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지면서 가을을 엮어내는 빛깔들도 하나같이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같은 노란 꽃이라도 봄날 피어나는 복수초의 꽃잎과 단풍이 든 산자락에 무리 지어 흐드러진 산국의 노란 빛이 내 마음을 건드리는 기작(메커니즘)은 좀 다른 듯하다. 가을꽃 빛깔들은 아름답지만 약간의 쓸쓸함, 기품, 거기에 향기를 보탠다. 가을 산행에서 만나는 꽃들은 여전히 설렘을 주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국화과 식물들이 돋보인다. 산국ㆍ구절초ㆍ쑥부쟁이ㆍ고들빼기ㆍ개미취…. 하나하나 불러만 봐도 가을 행복이 가슴에 내려앉는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
안도현 시인의 ‘무식한 놈’이란 시다. 그런데 명색이 식물분류학을 공부한 나는 이들을 구별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누가 물어보면 어찌 대답할까 걱정이 앞선다. 이름에 구절초가 붙은 종류는 여럿으로, 보통 국화잎을 닮은 구절초, 잎이 국화잎보다 많이 갈라진 산구절초, 산구절초보다 잎이 더 많이 갈라진 포천구절초, 이렇게 대략 구별해 말해줄 수도 있겠지만 자연상태에서는 잎의 변이가 연속적이고 낙동구절초와 남구절초까지 함께 두고 생각하면 나는 정확히 구절초 종류를 구별하는 일에 자신이 없어진다.
게다가 국내외 문헌마다 이러한 구절초를 다루는 내용이 조금씩 다르고, 쉽게 배수체와 종간에 교잡이 일어나 이를 통틀어 구절초무리로 결론지어놓은 최근의 구절초류 연구 결과를 보고나니 정확하게 말해야 하는 식물분류학을 공부한 사람의 입장에서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보라색 꽃이 피는 쑥부쟁이류는 식별은 가능하지만, 대답하기가 난처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냥 쑥부쟁이는 일반인들이 흔히 꽃잎이라고 인식하는 길쭉한 꽃(설상화)들이 짧고, 이를 싸고 있는 총포(總苞)와 털이 매우 짧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주로 남부지방에 분포한다. 우리가 산에서 가장 흔하게 만나는 풍성하고 아름다운 것은 갯쑥부쟁이다. 이 종류들은 처음 인식하고 기록할 때 혼돈이 생겼던 것을 후속 연구로 바로잡다보니 이렇게 정리됐다. 그래도 바닷가에서 난다는 뜻의 ‘갯’을 붙인 것은 모순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한때 식물분류학을 공부한 사람 입장에서 “유사하지만 생식적으로 격리돼 있는 서로 다른 종을 구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며, 지구상에 함께 살아가야 하는 종(種)에 대해 존중해야 한다”며 우스갯소리로 “사람과 오랑우탄을 구분하지 않으면 좋겠느냐”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하지만 구절초만 보더라도 자연에서는 구절초류와의 교잡뿐 아니라 노란 꽃이 피는 산국과도 교잡이 일어나는 모습들을 만난다. 풍매화인 참나무 종류들도 다른 종의 유전자가 섞이지 않은 전형적인 개체를 찾아내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니 산길에서 혹은 들길에서 만나는 구절초나 쑥부쟁이 종류들은 일일이 구별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그 까다로운 식별에 갇혀 있지 말고 향기로운 꽃들과 풍광을 마음껏 사랑하고 느끼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다 보면 서로 다른 모습들이 보이게 되고 더욱더 섬세하게 찾아보고 깊이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요즘에는 유전물질(DNA)까지 분석하고 논문 쓰고 해야 하는 식물 전공자보다 야생 식물들을 훨씬 폭넓게 찾아다니고 공들여 아름답게 사진에 담기도 하는 뛰어난 식별 실력을 갖춘 야생화 취미가들이 많다. 최근 학계에 발표된 여러 미기록종이나 신종들은 이런 특별한 실력자들이 발견해 전공자들에게 정보를 제공, 이를 학술적으로 정리·발표한 경우다.
야생화가 막연하게 좋으나 전혀 알지 못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가을 우리 산야에 피어나는 들국화 중에서 흰색의 구절초류, 보라색의 쑥부쟁이류, 노란 꽃이 피는 산국류만이라도 눈으로 알아보고 마음에 담아보길 권한다. 분명 행복해질 것이다.
이유미는…
▲국립수목원장(산림청 개청 47년 이래 첫 여성 고위공무원) ▲저서 <우리 나무 백가지> <한국의 야생화>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 <내 마음의 나무 여행> 등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