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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학 칼럼 2>
운명적인 ‘에세이소설의 길 찾기 해법’
- 홍성암 소설가, 그「불면증」의 예술혼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본지 편집고문)
1. 대자적 삶과 에펠 레이션(命名)
그렇다. 21세기 문화의 융복합 시간대에서 오랜 날 평자 그 나름으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예술에는 국경이 없지만, 예술가에게 조국(祖國)이 있음’을 어설프게나마 일관되게 역설해 왔다. 까닭에 한 사람의 충직한 독자로서 ‘문학작품의 의미와 구조 및 가치, 작가의 세계관 등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평가하고 분할·통합하는 작업에 끊임없이 의식의 날(刃) 푸른 비판 정신의 종사자로서 인간 실존의 혼성과 미완의 디아스포라(diaspora)를 전재한 지극한 향토애의 발화와 서사구조는 끝내 시사적(示唆的)이다. 모처럼 격조 높은 예술혼도 그렇거니와 한 해의 지평이 열리는 벽두(劈頭)에 에세이(essay)소설집인『불면증』(도서출판 비움과 채움)을 들고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선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인 홍성암 작가는 ‘천년 그 하슬라(何瑟羅) 땅’으로 ‘솔 내음, 바다 내음, 커피 향’이 짙은 문향(文鄕) 강릉(江陵)태생이다.
일단 개념상의 불면증(不眠症)은, 적절한 환경과 잠잘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도 2주 이상 잠을 설친다. 일반적으로 불면증 환자는 잠들기 힘겹고 야간에 자주 깨거나, 새벽녘에 일어나 잠을 설칠뿐더러 ①일시적 ②단기 ③장기 혹은 만성 불면증’으로 구분됨은 유념할 점이다. 또 한편 그 자신과 평자는 아득한 유년 시절에 연(緣)이 닿아 같은 교정에서 어진 스승과 만남도 주어졌으며, 1980년『월간문학』, 1981년『현대문학』추천으로 50년 남짓한 시간대를 만보(漫步)하며 줄곧 소설에 관한 집념을 불태워 왔다. 모름지기 작가는 전지성(全知性)을 지닌 연유로 다양한 인물의 등장에 초점을 옮겨가며 상황을 서술할 수 있기에 작품 속 인물의 성격 분석과 파악은 작가의 주제나 세계관에 관한 해명과 결속(結束)은 일체의 타당성이 주어진다.
특히 현재는 고향을 떠나 경기도의 도시공간에 몸담고 있지만, 애향심이 남다른 그 자신은 대학강단을 지켜오며 동덕여대 총장직 대행을 역임한 이후, 지연(地緣)과 학연(學緣)이 잇닿은 이들과 당시 회장을 맡아 간행한『강릉 가는 길』제5집(2013)의 기고인「시인 김동명(金東鳴)」에서 “김동명문학관이 세워지는 것을 계기로「김동명학회」도 조직되었다. 첫 번째 회장으로 관동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시인인 엄창섭 교수가 추대되었다. 엄교수는 우리『강릉사랑문인회」의 주요 임원이다.”에서 지적했듯 타자 간의 작은 배려가 그 자신의 온전한 심성(心性)이다. 이처럼 화자(話者)가『불면증』의 서문격(序文格)인「에세이소설의 장르적 의미」에서 “ ‘에세이소설’이란 문학적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해 수필적 서술에다 픽션의 적절한 활용을 추가하는 모양새다. 그리하여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을 극단적으로 객관화하여 모든 인류의 체험으로 공유하는 과정에서 공감을 이끌어내게 된다. 내 체험이 인류의 전통으로 전승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우주의 공간과 과거부터 전승되는 전통의 관습까지 모두 수용하고 보편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라고 피력하고 있음도 가늠할 점이다.
각론하고 삶의 일상에서 소설의 장르를 융복합으로 처리한 소설집의 편집 구도는「1부(수필, 꽁트 형태를 띤 소설작품)-강릉 남대천의 은어떼 외 34편, 2부(심리소설과 전기소설)- 한 줄기 햇살이 되어 외 12편. 장르 경계 허물기와 에세이소설 (김봉진 문학평론가)」는 결(結) 고운 옷감처럼 직조되어 그 존재감이 빛난다. 아울러 그 배경 묘사의 설정은 생동하는 존재로 구명되기에 인물의 설정에서 사실성과 연계성은 비교적 1920년대 일본의 ‘사소설(私小說)’ 형식에 맞먹는 경향의 소설로, 작가 자신의 체험과 내면을 자전적(自傳的) 내용으로 구도 처리하여 ‘작가의 체험과 감정, 인간관계, 심리적 고뇌 등도 그렇거니와 주로 작가의 고백과 반성, 자기 폭로가 스토리(story)화 되는 특이성의 추이(推移)임’은 응당 지켜볼 점이다.
까닭에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행위는 문학사가 내용을 다루는 인물전시장에 몇 개의 새로운 초상을 부가시키는 일이다."라는 그릴렛(A. Robbe Grillet)의 역설이나 혹여 등장인물의 에펠레이션(命名)을 통한 성격의 파악과 서사구조, 그리고 방법의 추이는 관심의 대상이다. 모처럼 그 자신의 실험소설에서 “에세이와 소설을 결합시킨 ‘에세이소설’이 우리 소설의 폭을 넓히는 길이 될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흐름으로 지속되다가 끝나게 될 것인지는 작가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독자들의 호응 여부에 달려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라는 김봉진 문학평론가의 이 같은 의중은 지극한 관심사(關心事)로 함께 공감하고 분별하여야 한다.
2. 사건 전개 양상과 감정의 절제
일반적으로 작중 인물의 유형은 다소 미셀러니(miscellany) 경향의 보편적이고 상투적인 유형이기에 긴장감보다 따뜻한 정감을 안겨준다. 따라서 의도적이나마 사건 전개의 추이(推移)를 지켜보며 발단과 결말 부분을 분할·통합하면 작품의 틈새 좁히기와 길 찾기의 심층 작업은 뜻깊다. 모처럼 독일의 소설가 하이제(Paul Johann Ludwig von Heyse)의 이론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그 자신의 작품에서 ‘다소 평이한 현실 안주의 인물 제시와 직설적인 서술성이 횟수가 잦게 노출된 점은 소설의 미학적인 형상화 기량이 미숙한 탓이다.’라는 응당 다소의 무리수가 주어지는 실상이다.
또 한편 “은어들은 기절한 채 물 따라 흐르다가 바닷물의 찬 기운을 만나면 다시 살아나서 퍼덕인다. 그게 은어다. 나는 다시 술잔을 홀짝였다. “강릉 사람도 아닌 주제에 제 놈이 월 안다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나의 눈에는 40년 전의 은어떼들이 다시 하얗게 몰려오는 것이었다.(강릉 남대천의 은어떼)” 그렇다. 여기서 다소 이처럼 의도적인 접근이나 2006년 영화「다빈치 코드」가 뜨고, 한 여인의 삶을 재해석한「빛의 일기」가 2017년에 TV 드라마로 방영된 이후, ‘강릉으로 가는 길은, 숨겨둔 다빈치 코드와 흡사한 무엇이 뇌리를 의아심으로 휘감았다.’라는 다양성에서 2022년「슈룹」TV 드라마도 헤아릴 바다.
까닭에 이 지상에서 생명의 원천이며 가장 위대한 이름인 모성을 이미지로 형상화한 끝에 “지금 내 나이도 고희를 넘긴 지 한참이지만 그래도 나는 어머니의 영원한 어린아이다. 어머니가 지켜주시지 않아서 외롭고 불안하다. 어머니의 미소를 보고 싶고 어머니의 음성을 듣고 싶다. 어머니의 산소는 현남면 인구리의 선산에 있다. 나는 죽어서도 어머니의 옆에 묻히고 싶다.(어머니의 꿈)”의 보기도 그렇거니와 “누님은 한글 자모를 적은 글자판을 만들어서 <가겨 거겨>하는 식으로 한글을 가르쳤다. 1946년 도라 여겨진다. 해방 직후라 한글책도 없을 때였다. 나에게 외사촌이 되는 누나는 좀 우둔한 편이었던지 누님의 질책을 받으며 한글 자모를 배우느라 찔끔찔끔 울었다. 그것을 구경하던 5실 된 내가 타박을 했다. “그게 뭐 어렵나? ‘가갸 다음엔 나냐 너녀’하면 되지.(한글의 우수성)”에서도 짐짓 공감대가 형성되듯 긴장감과 흥미를 자극하는 그 자신의 의중은 놀라운 동기부여(動機附輿)다.
특히 그 자신의 감정이 절제된 언어는 불안정할지라도 생명의 계절에 부활의 봄을 오감(五感)으로 절감토록 충직한 이 땅의 지혜로운 독자가 끝내「감동의 느낌표」에 낙점을 찍는 역동성을 한껏 발휘하는 정감(情感)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책의 그늘은 넓고 크지만, 근간 해법이 투명하지 않은 영어몰입교육은 그저 지나칠 수 없다.’ 비록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간대일지라도 ‘모국어는 곧 고향이며 조국이기’에 그 소중함을 각인시킨 헨리크 센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의「등대지기」(작은키나무)를 분별하지 않을 수 없다. 까닭에 가공의 진실을 역사적 관점에서 기술한 소설이 그 시대의 정신적 산물이기에 합리적 해법은 지극히 타당하다.
여기서 우연의 일치일 것이나 “원영동 시인은 내가 강릉사범학교를 다닐 때 강릉사범병설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셨음으로 나와는 간접관계의 은사님이시다. 선생님은 문학을 지도하셨기 때문에 문학도인 나로서는 선생님을 자주 대하는 입장이었고 늘 도움을 입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한동안은 뵐 기회가 없었다.(은사님의 뒷모습)”에서 거론되는 흰돌(白石) 원영동(元永東) 시인은 평자의 중고교 은사로 제자 사랑이 지극한 정신적 스승이셨다. 까닭에 홍성암 소설가의 추모시「흰 나비의 꿈」은 비장감이 묻어나듯 ‘사건의 배경이나 모티프(motif)에서 시간과 공간의 열림 지향’의 차별성은 이 시대의 그 어느 작가보다 치밀한 구도처리는 각별하다.
또 한편 각각 작품의 키워드(key word)는 “최 씨는 고향이 지금은 휴전선 이북이 된 통천지방 총석정 부근의 바닷가라고 했다. “내 집은 바닷가 옆 늪지대란 말이네.” 집 앞에는 갈대가 무성한 큰 늪지대가 있는데 어릴 땐 주로 그 늪지대에서 고기도 잡고 쪽배를 타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고향의 꿈)“의 보기에서나 또는 “나는 한시바삐 고향으로 달려가고자 열망하는 젊은이의 태도를 보면서 마음속으로 흐뭇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젊은이들이 있는 한 우리의 미래는 밝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적 병폐에서 벗어나 한국적인 새로운 기풍을 세워갈 것이기 때문이다. (귀성(歸省) 버-스)”라는 삶의 교시(敎示)처럼 미래지향적인 긍정적 사유(思惟)가 중차대한 까닭에 그 상상력의 확장은 더없이 신선한 감동이다.
3. 에필로그(epilogue)와 합리적 해법
차제에 그 자신이 초-장르적으로 묶어낸 소설집의 표제(標題)인「건망증」은 작금에 ‘인지증(일본), 인지장애(중국), 기억장애(독일), 신경인지장애(프랑스, 미국)’인 반면 유독 한국에서만 무개념인 ‘치매(癡呆)’로 언급하는 현상에서 “그러나 이어지는 박 상무의 말은 엉뚱했다. “그야 집사람에게 생일 선물사라고 마련한 것이긴 했지만 일이 그 지경이 되어 새삼스럽게 임자 주려고 마련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우습고... 그래서 그건 사장님이 거래처에 줄려고 마련한 거라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네.” 이마에 흐르는 진땀을 닦으며 늘어놓던 박 상무가 미스 윤을 돌아보며 물었다. “미스 윤, 뭣하고 뭘 합쳐서 백이 된다고 했더라?” 미스 윤은 기가 막힌 지 그저 멀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불면증)”라는 결말은 기억장애에서 비롯된 인지상정(人之常情)이랄까? 그 감응은 짐짓 느꺼울 따름이다.
이같이 그 자신은 문학이 언어예술임을 의식하기에 모파상(Guy de Maupassant)의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에 철저함도 그렇거니와 ‘적절한 표현 못지않은 응축과 육성, 그리고 개아적 체취의 차별성’은 새삼 놀랍다. 비록 통시적 고찰이나 그 자신의 에세이소설에서 등장인물의 창조적 성격을 모색하기 위해 작품의 흐름을 통시적으로 검색할 일이다. 비록 심층적인 연구가 비중 있게 행해지지 못한 현상에서 생경한 그 자신의 문학사적 위상을 점검하는 작업이 각론에 머물지라도 작품의 주제와 수사의 기법, 그리고 문체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연구와 자각 의식은 끝내 절실하다.
각론하고 대륙의 심장을 지닌 그 자신의 정신적 생산물에 있어 서술상황의 전개 양상의 특성이나 소설의 미학적 일면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자기변명으로 치부될 위험성이 주어질 것임에「의식(意識)의 저쪽」,「완행버스-강원도(1960년대)」에 관한 인상 비평적인 서술은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까닭에 “형님은 어쩌면 이 족보 책과 족보의 증보를 부탁하기 위해서 나를 만나기를 청했을 것 같기도 했다. 정든 고향길이기도 한 서낭당 오솔길을 한참 걷다가 서낭당 앞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의 땅)”에서 유념할 바라면, 하나의 신앙처럼 소중한 일상의 삶에서 ‘혈연과 지연’은 따뜻한 정감의 정체성을 지켜내며 장르의 이탈을 거부한 과제의 생산물이다.
결론적으로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결정 불가능성의 범주(範疇)를 거듭 역설했기에 홍성암 작가의 경우, 탯줄을 묻은 그 향리(鄕里)의 낮은 산자락에 지극 정성일뿐더러 대립과 갈등 구도로 암울한 사회현상에도 상호보완적 공존의 양상을 지닌 눈부신 실체이기에 ‘따뜻한 감성을 지닌 극소수의 창조자’로서 건강한 비판기능의 역할은 한층 더 기대된다. 모쪼록 창조적 활동을 지켜내고 ‘영감의 비의(秘意)를 해명하는 비공인의 입법자로서 그 소임’을 끝내 수행할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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