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3일 나무날 (음 7.21)
사흘 째 아침.
몸이 무겁다. 그래도 벌떡!
커피를 곱배기로 찐하게 내려 마시고 집을 나섰다.
천지인이 학수고대해 마지않는 오늘은 '고기 먹는 날'.
푸줏간 총각에게 불고깃감으로 돼지고기 열 근 끊어달랬다.
"저 이제 고기 주문 잘 하죠?"
"그러게요. 처음엔 어리버리 하시더니."
"....긍께요잉."
자주 가는 한살림, 우리밀, 푸줏간 등등 사람들은
나를 '사랑어린이집(유치원)' 밥 해 주는 사람으로 안다.
공양간 안에서 쿵쿵 소리가 난다.
혹시 또 그놈(!)들일까 싶어 솜털까지 쭈뼛.
함박꽃이다. 다행.
주말에 먹일 밑반찬 두 가지를 부탁했었다.
연근조림과 콩조림을 맛깔나게 조려왔다.
전라북도 맛(울엄마 손맛)이 났다.
한참 서서 담소를 나눴다.
오늘 아침은 함박꽃이 장수에서 따다 준 홍옥을 먹였다.
토스트에 홍시쨈 발라서 함께.
식빵 다섯 봉지가 깨끗이 사라졌다.
함박꽃의 팁을 참고하여 돼지고기를 재웠다.
고추장 맛이 거시기하여 고춧가루로만 양념을 했다.
고기가 자는 동안 아이들이 들어온다.
# 콩.불. (콩나물 돼지불고기)
오늘 나의 완소 파트너들은 찬솔, 은빈, 어진, 은서, 준서.
여학생들에겐 먼저 깻잎과 고추를 따 오라고 했다.
땡볕에 벌개진 채 바구니 한가득 따서 웃으며 들어온다.
찬솔, 준서는 양파 다듬기를 시켰다.
양파 껍질을 사과 깎듯이 '깎고'있다.
시범을 보여주니 꾸역꾸역 끝까지 깐다.
우리 텃밭 양파가 알감자만 한 탓에 스무 개 넘게 깠을 거다.
준서, 찬솔의 사슴같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매워서).
이래저래 중간에 설거지 거리가 많이 생기는데
그때마다 찬솔이가 가장 가까이 눈에 띈다.
"아, 왜 제 이름만 부르세요?" 애교섞인 투정이다.
"그러게 말이다. 은빈이 이리 와."
"넹!"
콩나물 아홉 봉지, 깻잎, 고추, 양파, 어제 남은 새송이 등등.
채소까지 더하니 양이 장난 아니다. 슬슬 속으로 걱정이...
공양간에서 가장 큰 솥단지를 불에 올렸다.
재웠던 고기를 쏟아부으니 3분의 2가 찬다.
"야, 우리 고기 너무 많이 산 거 아니냐?"
"(다섯 명 합창) 아니예요오~~~"
"좀 남겨둘까?"
"아뇨!!! 다~~~ 먹을 수 있어요!"
"오냐오냐."
어진이가 여리여리한 팔로 볶기 시작.
은서가 잠시 돕다 어디론가 사라짐.
고기가 너무 무거워(?) 나의 힘이 필요했다.
남자인 찬솔이와 준서 둘 합쳐도 내가 세다.
콩나물 뺀 채소까지 더하니 이제 포화상태.
결국 둘로 나눠 볶기로 했다.
콩나물이 산처럼 쌓였다 사라진다.
다같이 중간 간을 본다.
너무 맵단다.
아무래도 내가 고춧가루를 과하게 넣은듯.
갸우뚱. 매운데 싱겁단다. 간장 추가.
또 갸우뚱. 설탕소금 약간 추가.
은서가 장금이 혀다.
은서의 최종 컨펌을 받고 완성.
댕댕이가 볶아서 보낸 참깨 솔솔 뿌려 냈다.
근디...
전교생 먹어도 될 만한 양이다.
또 양 조절에 실패한 초보 쉐프...ㅠㅠ
금강이가 배식구로 고개를 들이밀며 묻는다.
"제니스, 이거 몇 인분이에요?"
"너희들 원없이 먹으라고. (찔린다)"
"야호! 고마워요."
# 맑은 국
황태와 두부(누가 흑두부 두 모를 물에 담가놓고 갔다)로
맑은 국을 끓였다. 마무리 간은 은서와 은빈이가 봤다.
콩불에 심신이 지친 나는 대충 OK싸인.
# 밥
오늘도 한 번도 밥을 안 지어 봤다는 준서 당첨.
아주 신중하게 물을 맞춘다.
줄자가 있었으면 아마 재봤을 거다.
준서는 옆에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가
양념을 쓰자마자 '즉시' 제자리에 갖다놓는다.
(마도로스이신 준서 아빠께 들은 얘긴데,
장기간 항해하는 배 안에선 정전같은 위급상황에 대비,
항상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있어야 한단다.
아빠 발뒷꿈치를 보고 따라 배웠나보다 싶다.)
추가 딸랑거리면 7-8분 있다 줄이랬더니
아예 옆에 앉아 초를 재고 있다.
"아직 2분 50초 남았어요." 뭐 이런식.
그렇게 지은 밥, 정말 훌륭하다.
최근 새 쌀이 들어와 밥맛이 좋아진 것도 있지만,
이제 아이들이 물을 귀신같이 맞춘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썼다는
마이클 폴런의 말로 밥선생 한 말씀을 대신했다.
"진짜 음식은 증조 할머니가 아는 음식,
신선하고 살아있으며, 우리의 오감에게 말을 거는 음식이다."
매워! 매워!를 연발하면서도 안 먹는 아이들은 없다.
다훈이가 중간에 물 마시러 세 번이나 가는 걸 봤다.
(점점 미안해 진다.)
개인적으로 매운 맛을 좋아라하는 나는,
아이들의 위가 아직 약하단 사실을 종종 깜박한다.
다른 아이들이 설거지를 거의 마칠 때까지
홍빈이는 비벼놓은 밥을 반도 못 먹고 있다.
매운 걸 못 먹는단다.
억지로 먹진 말라고 해도 다 먹겠단다.
고개를 푹 숙이고 먹고있다.
그걸 본 은서, "내가 먹어줄까?"
설마했는데 진짜 홍빈이 그릇을 가져와 싹싹 긁어먹는다.
양도 양이지만 사춘기 여학생이 다른 오빠가 먹던 밥을
아무 거리낌없이 먹어주는 은서의 '흑장미 매너'에
놀라움과 사랑스런 맘이 동시에 올라왔다.
물론 콩불의 1/3 이상이 남겨졌다.
설거지하려다 돌아선 어진이, "더 먹고싶다."
다시 젓가락을 가져 와 고기 몇 점을 더 집어먹는다.
기름기 설거지가 산처럼 쌓였다.
투덜투덜하면서도 찬솔이가 끝까지 마무리 한다.
바닥 청소까지 마무리하니 한 시 반.
에고, 울애기들 진짜 애썼다!
두 시부터 밥상 모임과 이야기 나누기.
작은별, 은하수, 댕댕, 푸른솔, 고슴도치가 함께 했다.
(가위바위보로 뽑힌 기록자 이령이가 자세히 올려 줄거다.)
기억에 남는 이야기,
"고기가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공양간 해가 안 들어오고 조명이 너무 어두워요."
"환기가 안 돼 답답하고 더워요. 선풍기 좀 달아주시면.."
"소고기 뭇국 나왔다고 그 주에 고기 반찬 안 해 준 건 정말..."
"된장 고추장이 맛이 없어요."
"1식 3찬이 원래 김치와 국은 뺀 거 아닌가요?"
"콘플레이크를 다시 먹게 해 주세요."
(1학기때 콘플레이크 분실사건 이후 금지시켰었단다)
"조개류는 못 먹어요."
"메뉴가 안 바뀌면 좋겠어요. 특히 기대했던 메뉴가 사라지면..."
"현미밥은 괜찮아요. 그래도 흰쌀밥 한 달에 한 두번 해 주면.."
"간식 좀 주세요."
"남는 반찬이 다음 끼니 주 반찬으로 다시 나오는 건 쫌..."
(이 말에 홍빈이가 '왜 그런지 학생들 스스로 생각해 보자'고 했다)
'법륜스님 통일이야기' 행차 관계로 일찍 나서야 해서
저녁 밥모심은 초간단 메뉴로 변경 (선택의 여지도 없었지만).
남은 콩불에 밥을 볶고, 남은 무국과 황태국을 끓여냈다.
예정에 없던 '달걀후라이' 특별 써비스까지.
밥상 모임 마무리 땜에 일러만주고 못 가봤는데,
오늘 밥 친구들이 알아서 척척 해 놨다.
아이들도 대만족한 눈치다.
"오늘 이야기 나누고 나니 어땠어?"
"좋았어요."
밥 먹다말고 다들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일기를 마치려니 은서 말이 맴맴 돈다.
"남이 해 준 밥 먹을 땐 솔직히 별 생각없었는데
오늘은 (콩불 속에 든) 깻잎 먹으면서 '이게 어떤 깻잎인데.
내가 아침 땡볕에 땀 뻘뻘 흘리며 딴 거다'하는 맘이 들었어요."
(오야아~~)
법륜 스님 강연회에서 '권지원' 당첨되어 (다섯 명 추첨)
<새로운 100년, 오연호가 묻고 법륜스님이 답하다> 싸인본을 받았다.
우리 식구들 박수치고 춤추고 난리났었다.
이래저래 오늘 땡잡은 날이다.
첫댓글 살아있는 제니스 글 덕분에 아침이 즐겁습니다.
감사, 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