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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리가 되지 않으려면
- 진주 의료원 폐쇄를 찬성하며
#1. 씨름 선수로 유명했던 이만기씨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
어릴 때 감을 따러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나무가 부러지는 바람에 떨어져서 잠시 정신을 잃은 적이 있었단다.
아이들이 단숨에 집에 달려가서 어머니께 고하였다.
‘만기가 나무에서 떨어져서 죽었어요.’
이 말을 듣고 어머니는 몽둥이를 들고 달려나오셨다.
어렴풋이 정신이 들어 실눈으로 바라보니 어머니가 몽둥이를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맞아죽겠다 싶어서 얼른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꽁지가 빠지게 도망갔단다.
나중에 들으니 어머니는 나무에서 떨어져 병신으로 평생을 사느니 차라리 패 죽이는 게 나을거라 생각해서 그랬단다.
#2. 역시 티브이에서 본 이야기
김치 명인으로 유명한 강순의씨가 신혼 시절, 남편의 무관심과 외도에 지친 나머지 눈물을 머금고 아이를 업고 작은 보따리를 이고 친정을 찾아갔단다.
친정이 충남 어드메로 멀어서 버스를 타고 다시 걸어서 어둑해서야 친정집에 다다랐단다.
배도 고프고 섧은 맘에 ‘엄마!’ 부르며 찾아갔더니, 어머니는 바로 부지깽이를 들고 나오셔서 동네사람이 알면 딸이 소박맞아 왔다고 소문난다며 방에 들이지도 않고 쫓아내셨단다.
다시 울며 밤을 도와 집에 왔더니 남편은 그간 여편이 나갔다온 것도 몰랐단다.
#3. 어떤 이야기 한 토막
지하철 입구에서 구걸을 하는 거지가 있었다.
마음 좋은 청년은 매월 월급 때만 되면 그 거지의 깡통에 만원씩을 적선했다.
그러다 다음해에는 오천원씩, 그리고 그 다음에는 천원씩으로 줄였다.
어느 날 거지가 말하였다.
‘당신은 첨엔 만원씩을 주더니 다음에는 5천원, 이제는 천원씩으로 주는 이유가 뭐요?’
청년이 대답했다.
‘첨엔 총각이라 여유가 있어서 만원씩을 드렸지만, 다음에 장가를 가고 이제는 아이도 생겨서 지출을 줄일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에 거지 왈,
‘그럼 당신은 내 돈 가지고 먹고살고 아이를 기른단 말이오?’
#4. 화엄경에 나오는 이야기, 오소리 꽃신 이야기
숲속에 원숭이와 오소리가 살고 있었지요.
어느 날 원숭이가 예쁜 꽃신을 만들어서 오소리에게 주었지요. 공짜로.
오소리가 꽃신을 신어보니 예쁘기도 하거니와 발도 아주 편해서 참 기분이 좋았지요.
꽃신을 신다가 헤어지면, 원숭이는 어김없이 꽃신을 만들어 주었답니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달, 이번에는 원숭이가 오소리에게 꽃신을 만들어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오소리는 꽃신을 신을 줄만 알았지 만들 줄은 몰랐고, 또 신을 신지 아니하고 맨발로 걸어보니 그동안 굳은살이 다 얇아져서 도저히 맨발로는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오소리가 원숭이에게 바나나를 따다 바치지 않으면 신발을 만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더 해서 날이 갈수록 원숭이가 요구하는 바나나의 갯수는 늘어갔고, 오소리의 생활은 그만큼 더 고달파졌답니다.
위의 네 장면은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가 많습니다.
#1.과 #2.는 실화에 근거한 것이고, #3.과 #4.는 물론 허구입니다.
#1.과 #2.는 우리 또는 우리 선배들이 실제로 교육 받아온 그대로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내리사랑이로되 무조건적인, 맹목적인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잘못되거나 어김이 있는 경우에는 매를 아끼지 않은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기에, 우리 세대는 어른을 알고 부모를 공경할 줄 압니다. 그런 교육이 오늘 날 대한민국의 발전에 크나 큰 외연(外延)이 되었지요.
모바일이 없으면 잠시를 버틸 수 없으며, 길을 가도 손가락 장난이요 이어폰이 꽂혀있어야하고, 아니면 냉커피나 청량음료에 빨대를 꽂아 들고 다녀야 하는 지금 세대들이 이해 못하는 세대가 우리 세대지요.
박범신의 말 처럼 심하게 표현하면, 모바일 비용이나 커피값을 아비의 등에 빨대를 꽂아 넣고 빨아먹는 새대가 지금의 젊은 새대지요. 상당수의 여편들도 그러합니다. 내 마누라를 포함해서.
#4.는 편안함과 사치함만 좇고 원천 기술이나 지식을 익히지
못하면 장차 남에게 예속(隸屬)되고 그 삶이 고달파진다는 그런 교훈입니다.
개인이나 한 나라나 다 같지요.
여기에 대하여는 길게 쓰지 않으렵니다.
저마다 한번 깊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3.입니다.
거지 생활에 익숙해진 그 거지는 거지근성(The bagger)에 쉽게 익숙해지고 맙니다.
그리고 드디어는 그 청년이 한때 주던 만원이 자기가 당연히 차지해야하는 몫으로 착각하고, 그 청년이 자기의 만원중의 일부를 착취한 것으로 여기는 어이없는 망발을 저지르고 맙니다.
작금 국가나 사회의 가장 큰 이슈는 복지 - 개인 복지와 사회 복지입니다.
원래 복지는 좌파적 개념이었으나, 이제는 보편적 사유가 되어, 정권을 먼저 잡은 박근혜정부가 경제 성장을 우선적으로 들고 나오지 아니하고 좌파적인 복지를 들고 나오자, 민주당에서는 공 빼앗긴 축구 선수가 되어 허둥대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지에는 두 가지 큰 원칙이 세워져야 합니다.
하나는 보편적 복지에 대한 타당성의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복지를 시혜(施惠)함에 소요되는 자금의 투명성, 공익성, 공평성이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지를 잘못 이해하면, 쉽게 얘기해서, 누구 것을 빼앗아서 남을 주고, 또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준다, 또 누구에게서는 많이 앗아가고 나보다 더 나은 사람에게서는 적게 가져간다 - 이런 식의 불만이 표출되기 십상입니다.
그리도 또 하나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시혜 (좋은 말로 하면 사회복지 혜택)를 받아온 사람은 내가 위에서 지적한대로 그 ‘받는 것’에 대한 타성에 젖게 되는데 큰 문제가 있습니다.
맹자(孟子)는 양혜왕(梁惠王)편에서 말하기를 무항산즉 무항심(無恒産卽 無恒心)이라 했지요. 즉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일정한 가치관을 가지고 도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직업이 없는 젊은 이들이 중놈의 연장 놀듯 놀면서, 생각해내는 것이 오락이요 향락, 그리고 한탕 이지요.
그래서 각종 범죄를 저지르게 되고, 그러기에 젊은 이들에게
알맞은 일자리를 창출해 주는 것은 최고의 복지입니다.
그러나 나이들고 병이 들면 사회 복지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노후를 대비하여 적당히 축적해놓은 경우는 예외이지만, 우리 세대는 부모님 봉양하고 아이들 가르치고, 그 후에도 등에 박힌 빨대를 어쩌지 못해서 노후를 대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요. 우리보다 십여년 선배분들은 더 형편이 어려웠을 겁니다.
이러한 세대들을 위하여 의료 복지가 사각(死角)에 놓여있던
1970년대에 각 도(道)에, 혹은 큰 시군에 하나씩 지어놓은 의료시설이 의료원이었습니다.
참으로 필요한 시설이었고, 그로인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흘렀고, 국민 개보험(皆保險)이 시행된지도 30년이 넘었고(’77년), 의약분업이 실시된 것도 2000년 8월 부터니 벌써 14년이 지났습니다.
혜택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암환자는 약값의 5%만 내면 되고 (백만원 짜리 약을 5만원만 냄), 생활 보호 대상자, 차상위 생활자는 아예 약값과 진료비가 없거나, 있어도 500원이나 천원이면 몇 달치 약도 투여받을 수 있습니다.
더 형편이 어려운 경우에는 유무상으로 지원되는 요양시설이 전국 도처에 산재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의료원이 소용이 없어졌습니다.
실력이 별로거나 진료과목이 맞지를 않아서 개업을 못하는 의사들의 직장이 되었고,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으므로 쫓겨날 걱정이 필요없는 직원들의 밥벌이터가 되었고,
장례식장이나 운영하여 겨우 수입의 일부를 해결해나가는 척하는 그런 의미 밖에 없는 의료원이 된지 오래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재정자립도가 형편이 없는 지자체들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아닌, 문짝 열린 금고에 돈채워 넣기에 수십년을 시달려왔고, 그 시달림이 언제 끝이 날 줄 모르기에 더 골머리를 감쌉니다.
드디어 올해 강원도 의회에서는 의료원 지원 예산 심의를 중단했더랬습니다. 그러고는 각 의료원의 회생책을 제시하라고 요구했지요. 결말은 민주당 넘들과 노조원들의 농성으로 유야무야된 모양입니다만, 이런 것은 전국적인 현상이고, 이 현상의 끝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중에 경남지사 준표가 진주 의료원 폐쇄라는 칼을 빼들었지요.
참으로 잘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강성 노조넘들은 환자의 선택권이란 가면을 쓰고 제밥그릇 달아날까봐 당연히 농성에 들어가고, 공을 잃어버린 민주당 넘들은 공 대신 돌을 차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제가 찬 돌이 공중에 떴다가 다시 제 머리에 떨어짐은 생각하지도 않지요.
그넘들 세비를 빼앗아서, 혹은 자진 헌납해서 의료원 빚 갚는데 보태라 한다면 참으로 정의롭다 하겠으나, 난 그런 넘은 한 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포퓰리즘의 극치이지요.
적자는 나라에서 보태준다고 합니다. 언제나 그렇게 해왔습니다.
거의 공짜로 지어가는 약값도 나라에서 대준다 합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발상이지요.
나라라는 단체가 어디 따로 있는가 봅니다.
나와 너가 모이고 너희와 우리가 모여 나라라는 이름으로 모여 삽니다.
내가 내고, 당신이 내고, 식당에서 내고, 기업체에서 내는 돈이 모여서 나랏돈이 됩니다.
이걸 망각하면 안됩니다.
나는 내가 내는 적은 돈의 세금이나마 그 일부가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의료원 노조넘들의 밥숟가락에 담기는 것은 반대하기에 이 글을 씁니다.
노조가 농성에 앞서 세월만 가면 호봉이 올라가는 그런 방만한 경영에 대하여 통렬히 반성하고 (100원 수입에 107원을 인건비로 지출-강원도), 의료의 질과 서비스를 개선하여 스스로 고객을 창출하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지팡이 없이도 일어서고 걸을 수 있는 의료원이 된다면, 어떤 시러베 아들놈이 나서서 의료원을 폐쇄하라 하겠습니까?
癸巳 5月 下旬 豊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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