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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 오준, `사람의 땅 시의 길` 원문보기 글쓴이: 해와
勺詩富林, 시로 톺아보는 목숨
들머리 玄牝之門 6강, 2018년 2월 7일
1, 시인은 누구인가
시인은 누구인가
타데우시 루제비치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고
시를 쓰지 않는 사람이다.
시인은 족쇄를 벗어던지는 사람이고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는 사람이다.
시인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며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고
거짓에 속는 사람이다.
시인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고
진실을 삼키는 사람이다.
시인은 쓰러지는 사람이며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다.
시인은 떠나는 사람이고
결코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다.
참된 시인이란…
윤구병
변산 가는 버스를 타고 창 밖을 내다보면서 시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시인이란 무엇인가? 시인은 낡은 말과 글의 굳어져버린 껍질을 깨고, 말과 글, 그리고 거기에 비친 생각과 느낌의 새로운 결을 드러내고, 그 생각과 느낌을 뒷받침하는 삶의 새순을 키워내는 사람이다. 죽어버린 말과 글의 질서에 매달려 예쁜 시어로 꾸미기나 하는 사람은 참 시인이 아니다. 참 시인은, 비유하자면 운수 행각을 하는 떠돌이 중이나 제대로 농사짓는 농부와 같은 사람이다. 운수 행각을 하는 중들은 이틀 밤을 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벌써 하룻밤을 지나면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이 낯익은 것으로 바뀌어 있고, 그렇게 되면 주변 사물에 관심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늘 낯선 것 사이에서 온몸과 마음을 활줄처럼 팽팽하게 긴장시켜 주위의 모든 것에 주의 깊은 관섭을 기울여 접촉하는 자세, 새롭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늘 자신을 내던지는 것, 그렇게 해서 온몸과 가슴이 새로움으로 가득 차게 함. 이것이 길 걷는 사람의 마음가짐이고 시인의 눈이다.
삶은 늘 새로운 것이다. 낯익은 것, 편안한 것, 익숙한 것이 생겨난다는 것은 머문다는 것,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느슨해진다는 것, 타성에 젖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죽음에 길든다는 것이다. 어린애의 눈은 늘 호기심에 차 있다. 살아 있다. 이 눈을 가져야 시인이 될 수 있다. 늘 새로운 느낌, 새로운 눈으로 세상과 만나는 사람이 시인이다. 참 농사꾼도 마찬가지다. 진짜중도 마찬가지고…. 시가 마침내 다닫는 궁극지점은 깨우침의 순간 중들이 읊는 오도송(悟道頌 깨우침의 노래)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 깨우침의 노래는 낡은 말과 글의 질서 속에서 말뜻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뜻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논리나 사고나 느낌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순된 표현으로 가득 차있다. 삶의 흐름이란 그런 것이다. 순간순간 비약이고 창조다. 이미 만들어진 어떤 그물로도 그 살아 뛰는 고기는 건져올릴 수 없다. 사랑이 삶의 궁극 표현인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비친 세상은 사랑이 없는 사람의 눈에 비치는 세상과 딴판이기 때문이다. 낯설게 만들기, 낯선 세상 속에서 낯선 나그네로 살아가기, 끊임없이 사랑 속에서 일을 놀이로 만들기, 그 과정에서 생기는 상처와 고통을 온 가슴으로 끌어안기.
버스에서 내려 걸어오면서 춤을 추었다. 춤추는 내 그림자를 보면서 내가 참 춤을 잘 추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춤의 최고 경지가 원효가 추었다는 무애춤이다. 달빛과도 놀고, 가로등 불빛과도 놀고, 겨드랑이로 스미는 초가을 산들바람에도 어깨가 들리고 개구리와 풀벌레 울음에도 발걸음이 그때마다 달리 건들거리고….
아이들에게 식물도감이나 약초도감에 나오는 풀이나 나무 이름을 일러주어 무엇하리. 예쁜 풀, 마음에 드는 나무를 보면 냄새도 맡아보고 맛도 보고 올라가보기도 하고 꺾어보기도 하면서 스스로 이름을 짓게 만들고 나중에 그 나무를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부르는지도 가르쳐주어 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풀이나 나무 이름이 마음에 안 들거든 새로 지은 예쁜 이름으로 그 풀과 나무를 부르도록 하자. 새 이름을 붙이고 새 이웃을 만들고 그 새로운 관계의 그물을 새로 떠서 살아 생동하는 생명의 고기를 건저 올리게 하자. 죽은 세상을 산세상으로 바꾸는 길이 그 길이 아니랴.
시 인
진이정
시인이여,
토씨 하나
찾아 천지를 돈다
시인이 먹는 밥, 비웃지 마라
병이 나으면
시인도 사라지리라
2. 시인의 자세;「‘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추억」 (김경, 칼럼니스트)의 글 중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거장이나 대가로서의 허세가 없었다. 자기 자랑만 늘어놓고 젊은이들에 대한 몰이해를 무슨 자신만의 특권인 양 휘두르는 옹고집 어른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80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가야금을 연주하신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클래식은 물론 재즈나 포크, 심지어 노라조 같은 대중가요를 들으며 음악과 시대를 더 충실하게 가슴으로 껴안으려 한 분이었다.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자양분을 찾아 늘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 진짜 어른. 그리하여 몇 해 전 새해 인사차 인터뷰를 청한 자리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모든 연주자가 매일 연주 안 하면 안돼. 연주가 육체 행위라 그래. 스포츠하고 똑같은 거야. 김연아나 장미란이 한 달만 안 해봐. 못해. 육체 행위는 정직하거든. 그리고 속임수가 안 통해. 정신은 교활해서 거짓말도 하고, 사람도 속이고, 핑계도 대고 그러지. 게으름도 피우고 말이야. 그런 거 보면 육체가 정신보다 훨씬 신성하고, 더 위대한 거야.”
(……)
“진짜 기쁨은 슬픔에서 나오는 거야. 슬픔을 뱃속에서부터 다 집어넣고 나오는 기쁨. 그게 진짜 기쁨이지. 물론, 슬픔이 슬픔으로만 끝나는 건 아니지. 그러니까 슬퍼도 너무 슬퍼하지 말고 괜히 오지도 않은 미래 때문에 너무 걱정도 하지 마. 그냥 현재에 살면 돼. 걱정이나 불안은 존재하지 않는 거니까. 그건 유령 같은 거라고. 굳이 일부러 상대할 필요 없는 유령. 유령은 유령대로 지들끼리 살게 내버려 두면 되는 거고(웃음).”
내가 언제
이시영
시인이란,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우주의 사업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언제 나의 입김으로
더운 꽃 한 송이 피워낸 적 있는가
내가 언제 나의 눈물로
이슬 한 방울 지상에 내린 적 있는가
내가 언제 나의 손길로
광원(曠原)을 거쳐서 내게 달려온 고독한 바람의 잔등을
잠재운 적 있는가
쓰다듬은 적 있는가
시인이라는 직업
금강산 시인대회 하러 가는 날, 고성 북측 입국심사대의 귀때기가 새파란 젊은 군관 동무가 서정춘 형을 세워놓고 물었다. “시인 말고 직업이 뭐여?” “놀고 있습니다.” “여보시오, 놀고 있다니 말이 됩네까? 목수도 하고 노동도 하면서 시를 써야지……” 키 작은 서정춘 형이 심사대 밑에서 바지를 몇 번 추슬러 올리다가 슬그머니 그만두는 것을 바다가 옆에서 지켜보았다
첫사랑
서정춘
가난뱅이 딸집 순금이 있었다
가난뱅이 말집 춘봉이 있었다
순금이 이빨로 깨뜨려 준 눈깔사탕
춘봉이 받아먹고 자지러지게 좋았다
여기, 간신히 늙어버린 춘봉이 입 안에
순금이 이름 아직 고여 있다
3. 美,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인가; 천재와 不感症
1) 괴테의 詩(시) 「四季(사계)」‘여름’중에서
神(신)이시여, 왜 나는 덧없이 멸하는 몸입니까?”
하고 美(미)가 물었다. 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오직 덧없이 스러지는 것만을 아름답게 만들었느니라.”
사랑과 꽃과 이슬과 청춘이 이것을 듣고 울며
주피터 왕좌 앞에서 물러났다.”
괴테의 ‘美’에 관한 또 다른 말
"미(美)는 나와 나 자신을 자각하는 일이 없다. 미(美)는 知(지)와 달리 마음에 생명과 따스함을 부여해 준다. 반성도 숙고도 필요없이 인간이 좋다고 느끼는 모든 일체의 온화하고 고상한 조화, 그것이 미(美)다."
2) 도스토예프스키, 「악령」
"미(美)가 없다면 과학은 노예로 떨어지고 못 한 개도 발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의 형제」
"미(美),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그것이 무섭다는 것은, 그것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헤르만 헷세「크늘프의 세 이야기」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항상 만족과 함께 슬픔을 혹은 불안을 동반 할 때 아름답다."
4) 로댕
"미(美)는 도달점이지 출발점이 아니다. 그리고 사물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이 진실할 때뿐이며, 진실 이외에 미(美)는 없다. 그리고 또한 진실이라는 것은 <완전한 조화>를 말한다."
5) 도덕경 2장
天下皆知 美之爲美 斯惡已요
皆知 善之爲善하나 斯不善已니라
故로 有無相生하고 難易相成하고
長短相較하고 高下相傾하고
音聲相和하고 前後相隨니라.
是以로 聖人은 處無爲之事하여
行不言之敎니라.
萬物 作焉而不辭하고
生而不有하고 爲而不恃하고 功成而弗居하고
夫唯弗居니 是以로 不去니라.
고향 앞에서
오장환
흙이 풀리는 내음새
강바람은
산짐승의 우는 소릴 불러
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내려간다.
진종일
나룻가에 서성거리다
행인의 손을 쥐면 따뜻하리라.
고향 가까운 주막에 들러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양귀비 끓여다 놓고
주인집 늙은이는 공연히 눈물 지운다.
간간이 잰나비 우는 산기슭에는
아직도 무덤 속에 조상이 잠자고
설레는 바람이 가랑잎을 휩쓸어 간다.
예제로 떠도는 장꾼들이여!
상고(商賈)하며 오가는 길에
혹여나 보셨나이까.
전나무 우거진 마을
집집마다 누룩을 듸듸는 소리, 누룩이 뜨는 내음새 ……
4. 신경림의 글「시인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 나는 요즈음의 시를 읽으면서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케케묵은 화두를 다시 한번 떠올려보았다. 다 알다시피 이것은 워즈워스(W. Word sworth)와 코울리지 (S. T. Coleridge)가 공동으로 낸 『서정담시집 Lyrical Ballads』의 제2판 서문에서 제기했던 질문이다.
이 서문에서 워즈워스와 코울리지는 대답했다, "시인이란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을 보다 쉽게, 보다 힘 있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고 있는 사람이다 "라고. 나는 이 말을 시인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한 살아있는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 가령 앞의 정의에서 "쉽게" 라는 말 속에 정확하게, 분명하게라는 뉘앙스가 있다고 읽을 때 뜻은 더 명료해진다. 시인이란 결국 남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사람이다. 시도 일종의 대화라는 뜻이다. 설명이 아니라 표현을 가지고 하는 대화니까 정확하고 분명해야 한다.
한데 요즘 읽는 시들 중 많은 것은, 비록 말장난의 시라고 말할 수 없는 것까지도, 표현이라는 개념도 대화라는 개념도 없다. 중언부언 도대체 요령부득인, 그래서 안이하고 탄력없는 시가 새로움이란 가면을 쓰고 난무한다.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떠들어도 되는 컴퓨터 탓이 없지 않을 것이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데 그 말이 어찌 힘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힘있게" 가 "감동적으로" 를 뜻한다면 이런 유의 시가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런 유의 시뿐 아니라 상당한 수준으로 시적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흠잡을 수 없는, 그래서 정말 그럴듯하다고 느껴지는 시도 대부분 울림을 주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사회성이 제거된, 거의 개인적인 문제로 시종하고 있는 시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
(………) 세상에 혼자 사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자기가 사는 삶인 만큼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삶일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남과 더불어 살게 마련인 것이 세상이다. 더욱이 말이란 사색이나 자아추구의 방법이기도 하다. 본질적으로는 사회적 삶의 소산이다. 말에는 원천적으로 사회성이나 역사성이 있다는 소리다. 그런데도 시를 가지고 개인적 문제에만 집착한다면 시는 한없이 왜소해져 있다. 이런 시들이 몸을 던져 시를 쓰는 것과 거리가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치열함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지나친 독자에의 영합이 더 문제다. 시가 경박해지는 것도, 시를 너무 쉽게 쓰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도 남에게 하는 말인 만큼 듣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사실 독자가 없는 시처럼 비참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의식한다는 것과 영합은 전혀 다르다. 의식한다는 것은 독자에게 마음을 열어놓고 있다는 뉘앙스를 가진 반면, 영합은 독자가 듣기 좋아하는 말만 골라서 한다는 뜻이 강하다. 7,80년대의 사회성의 시들은 어쩌면 또 다른 형태의 독자와의 영합이었다는 혐의를 둘 수도 있으므로, 사회성의 시 자체에 독자와의 영합 내지 세속주의적 요소가 있는가의 여부는 한번 짚고 넘어갈 대목이다. (………)
다시 광야(曠野)에
김관식
저는 항상 꽃잎처럼 겹겹이 에워싸인
마음의 푸른 창문을 열어놓고
당신의 그림자가 어리울 때까지를
가슴 조여 안타까웁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늘이여,
그러면 저의 옆에 가까이 와 주십시오.
만일이라도…… 만일이라도……
이승 저승 어리중간 아니면
어데든지 당신이 계시지 않을 양이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몸뚱어리는
암소 황소 쟁기결이 날카론 보습으로
갈아헤친 논이랑의 흙덩어리와 같습니다.
따순 봄날 재양한 햇살 아래
눈 비비며 싹터 오는 갈대순같이
그렇게 소생하는 힘을 주시옵소서.
말
울라브 하우게
한 단어
- 하나의 돌
차가운 강물속
또 다른 돌 하나
이곳을 건너려면
더 많은 돌이 필요하다
그대의 길
울라브 하우게
그대가 갈 길을 표시해 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저 미지의 세계에
멀리 떨어진 곳에
이것은 그대의 길
오직 그대만이
그 길을 갈 것이고
되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대 또한
그대가 걸어온 길을 표시해놓지 않는다
황량한 언덕 위 그대가 걸어온 길을
바람이 지워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