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XX씨?" 진료실 커튼 밖에서 의사가 불렀다.
"네." 나는 인턴이 시키는 대로 커튼 안에서 웃옷을 끌어올린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늘 느끼는 일이지만 인턴들에게서는 조금의 여유도 찾아볼 수 없다. 이번에도 몸무게를 대라는 그녀에게 몸무게를 말한 다음, 어젯 밤 잔뜩 먹고 자서 3킬로 정도 늘었을지도 모른다고 농담을 던졌다가 "알고 있는 몸무게를 대시라니깐요."하는 매몰찬 대답에 머쓱해져 있던 차였다.
"5년 됐네." 커튼 틈새로 밖을 내다보았더니 의사는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커튼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왼쪽 가슴과 오른쪽 가슴을 꼼꼼하게 만지더니 쇄골 부분도 차근차근 만져보았다. "왼쪽 가슴에 멍울이 있는데 그건 정상이니 걱정 말아요. 이제 헤어집시다. 다른 의사들이 뭐라고 했는지 좀 보고."
"복원 수술 하는게 어때요? 올해부터 보험이 될거라고 대통령이 말했는데." 그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모니터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내게는 한쪽 가슴이 없다. 5년전 전절제를 했다. 오른쪽 가슴 전체를 잘라낸 것이다. 당시에는 복원 수술이란 생각하지도 못했다. 큰 수술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야 하니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가슴이 없어서 겪은 불편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브래지어에 다른 것을 넣기는 하지만 옷밖으로 드러나는 실루엣은 누가봐도 어색할 정도로 티가 난다. 가끔 속엣것이 빠져나오기도 하고 단단히 꿰맨다고는 하지만 옷밖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여름에는 더워서 겨울에는 추워서. 게다가 옷은 항상 왼쪽으로 쏠려 있었으니.
"올해부터 보험이 된다고요? 그럼 기다렸다가 할게요." "그래요. 언제건 연락해요. 해줄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의사는 특유의 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인사를 하고 옆방으로 가버렸다. 진료실 두개를 한꺼번에 쓰는 의사, 환자들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으면 들어와 모니터를 보고 진찰을 하고 몇 마디 한 다음 훌쩍 떠나가는, 아마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듯한 의사였다.
그럼에도 그에게 불평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게시판에 올라오는 질문에 늘 직접 대답을 해주었던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태도 때문일까? 그에게서는 무언가 진지함이 묻어났다. 그는 절망을 말하지 않았다. 언젠가 몸이 너무도 시원찮아 도저히 평시로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물어본 적이 있다. 늘 무거웠고 기운이 없었으며 수술한 자리는 끝없이 쑤셔댔고 손은 덜덜 떨리던 때였다. 그때 그는 그게 말이나 되느냐는 태도로 대답을 했다.
"물론 일해야지요. 안하고 뭐하게." 너무도 당연한 일을 묻는다는 듯한 그의 태도가 내게 무한한 용기를 주었다. 쉬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사람들의 이야기와는 정 반대였으므로. 사람들은 암은 소모성 질환이라고 강조했고 일을 하면 큰일난다고 더 쉬라고 힘을 주어 말하곤 했다. 그랬는데 이 전문가는 병은 몸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고 암은 일상에 지장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포기하려던 마음을 접었다. 물론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계속 했을 테지만. 그건 열심이나 욕심이 아니었다. 그건 긴 고민을 거쳐 도달한 결론이었다. 그리고 오늘에 와 있는 것이었다. 작은 보잘것 없는 존재지만.
복원 수술을 하자는 그의 말에 신뢰가 갔다. 5년간 아예 거론하지도 않던 의사가 그 말을 한다는 것은 이제 때가 되었다는 뜻일까? 때로 의사의 한마디는 큰 용기를 준다. 이번에는 헤어지자는 말로 또 다른 용기를 주고 있었다. 헤어지자는 말, 그 말은 다시는 자신을 보러 올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진료실 밖으로 나와 앉았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 저 여인들, 그들도 나와 같은 과정을 거칠 것이었다. 아니면 이미 거쳐간 사람들인지도 몰랐다. 간호사가 내 준 처방전에는 암 생존자 클럽에 관한 안내가 적혀 있었고 일 년 후 다른 의사를 만나라는 안내 사항이 적혀 있었다. 그러므로 완치다. 아니 그들의 표현대로 생존자다. 물론 앞으로도 여전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암 생존자 클럽에 가입한다는 것은 지금 이대로 살아가면 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의 방식대로...일하면서 가정을 돌보면서, 그리고 좋아하는 무언가를 즐기고 향상을 위해 노력하면서.
첫댓글 축하드립니다.
더욱 건강한 한 해가 되실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보람있는 한해가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누군가에게 다리가 되는 그런 한해.
우리 사는 세상이 거대한 생존자 클럽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참고 견딘 만큼 그에 합당한 푸짐한 선물이 주어지기를 또한 소망합니다. 오랜만에 정독하는 사이 댓글 1순위를 가로챈 장산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조강님... 감사해요..
그리고... 행복하세요. 2015년 내내....
거대한 생존자 클럽, 모두가 각각의 독특함으로 그리고 다른 이의 독특함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기를, 그리하여 그 차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멋진 하모니를 이루어가기를 희망합니다. 받은 만큼 푸짐한 선물을 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받아들였던 모든 것들이 물줄기를 이루어 흘러나가기를 희망합니다.
I see you~!! ^^
언니, 기다리고 있어용. 속히 가입하시와용.
이명님은 완치되셨습니다. 좋은 글 많이 쓰셔서 이웃들에게 선물을 주셔야지요.
아. 고맙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나이를 의식하게 되면서 그 나이가 부끄럽지 않은 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인식의 세계에 대한 눈을 틔워주는 다리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른 이들에게서 받은 것ㅇ처럼.
읽는 내내 좋았지만 특히 앤딩 부분.... 박수와 갈채를 (짝짝짝 ^^ ) 건강을 빕니다.
앗. 고맙습니다. ^^
정말 정말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