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서효인
질투는 드라마에서처럼
누군가를 좋아해서 생기는 감정은 아니다 그것은
제가 저를 너무나 좋아해서 생기는
습기 같은 것이라
해수욕장의 발바닥이 다 털어도
털어도 모래가 붙는다.
도넛 방석 위에 앉아 불 꺼진 모니터를 바라보면
거기에 진짜 내가 있다 늠름한 표정으로
나는 내가 좋아서 미치겠는 날도 많은데
남은 나를 좋아해 미칠 수는 없겠지
오늘은 동료가 어디 심사를 맡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후배가 어디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친구가 어디 해외에 초청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그 녀석이 저놈이 그딴 새끼가 오늘은
습도가 높구나 불쾌지수가 깊고 푸르고
오늘도 멍청한 바다처럼 출렁이는
뱃살 위의 욕심에 멀미한다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나는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변명하고 토하고
책상 위에 앉아 내 이름을 검색하고
빌어먹을 동명이인들 같은 직군들
또래들 심사위원들 수상자들 주인공들
나는 내가 좋아서 미치겠는데 남들은
괴이쩍게 평온하고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안 그런 척하는데
나는 나 때문에 괴롭고 나는
나를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고
늠름한 표정으로 슬리퍼를 털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화장실 간다
오줌을 누는데 보이는 건 불룩한
아랫배가 전부
이런 나라도 사랑할 수 있겠니.
대답 대신 쪼르륵
내려가는 소리 들린다
푸르고 깊은 몸 곳곳에 해변의 모래가 들러붙어서
사무실에까지 왔다 질투는
로맨스 같은 구석이 있다 오늘은
예고편에 불과하고 내일은 동료와 친구와 선후배와 옆자리와 뒷자리와
동명이인과 같은 직군과 비슷한 또래와
노인과 젊은이와 이토록 연안에서 깊이 추잡스럽겠지만 극적이게도
바깥은 평온하다, 그것이 나를 더 미치게 하는 줄도 모르고
#서효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