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들러 리스트, 그 의문을 제기하다 (by 아드리아)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의 광기는 극에 치달으면서 인종 청소라는 명목 아래 600만명에 이르는 유대인을 학살했다. 1944년의 그날 무려 천 백 여명의 유대인들이 포로 수용소 내 가스실에서 죽을 운명에 놓였다.그런데 그 순간 삼엄한 경비를 뚫고 도주로를 뚫은 사람이 있었다. 영웅이 된 남자는 오스카 쉰들러였다 . 그런데 2004년 역사학자 데이비드 크로스 박사가 쉰들러의 선행이 조작됐다고 주장하는 세기의 영웅은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크로 박사가 문제 삼은 것은 나치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탈출시키기 위해 작성한 명부로 여겨지는 이른바 "신들러 리스트"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쉰들러는 수완이 뛰어난 사업가로 그릇 표면을 매끄럽게 바른 에나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나치 군인들에게 뒷돈을 주며 사업을 키웠지만 문제는 노동력의 확보였다. 높은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쉰들러는 무차별 학살당한 유대인을 떠올렸다.그리고 나치당원에게 뇌물을 주고 유대인 알선을 의뢰했다. 즉, ,"신들러 리스트"란 쉰들러가 공장에 들여온 유대인 리스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일부에서는 ,"근거없는 소문"이라고 일축했지만 때마침 증언자가 나타났다. 홀로코스트가 행해질 당시 나치 대원으로 활동했던 슈워츠는 이렇게 말했다."신들러리스트"라고 불리는 리스트는 골드만이라는 남자가 쉰들러에게 돈을 받아 무작위로 유대인의 이름을 쓴 것이라고 증언했다. 결정적으로 "신들러 리스트"가 정말 유대인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 증거라면, 리스트를 작성할 당시 쉰들러가 유대인과 함께 탈출 장소에 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쉰들러가 유대인의 탈출을 도왔다는 1944년 5월에 그는 나치 사령관 아몬 고스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로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쉰들러를 영웅으로 기억하게 되었을까?
크로 박사는 당시 쉰들러가 유대인을 자신의 공장에 취직시킴으로써 나치의 희생 생명을 구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대인을 이용해 개인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였다. 클로 박사는 왜곡된 사실로 쉰들러가 독일 역사에 신화로 알려지게 된 것은 쉰들러의 캐릭터를 영웅으로 설정한 영화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자 일부 학자는 쉰들러의 삶에 대해 재고한 후 역사에 남을 기록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러나 " 쉰들러 이야기"를 영화화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대변인은 이렇게 주장했다. 사실이라고 해도 결과적으로 쉰들러에 의해 수용소에 있던 유대인들이 목숨을 이어간 것은 사실이다. 영화는 그 내용에 근거하여 만들어지고 또 명백한 증거가 아니라 일부 증언만으로 한 사람의 업적을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맞서면서 논란은 더욱 확산됐다., 쉰들러가 숨지고 25년 만에 그의 유품 하나가 발견되면서 쉰들러 리스트는 다시 큰 관심을 끌게 된다., 쉰들러의 내연의 처 앙네마리슈테오 가서 보관하고 있던 여행 가방 속에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부터 쉰들러가 사망한 1974년까지 그의 행동을 엿볼 수 있는 문서가 공개됐다. 가방 안에는 보험증서, 신문 스크랩, 사진, 쉰들러 공장의 도면 서류, 그리고 논란이 됐던 그 쉰들러 리스트가 들어있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리스트로 되어있던 것과 달리 실제 쉰들러 리스트는 수많은 리스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공장을 가동한 시기부터 종전 직후인 1945년 5월까지 명단을 일주일 단위, 한달 단위로 끊어 나루 지 너무 경신한 흔적이 있었다.심지어 가방 안에는 쉰들러가 나치와 맺은 거래 계약서도 있었다. 이로써 사람들은 쉰들러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영웅에 대한 상처라는 쪽으로 나뉘면서 그가 진정한 영웅인지 조작된 가짜 영웅인지 관심이 모아졌다.며칠 후 쉰들러리스트의 진실이라며 기자회견을 연 사람이 있었다. 쉰들러의 에밀리 부인이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했다"며 쉰들러 리스트의 실체를 고백했다. 그녀의 기억은 이랬다 1944년 봄, 쉰들러의 공장이 완공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 쉰들러가 집을 비운 사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오고 보니 250여 명의 유대인이 네 대의 마차를 타고 와서 구원을 호소했다는 것이다. 에밀리는 그들을 내버려두면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을 숨겼다. 외출에서 돌아온 쉰들러가 이를 보고"자기 공장에서 일하면 높은 임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그래서 평소 사귀던 나치 당원을 찾아가 뇌물을 제공한 뒤 유대인을 빼돌렸다는 것이다.
그때 공장으로 가져온 유대인 리스트가 바로 " 쉰들러 리스트"라고 한다. 그런데 쉰들러는 유대인이 가지고 있던 금붙이, 시계, 신발과 의류 등을 모두 팔아넘겼고 그 돈으로 유흥을 즐겼다고 한다.또, そのように그렇게 내몰려 밤낮없이 일한 유대인을 돌본 사람은 쉰들러가 아니라 자신이다"라고 주장했다.일부에서는 쉰들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에밀리가 남편의 공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해 허위사실을 알리고 있다며 반발했다.그러나 쉰들러의 가방에 들어 있던 서류와 나치 관련 서류 등을 바탕으로 쉰들러의 행적을 추적한 홀로코스트 연구학자들은 새로운 문서를 찾을 수 있었다.문서에는 독일군의 무력하에서 에나멜 공장에 강제 수용되었다는 당시 유대인의 목소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쉰들러는 독일군이 연합군에 항복할 때 자신의 탈출을 위해 유대인을 무장하고 싸우게 했다. 이때 남은 유대인들은 모두 교수형을 받았다는 내용도 기록돼 있었다.또 전쟁이 끝난 후 나치에 깊이 개입했다는 이유로 쉰들러가 전범재판에 회부되자 공장에 남겨진 약 천명의 유대인에게 쉰들러의 공적을 증언하게 했다.이 증언을 바탕으로 그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기록도 있었다.
그러자 독일에서는 쉰들러 논란에 대해
"부끄러운 과거를 반성하는 기회로 삼겠다“
고 말했지만 홀로코스트 기록을 꺼내기를 원치 않는다고 침묵으로 일관했다.일그러진 영웅 오스카 쉰들러 그에 관한 논란은 지금까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 속에 남은 쉰들러의 이름을 후대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