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아시리아왕국의 확장 및 쇠퇴.
므나쎄, 아몬, 요시야의 유다 통치
2열왕 21-23장; 2역대 33-35장(기원전 687~605년)
28.1 아시리아 왕국의 확장
이 지도는 기원전 705년 사르곤 2세 사망 당시의 아시리아 영토를 살구색으로 표시하고 있다. 기원전 709년 사르곤 2세는 므로닥 발아단을 무찌르고 자신을 바빌로니아 왕으로 선포했음을 기억하자. 사르곤 2세를 산헤립(기원전 705~681년)이 계승했고, 앞 장에서 그의 팔레스티나 원정을 살펴보았다. 산헤립은 기원전 681년 왕위 다툼에 휘말려 자기 아들 중 누군가에게 살해된 듯하다(참조: 2열왕 19,36-37; 2역대 32,21; 이사 37,38). 에세르 하똔Asarhabbon(기원전 680~669년)이 그 싸움의 승자였다. 기원전 677년, 그는 시돈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다. 그런데 군사적으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이집트 원정이었다. 기원전 671년 그는 두 번(혹은 세 번)에 걸친 전투에서 파라오 티르하카를 무찌르고 멤피스를 약탈했다. 그러나 이집트를 효과적이고 지속적으로 지배하지 못했고, 기원전 699년 티르하카를 공격하기 위해 또 다시 원정을 시도하다가 여행 중에 죽었다. 이집트와의 전쟁은 에사르 하똔의 후계자인 아슈르바니팔(기원전 668~626년)이 다시 시작하여 기원전 667년 티르하카에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662년 아시리아가 티르하카의 조카 타무타마니Tamutamon를 공격하기 위해 새로이 벌인 원정은 테베를 점령하며 마무리되었다. 뒤이어 아슈르바니팔은 기원전 652년 바빌로니아 왕이며 형제인 샤마슈 슘 우킨Shamash-shum-ukin(에사르 하똔이 두 아들에게 왕국을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과 전쟁을 벌였는데, 그가 엘람과 연맹을 맺고 아시라이에 대한 봉신 관계를 파기하려 했기 때문이다. 샤마슈 슘 우킨은 기원전 648년 결정적으로 패했지만 엘람과의 전쟁은 기원전 639년까지 이어져 결국 엘람의 패배로 끝났고 엘람은 아시리아에 병합되었다. 아슈르바니팔은 영토 확장뿐 아니라 니네베의 왕궁에 문학 서적을 보관할 큰 도서관을 지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기원전 626년 혹은 630년에 아슈르바니팔이 죽자 아시리아 제국은 기울기 시작했다. 이집트 사이스Sais의 제후 프삼티크 1세(기원전 664~610년)는 이집트 영토 전체를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했고 기원전 650년경 아시리아 주둔군은 이집트를 떠나야 했다.
유다왕국에서는 히즈키야의 후계자 므나쎄(기원전 687~642년)가 아시리아에 굴복하여, 아시리아 연대기가 전하는 대로 아시리아의 충실한 봉신으로 남아 있었고, 그의 아들 아몬(기원전 642~640년)도 마찬가지였다. 이 왕들의 자주권은 눈에 띄게 축소되었다. 라키스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면 유다왕국 영토에도 아시리아 장수들이 지휘하는 주둔군이 배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역대기 하권 33장 11절은 므나쎄가 사슬에 묶여 바빌론으로 끌려갔다고 전하며, 반란을 시도했음을 암시하는데 이는 상당히 의심스럽다. 므나쎄가 메소포타미아로 간 것은 아시리아 왕에게 연례적으로 공물을 전달하려는 목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성경은 므나쎄와 아몬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이교 신들에 대한 경배 예식과 이교 의식을 조장했기 때문이다. 아몬 왕은 신하들의 음모로 죽임을 당했고, 백성들은 이 반란자들에 맞서 아몬의 아들 요시야를 왕위에 앉혔다. 그의 나이는 겨우 여덟이었다.
28.2 요시야 지배 영토의 확장. 느코와의 전쟁.
네부카드네자르의 침략(2열왕 22-23장; 2역대 34,1-36,4)
1) 요시야가 유다를 통치할 때 아시리아는 급속히 세력이 약화되었다. 기원전 625년 칼데아인 나보폴라사르는 바빌로니아를 점령하고 결정적으로 아시리아로부터 독립했다. 메디아의 왕 키악사레스와 연합한 나보폴라사르는 아시리아인들을 큰 곤경에 빠뜨렸으며 기원전 612년에는 아시리아 수도 니네베를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아시리아가 약해진 틈을 타 요시야는 종교적·정치적 개혁을 실행한다(역대기 하권 34장 3절에 따르면 개혁은 요시야 통치 제12년에 시작된 반면, 열왕기 하권 22장 3절은 통치 제18년으로 이야기한다). 개혁은 모든 이교 의식을 없애고 모든 경배 예식을 예루살렘에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개혁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모세의 율법 책’이 발견된 것과 연관되며, 이 책은 통상 현재의 신명기와 관련된다. 종교 개혁은 정치적으로도 효과를 나타냈는데, 개혁의 효과가 이스라엘왕국에 속해 있던 몇몇 영역에도 확산되었다는 것은 유다왕국의 영토가 확장되었음을 암시한다.
2) 니네베가 몰락한 후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슈르 우발리트Assur-uballit는 하란 근처에서 저항군을 조직했다. 프삼티크 1세의 뒤를 이은 파라오 느코Necao 2세(기원전 610~595년)는 아시리아를 돕기로 했다. 과거 아시리아와 이집트 간의 적개심을 생각하면 놀라운 결정인데, 신바빌로니아라는 신생 권력에 대항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군대가 팔레스티나를 가로지르려 하자 요시야는 통과하지 못하게 했다. 자기 영토를 지키려 했거나 팔레스티나의 완전한 자유를 위해서도 아시리아가 멸망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투는 기원전 609년 므기또에서 벌어졌으며 요시야는 그곳에서 전사한다. 그 뒤를 그의 아들 여호아하즈가 계승했다. 느코 2세는 아시리아인들을 돕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시리아-팔레스티나에 대한 지배력을 장악했다. 그는 석 달 뒤 여호아하즈를 감옥에 가두고 요시야의 다른 아들 엘야킴을 왕으로 세웠으며, 엘야킴은 이름을 여호야킴으로 바꾸었다. 유다는 이렇게 이집트의 봉신 왕국이 되어 조공을 바쳐야 했다.
3) 이런 상황은 몇 년 지속되지 않았는데, 기원전 605년에 나보폴라사르의 아들 네부카드네자르가 지휘하는 신바빌로니아 원정대가 유프라테스 강가의 카르크미스(현대의 예라블루스Gerablus 근처)에서 느코를 무찌르고 이 지역에 대한 이집트의 영향을 무력화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는 나보폴라사르의 죽음으로 군사 활동을 중단하고 바빌론으로 돌아가 왕좌를 계승해야만 했다. 따라서 신바빌로니아가 팔레스티나와 여호야킴을 제대로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2년 뒤의 또 다른 원정 때부터인데, 이때 원정대는 처음에는 해안가를 공격했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다시 시리아 쪽으로 선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