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딜레마3 : 미뇨네트호 이야기 (p51)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중에서)
1884년 여름, 영국 선원 네 명이 작은 구명보트에 올라탄 채 육지에서 1600킬로미터 떨어진 남대서양을 표류했다. 이들이 타고 있던 미뇨네트 호는 폭풍에 떠내려갔다. 구명보트에는 달랑 순무 통조림 캔 두 개뿐, 마실 물도 없었다. 토머스 Dudley가 선장이었고, 에드윈 스티븐슨은 일등 항해사, 에드먼드 브룩스는 일반 선원이었다. 신문은 이들이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었다고 전했다.
네 번째 승무원은 잡무를 보던 열일곱 살 남자아이 리처드 파커였다. 고아인 파커는 긴 항해를 떠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파커는 친구들의 충고도 무시한 채 “젊은이의 야심을 품고 희망에 가득 차” 항해에 참가했고, 이번 여행으로 남자다워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구명보트를 타고 표류하던 네 선원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지나가던 배가 구조해주기를 기다렸다. 처음 사흘 동안은 순무를 정해놓은 양만큼 조금씩 먹었다. 나흘째 되던 날은 바다거북을 한 마리 잡았다. 이들은 바다거북과 남은 순무로 연명하며 며칠을 더 버텼다. 그리고 여드레째 되던 날, 음식이 바닥났다.
이때까지 파커는 구명보트 구석에 누워 있었다. 다른 사람의 충고를 무시하고 바닷물을 마시다가 병이 난 탓이다. 곧 죽을 것만 같았다. 고통스럽게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19일째 되던 날, 선장 더들리는 제비뽑기를 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할 사람을 정하자고 했다. 하지만 부룩스가 거부하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다음 날도 배는 보이지 않았다. 더들리는 부룩스에게 고개를 돌리라고 말하고는 스티븐슨에게 파커가 희생되어야 한다고 몸짓으로 전했다. 더들리는 기도를 올리고, 파커에게 때가 왔다고 말한 뒤 주머니 칼로 파커의 경정맥 급소를 찔렀다. 양심상 그 섬뜩한 하사품을 거절하던 브룩스도 나중에는 자기 몫을 받았다. 나흘간 세 남자는 남자 아이의 살과 피로 연명했다.
그리고 구조의 손길이 나타났다. 더들리는 일기에 그 일을 놀라우리만치 완곡하게 기록했다. “24일째 도던 날,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드디어 배가 나타났고. 생존자 세 명이 모두 구조되었다. 이들은 영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부룩스는 검찰 측 증인으로 출석했고, 더들리와 스티븐슨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들은 파커를 죽여 그를 먹은 사실을 순순히 자백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당신이 판사라고 해보자. 어떤 판결을 내리겠는가? 상황을 단순화하기 위해, 법에 관한 문제는 제쳐두고, 당신은 그 남자아이를 죽인 짓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행위인가를 결정해야 한다면 어떤 판단을 하겠는가?
※ 옳은 행위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결과적으로 다수의 이익인가요? 아니면 결과를 떠나 인간이라면 포기하지 말아야할 가치인가요?
도덕은 목숨의 숫자를 세고, 비용과 이익을 저울질하는 문제인가? 아니면 특정한 도덕적 의무와 인권은 워나 기본적인 덕목이라 그러한 계산을 떠나 별도로 존재하는가?
그리고 특정한 권리가 그렇게 기본적이라면, 타고난 권리든, 신성한 권리든, 빼앗을 수 없는 권리든, 절대적 권리든 간에, 그것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더불어 그것은 왜 기본 권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