해방 이후 학회는 학보 발간 등 활동을 재개해 1945년 5월 31일 사단법인으로서 창립총회를 가지고 체제를 재편성하였다. 독일 역사학자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 사학에 기반하여 문헌고증을 통한 실증적 역사연구를 하고 진단학보를 발행했으나 실증적인 문헌고증에 치우쳤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40. ①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일어난 의병이 을미의병이다. 문석봉(1895년 10월 중순경 충청도 유성, 회덕, 보은, 최초의 의병장). 이소응(춘천), 류인석, 이춘영, 안승우, 홍사구, 김백선, 서상렬(제천) 허위(선산), 곽종석(산청), 기우만(장성), 안병찬, 김복한, 이석, 이세영, 이근주(홍주), 민용호(강릉), 이강년(문경) 등이 대표적인 의병장이며 류인석은 개항불가론(開港不可論)를 전개했고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이필희(李弼熙)·서상렬(徐相烈)·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등의 문인사우들과 함께 ‘복수보형(復讐保形: 抗日守舊)’의 기치를 들고 1895년 12월 24일(음력) 의병항전을 개시하였다. 1910년 6월 연해주 의병세력의 통합체인 13도의군(十三道義軍)의 결성하여 도총재(都總裁)로 추대되었다. 개항후 현실적 위정척사론을 전개시켰기 때문에 의병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던 정신은 1902년 문인들에 의하여 간행된 『소의신편(昭義新編)』에 결집되어 있다.
썩어 빠진 양반 의식은 조선의 멸망이 필연적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첫째, 1895년 을미의병시 포수 출신 김백선은 선봉장으로서 가까스로 충주성을 점령했으나 홍응하기로 한 양반의 의병부대가오지 않아 다시 성을 빼앗기자 이에 대해 항의를 했은데 평민이 양반에 대들었다고 해서 류인석이 김백선을 처형했다.
둘째, 을사의병에서 1906년 최익현은 진압나온 진위대를 보고 임금이 보낸 군대와 싸울수 없다고 하여 싸움을 포기하여 체포되고 의병도 해산되어 버렸다.
셋째. 1908~1909년 13도 창의군에서 평민출신이라고 해서 의병장 신돌석, 홍멈도, 김수민을 제외했다.
넷째. 1909년 13도 창의군 총대장 이인영은 아버지 부음을 받고 군사장 허위에게 일임하고 미련없이 문경으로 가버렸다. 상를 마친후 다시 의병합류를 요청했으나 終制(終喪, 脫喪, 解喪, 어버이3 년상을 마침)후 다시 참여하겠다고 하고서는 얼마후 상주 황간에서 일본 헌병에체포되어 경성 교도소에서 처형되었다. 이것이 바로 양반 유생들의 한계이다.
② 해산군인의 합류 : 1907년 정미의병
③ 봉오동전투 : 1920년 홍범도, 최진동
④ 조건총독부 국권반환요구서 발송 : 1913년 임병찬이 고종의 밀지를 받고 조직한 복벽의 이념에 따라 고종 복위를 목표로 전국적인 의병 조직으로서 조선 총독부와 일본 정부에 국권 반환 요구서 발송 계획을 세웠으나 1914년 임병찬이 체포되어 거문도에 유배되어 1916년 자결하여 끝났다.
⑤ 국제법상 교전단체 승인 요청 : 13도 창의의병 서울진공작전시 총대장 이인영은 서울 주재하는 각국 영사관에 문서를 보내 의병을 국제법상 교전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교전단체로 인정되면 형법의 내란죄가 아닌 국제법상 전쟁법규가 적용된다.
41. ⑤ 김원봉에 관한 내용이다. 김원봉(金元鳳, 1898~1958). 若山, 최림, 이충, 진국빈, 천세덕 .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경남 밀양 출생으로 본관은 김해(金海). 호 약산(若山). 독립운동 때에는 최림(崔林)·이충(李冲)·진국빈(陳國斌)·천세덕(千世德) 등의 가명을 썼다.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의열단·조선의용대를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김구와 함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북한에 잔류하여 활동하다 1958년 숙정되었다.
1919년 12월 윤세주(尹世胄)·이성우(李成宇)·곽경(郭敬)·강세우(姜世宇)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의백(義伯: 단장)에 피선되었다. 1923년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채택하교 연합투쟁 및 조직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고 1925년에는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훈련생으로 입소하여 투쟁노선을 변경하였다. 1927년에는 중국 국민당의 북벌(北伐)에 합류하였고, 1929년 상해에서 정치학교를 개설하고 1932년 난징에서 조선인혁명간부학교를 창설하는 데 중국 국민당계의 도움을 받았다. 1935년에는 신한독립당, 한국독립당, 대한독립당, 조선혁명당(최동오), 조선의열단(김원봉)의 5개 단체를 규합하여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을 조직하였다. 1937년 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우한(武漢)으로 가서 조선민족혁명당이 중심이 되어 전위동맹·혁명자연맹·민족해방연맹 등 단체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여 대일선전전(對日宣傳戰)에 주력하였다. 1938년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를 편성하고 대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전국연합진선협회를 긴구와 주도하고 1942년 5월 조선의용대 400명 광복군 편입하고 1944년에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에 취임하고,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1945년 12월 임시정부 귀국시에는 군무부장의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계속 환국한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다.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임시정부측이 좌우합작을 거부하자 비상국민회의에서 탈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 피선되어 임시약법기초위원(臨時約法起草委員)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6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고 지속적으로 연합전선구축에 노력하였으나, 여운형(呂運亨)이 암살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월북하여 1948년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세칭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 그 뒤 북한에서 국가검열상·내각 노동상·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 11월 숙청당하였다.
①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사살 : 1909. 10. 26. 안중근
②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명동학교 설립 : 명동학교(明東學校)는 1906년에 세웠다가 1년만에 폐교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고쳐 1908년 김약연(金躍淵), 김학연(金學淵) 주도로 북만주 화룡현 명동촌에 세워진 한국의 민족교육기관이다. 1910년 중학교, 1911년 여학교를 세우고 개교 이래 1925년 폐교까지 17년 동안 총 일천 이상의 애국청년들이 배출되었다.
③ 훙커우공원에서 일본군 장성과 고관 처단 : 1932.년 4월 윤봉길
④ 조선혁명군을 이끌고 영릉가 전투에서 승리 : 1932년 3월 양세봉
42. ④ 민족말살 정책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 1945년 광복까지 전개된 정책이다. 국가총동원령, 민족적 문화활동(한글 잡지 신문 발행, 조선어 사용) 금지. 신사참배 강요, 창씨개명,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등, 공출, 징병, 징발
① 태형 집행하는 경찰 : 1912년 태형령
② 회사령을 공포하는 총독부 : 1910년 12월 회사령
③ 암태도 소작쟁의에 참여하는 농민 : 1923년 암태도 소작쟁의
⑤ 조선민립대학 기성회에 성금을 내는 상인 : 1920년대 민립대학 설립운동
43. ③ 순종 인산일에 있었던 1926년 6월 10일 만세사건의 상황이다. 사회주의세력이 일부 민족주의세력과 제휴하여 운동을 전개하고 이후 신간회가 창립되는데도 영향을 주었다.
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이전인 1919년 9월에 설립되었다.
② 신간회 중앙본부가 진상조사를 나간 사건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투표사건이다.
④ 한국인학생(이광춘, 박기옥과 박준채)과 일본인 학생간의 충돌이 발단이 된 것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다.
⑤ 1919.3.1 기미독립운동
44. ① 1931년 김구가 샹하이에서 조직한 한인애국단에 대한 내용이다. 1932년 이봉창의 도쿄에서의 천황 암살을 위한 수류탄 투척 사건과 윤봉길의 1932년 훙커우공원 사건이 있다.
② 1923년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을 활동지침으로 삼은 것은 김원봉의 의열단(1919~1925)이다.
③ 강우규, 박재혁, 최수봉, 김지섭, 나석주, 김상옥, 김익상은 모두 의열단원들이다.
④ 복벽주의를 내세우면 의병활동울 전개한 것은 임병찬이 1913년 설립한 독립의군부이다.
⑤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세운 신흥무관학교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한 사람은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이상용, 김대학 등이다.
45. ③ 1946년 10월 7일 좌우합작위원회의 좌우합작 7원칙의 주요 내용은 ①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② 미소공동위원회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 발표 ③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 분여, 중요산업의 국유화, 지방자치제 확립 ④ 친일파 처리 법안 마련 ⑤ 정치운동자 석방과 남북・좌우의 테러 행동 제지 ⑥ 입버기구에 대한 대안마련과 적극적 실행 ⑦ 언론・집회・결사・출판・교통・투표의 자유 보장
46. ① 남강 이승훈에 대한 내용이다.
이승훈(李昇薰, 1864~1930)은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호는 남강이다. 평안북도 출생으로 양민 출신에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었지만 16세에 유기상 종업원으로 시작으로 10년만에 대상인이 되었다가 청일전쟁으로 재산을 일고 다시 일어나지만 러일전쟁으로 다시 망한후 불굴의 의지로 다시 사업을 크게 일으키고 참봉직을 사서 여태 못해봤던 양반행세를 하다가 안창호의 교육 강연을 듣고 깨달아 신민회가입하고 교육기관인 오산학교, 강명의숙 등을 설립하여 본격 교육자의 길을 가게 된다. 서적 출판을 담당하던 태극 서관과 자기회가도 설립 운영했다.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를 가고, 105인 사건으로 인해 유배중에 감옥으로 끌려가 10년형을 선도받고 5년만에 가출옥하였다.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었으며 1919년 민족대표 33인에 기독교 대표가 되어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고 다시 복역하고 33인중 가장 늦게 출옥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 오산학교 교장으로 살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조만식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에 힘쓰는 한편 농촌 진흥에 노력을 기울이다 1930년에 향년 67세로 타계했다.
②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 이승만, 박은식
③ 서유견문 집필하여 서양문물 소개 : 고종 26년 유길준
④ 국문연구소 설립하여 한글 문자 체계 정리 : 광무 11년 1907년 7월 8일 학부(學部)에서 설치
⑤ 헤이그 만국평회회의 특사 파견 : 1907년 헤이그 특사 이위종, 이상설, 이준
47. ② 산미증산계획은 조선을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1920∼1934년 실시한 농업정책으로 토지개량사업(관개개선・지목변경・개간・간척)과 농사개량사업(우량품종보급・시비증대・・종법개선)에 의한 미곡증산을 통하여 일본의 식량문제를 조선에서 해결하려는 의도로 입안된 것으로, 시행과 중단이 반복되었다
① 농광회사 주도 : 1904년 이도재가 설립한 일본의 토지 침탈 기도에 맞서, 개간 사업을 목적으로 설립된 근대적 농업 회사.
③ 태평양 전쟁이후 군량미 조달 : 1937년 이후
④ 하와이 노동이민 공식 시작 : 1902년 ·2우러 12명 시작
⑤ 함경도와 황해도의 방곡령선포 : 1889년 황해도 관찰사 조병철, 1889년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 1890년 황해도 관찰사 오준영
48. ①
남북공동성명(1972.7.4 발효)
최근 평양과 서울에서 남북관계를 개선하며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회담이 있었다.
서울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5월 2일부터 5월 5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평양의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회담을 진행하였으며, 김영주 부장을 대신한 박성철 제2부수상이 1972년 5월 29일부터 6월1일까지 서울을 방문하여 이후락 부장과 회담을 진행하였다.
이 회담들에서 쌍방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하루빨리 가져와야 한다는 공통된 염원을 안
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하였으며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쌍방은 오랫동안 서로 만나보지 못한 결과로 생긴 남북 사이의 오해와 불신을
풀고 긴장의 고조를 완화시키며 나아가서 조국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
들에 완전한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
1. 쌍방은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원칙들에 합의를 보았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 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세째, 사상과 이념·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2. 쌍방은 남북 사이의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서로 상대방을 중상 비방하지 않으며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무장도발을 하지 않으며 불의의 군사
적 충돌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하였다.
3. 쌍방은 끊어졌던 민족적 연계를 회복하며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남북 사이에 다방면적인 제반교류를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4. 쌍방은 지금 온 민족의 거대한 기대 속에 진행되고 있는 남북적십자회담이 하루빨리 성 사되도록 적극 협조하는 데 합의하였다.
5. 쌍방은 돌발적 군사사고를 방지하고 남북 사이에 제기되는 문제들을 직접, 신속 정확히 처리하기 위하여 서울과 평양 사이에 상설 직통전화를 놓기로 합의하였다.
6. 쌍방은 이러한 합의사항을 추진시킴과 함께 남북 사이의 제반문제를 개선 해결하며 또 합의된 조국통일원칙에 기초하여 나라의 통일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이후락 부장과 김영 주 부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운영하기로 합의하였다.
7. 쌍방은 이상의 합의사항이 조국통일을 일일천추로 갈망하는 온 겨레의 한결같은 염원에부합된다고 확신하면서 이 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온 민족 앞에 엄숙히 약속한 다.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이 후락 김영주
72년 7월 4일
② 금강산 관광사업 실시 : 현대그룹이 처음 추진한 대북 관광사업으로 1998년 11월 18일 첫 관광을 시작으로 2003년 9월에는 육로관광이 시작되었고, 2007년에는 내금강 지역으로 관광 지역이 확대되었다. 2007년 12월 5일에는 개성관광도 시작되었다. 2008년 7월 11일 북한군의 총격으로 의해 일반인 관광객이 사망하면서 전면 중단되고 말았다.
③ 개성공단 설치 합의 : 김대중 정부
④ 최초 남북정상회담 개최 : 2000년 6월 15일 긴대중과 김정일
⑤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 :1991년 112월 31일
49. ② 1993년 금융실명제는 김영삼 정권때의 일이다.
①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 : 1962~1966년
③ 미국과 자유무역협정 체결 : 2011.11.29서명. 2012.1.1 발효
④ 제2차 석유파동 경제불항 심화 : 1차 1973~1974년 2차 1978~1980년
⑤ 원조물자를 가공하는 삼백사업 : 한국동란후 밀가루, 살탕, 면화 사업
50. ④ 1987.6.9.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 촤루탄 맞고 쓰러져서 7월 5일 사망하였다. 그해 대규모 시위가 이어자고 6.29선언울 통해서 직선제를 수용하여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① 신군부 비상계업확대 원인 : 1980.5.17 광주민주화시위
② 3.15. 부정선거 항의하는 시위에서 비롯된 것은 1960.4.19 4월혁명이다.
③ 관련 자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 2011년 광주민주화운동기록물
⑤ 국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대통령이 하야 해야하는 결과 : 1960년 4월 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