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생각
슬픈 생각을 따라 가다보면
나는 기차가 되어 있다
몸이 길어지고 창문의 큰 눈이
밖으로 멀뚱히 뜨여있다.
나는 길고, 달리다 보면 창밖으로
식구들이 보인다.
어쩌자고 식구들은
추운 민들레처럼 모여 플랫폼에서
국을 끓이고 있는지 내가 지나가는데도
나를 발견하지 못하여 기다리고만 있다
나는 슬픈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네가 서 있는 곳을 지난다
푸르지 않은 짐가방처럼 너는 늘 혼자다.
내가 가려던 소실점 같기도 하고
신호등 같기도 한데
나는 너를 지나친다
그러면서도 너는 아주 많이 늙어서
내 할아버지만큼 오래 살아서
그런데도 네가
나의 사랑인 것을 쉽게 알아본다
슬픈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친구들이 건너지 않는 건널목을 지나고
하늘이 파래서 조각조각 깨지는
어느 자오선의 가장 뜨겁고
아름다운 부근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지나온 곳들이
나의 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빗방울들이 금세 차창 가득
별처럼 와 뒤덮히고 나의 차오르는 눈물이
내 몸의 일생을 지나는 것을 지나친다
슬픈 생각을 따라 가다 보면
당신들의 육체를 길게 관통하며
강을 건너가고
바다의 슬픔을 건너 내가 되어가는 것을
알게 된다.
-《작가세계》 2012년 봄호
가설무대
밤의 골목 끝
수화기를 든 여자는
공중전화기를 붙잡고 흐느끼고 있었다
오직 깨질 듯 밝은 전봇대 등빛이
둥근 무대 위로 여자를 올려놓고
여자의 슬픔은 만천하에 고하여지도록
장치되어 있는 잔인한
밤의 익살을 벗어날 수도 없이
붙들렸다 이렇게는, 더는 살 수 없어요
노골적인 눈물은, 덜컥덜컥
숨이 멎을 듯 동전을 삼켜 버리고
무대로 올려진 소품처럼
여자의 다리를 부둥켜안은
아이는 고양이같이 가느다랗게 울었다
빛의 중앙, 양파처럼 발가벗겨진
매운 슬픔의 전류는
공중전화에서부터 흘러나와
날벌레 같은 빗줄기가
휘둥그레 갓등 주위에 뿌려지고
한사코 어둠의 일원으로 숨죽인 행인들은
저마다 하나씩
암전된 사연의 동전을 꺼내어보다
조심스레 여자로부터
아이로부터
빛나는 슬픔의 무대로부터
그치지 않는 비의 장막 사이로 멀어져 가는 것이다.........,
네잎 클로버
언젠가 나는 네입 클로버를 몹시 갖고 싶었던 적이 있다. 네잎 클로버만 찾을 수 있다면 마술처럼 행운이 내게로 다가올 것 같았다. 그러나 한때 네잎 클로버를 찾아 헤맸던 사람들이 다 그러했듯이 나 또한 세잎 클로버밖에는 만나지 못했다. 전에 살던 집 근처 시장에 들렀다가, 골목 끝 담벼락에서 커다란 벽보를 발견했다. 그 벽보는 2절기 크기였고 비에 젖지 않도록 비닐에 쒸어져 녹색테이프에 붙여져 있었다. 거기 쓰인 글씨가 커다랗게 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애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떡 총각 올림' 거기에 호떡 파는 리어카가 있었던가? 이사한지 6개월이 넘었고 호떡집이나 떡볶이, 붕어빵 리어카는 시장에서는 흔한 것이었다. 허리굽혀 인사하는 귀여운 만화 인물까지 그려진 벽보 한 귀퉁이에는 또 다음과 같은 글이 덧붙여 있었다. '네잎 클로버 꽃말은 행운이고, 세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입니다. 행복하세요!' 당선사례도 아니고 신장개업도 아닌 호떡 리어카 주인의 폐업 벽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가, 그의 마음이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었다.
그래, 행운은 네잎 클로버처럼 얼마나 찾기 어려운 것인가.
하지만 행복은 세잎 클로버처럼 얼마든지 우리 주변의 찾기 쉬운 곳에 있는가? 다만 그 행복을 발견할 줄 아는 마음의 눈이 필요한 것이리라. 그래서 그 호떡 총각은 눈에 띄기 쉬운 세잎 클로버처럼 담벼락에 커다랗게 , 행복을 발견하기 쉽게, 붙여놓았나 보다. 그 멋진 호떡 총각
얼굴이라도 자세히 봐둘 걸.
난 아직 행복을 발견하는 눈이 부족한 건가.
이 햇빛
나에게 닿는
이 햇빛은 얼마나 멀리서 왔는가,
이 빛의 실마리 끝을 잡아 리본을 묶어서
다시 놓아준다
햇빛은 처음 시작된 곳으로 되감아지고 있는 중이다
그것이 돌아가기까지 얼마나 먼 거리인가
나는 나의 자리가 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는데,
죽을 줄 알면서 태어난 별까지
날아가고 있는 중이다.
나의 돌아갈 길이 그렇게 먼 것이
그 선물이 무엇이었는지
두고 온 상자의 리본은 끌러보지도 못하였는데,
우리는 날아가며
네가 놓아준 빛을 우연히 조우할지도 몰라서
저 태양에는 내 묶은 리본 하나가 아주 작게 있을까
순간이 걷히어가는 저 먼 거리까지
다시 묶어주고 작별인사를 하며
나는 가난한 나라의 아이가 보내온 성탄엽서 한 장처럼
멀리 우주로 팔랑이며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