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고등학교 반창회 모임 자리에서 진주 박물관에서 문화재 해설을 하는 明甫 金榮述 동기로부터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 복사본 그림을 선물 받았다. 세한도(歲寒圖)의 해설이 수록된 글까지 첨부된 귀한 선물이다.
세한(歲寒)이란 말은 논어 자한(子罕)편에서 연유된 말이다.
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 (자왈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
추사는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외국문물을 자주 접하여 견문을 넓혔고, 중국학문과 서예와 그림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출세가도를 달리던 김정희는 암행어사, 예조 참의, 설서, 검교, 대교, 시강원 보덕을 지냈고 효명세자가 대리 청정하던 시절에 아버지 김노경과 함께 세자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830년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를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로 고금도에 유배되고 말았다. 이것은 김우명이 비인 현감 시절 김정희로 인해 파직된 것을 잊지 못하여 일으킨 모함이었다. 그러나 순조의 배려로 곧 김노경은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로 복직되고, 김정희도 1836년에 병조 참판,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하자 다시 10년 전의 윤상도 사건을 문제 삼아 김정희를 제주도로 유배 보낸다.
조선 헌종 6년(1840) 10월 1일부터 헌종 14년(1848) 12월 6일까지 9년간 제주도에 유배생활을 한다. 유배 생활을 하던 중 그린 그림이다. 그림을 그린 계기는 이러하다.
김정희가 귀양살이 하는 동안은 죄인 신세이니 그를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있어서 찾아 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역모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의 제자인 이상적(李尙迪)은 통역관인데 중국에 갔다 올 때마다 귀한 책자를 구해와 전해주곤 했다. 잊지 않고 찾아오는 제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세한도를 그리고 그림의 끝 부분에는 자신이 직접 글을 썼다.
이 글은 사제 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답례로 그려 준 것임을 밝혔다. 이 그림에 내포된 의미는 "모름지기 선비는 권세가 있을 때나 힘이 없을 때나 똑같은 인품을 지녀야 한다."는 것으로서 이상적의 인품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상적도 추사의 그림을 받고 매우 기뻐했다. 감격한 마음과 사연을 적어 세한도 옆에 붙이고, 그것을 중국에 가지고 가서 명사들의 소감도 받아 함께 첨부하여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었다. 이 그림이 바로 국보 180호 세한도다.
일본으로 넘어간 세한도를 되찾아온 손재형의 일화는 감동적이다
1940년대,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는 옛 유물이 마구 거래되는 암흑기였다. 이때 추사 김정희를 흠모하는 일본의 한 학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후지쓰카 지카시'교수다. 그는 김정희의 수많은 작품들을 수집하는데 노력했다. 1940년 초반, 경성제국대학에 동양철학 교수로 있던 후지쓰카 지카시는 경매에 참여하여 마침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그림을 손에 넣었다.
그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선의 고서화 수집가 손재형은 어떻게든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찾아오고 싶었다.
손재형은 후지쓰카 지카시 교수에게 접촉하여 김정희의 세한도를 넘겨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후지쓰카 지카시는 추사 김정희가 좋아서 수집한 것이므로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넘겨줄 수 없다고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그리고 1944년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국보급 유물을 넘겨줄 수 없었던 손재형은 거액의 자금을 마련해서 일본까지 찾아갔다.
그 때 일본은 연합군의 공습에 의해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 손재형은 위험을 각오했던 것이다. 찾아갔을 때 후지쓰카 지카시 교수는 쇠약해 있었다. 하지만 세한도를 사겠다는 부탁에는 냉정했다. 손재영은 그래도 아랑곳 않고 석 달이 넘도록 끈질기게 문안을 갔다. 손재형의 끈기와 정성에 마침내 후지쓰카 지카시도 감복했다. 후지쓰카 지카시는 세한도를 손재형에게 넘기면서 진정으로 세한도를 보관해야 할 주인은 당신임을 알았소. 라는 말을 남기고 별다른 대가 없이 주었다는 것이다.
손재형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그림을 양도 받아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얼마 후 연합군의 공습에 후지쓰카 지카시의 집이 불타버렸다. 그가 수집했던 추사 김정희의 다른 작품들도 많이 불타버렸다. 하마터면 우리의 문화재 세한도가 한줌의 재로 변할 뻔 했던 것이다.
영화의 장면처럼 극적인 순간을 넘기고 한국으로 돌아온 세한도지만, 그 후에도 역경은 계속되었다. 손재형이 정치에 발을 딛게 되면서 자금 압박을 받게 되고 끝내 고리대금업
자에게 담보로 넘어간다. 결국 손재형은 소유권을 포기하고 만다. 그것이 수장가 '손세기'에 의해 인수되어지고 그것을 중앙박물관에 의탁 보관하게 함으로써 지금에 이르렀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소전 손재형이 최초로 "서예"라는 말을 만든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 전엔 서예를 글 쓰는 법이라 하여 서법(書法)이라고 했었지만, 손재형 이후엔 글 쓰는 예술이라는 뜻인 서예(書藝)라고 하게 되었다. 는 것이다.
뒷이야기로, 후지쓰카 지카시의 아들들은 남아 있던 김정희의 작품들을 한국 정부에 기증했다. 그 아버지에 이은 아들들의 선행이다. 일본인이지만 우리가 본 받을만한 인물들이다.
세한도에는 상대가 권력이 있든 없든 한결같은 마음 자세를 가진 이상적,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그림으로 표현한 김정희, 끈질긴 정성을 인정할 줄 아는 후지쓰카 지카시, 우리 문화재를 사랑하여 보존하려고 노력한 손재형, 함께하는 소중함을 실천한 손창근의 이야기가 한 폭의 그림 안에 모두 담겨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그림은 유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마음이 응축된 예술품이다.
집에 걸어 두고 그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내포된 의미도 가끔 생각해 볼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