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경첩>을 위하여
그 몸짓(과정. 방향. 방식)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끝에 가서는 결국 같은 모습의 속살을 내보이게 마련이지만, 하나의 새로운 현상, 사물, 언어가 놀라운 전율의 발견으로 나를 행복하게 할 때가 있다. 그것들이 나를 단절로부터, 소외로부터, 갈등으로부터 막아 주고 이어주는 하나의 <경첩>의 구실을 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경첩>이라는 물건도 그렇다. 단절과 소외,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요즘같은 세상에 서로 다른 것을 이어 주는 이런 물건이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시대 속에서 이 같은 물건이 갖는 기의(氣意)는 우리의 결핍을 눈치챘을 때 아주 강력한 힘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그 앞에서 주책스러우리만치 아양을 떨 정도이다. 이럴 때 밖으로 한없이 떠돌던 우리의 <몸>이 마음 속에 들어와 앉는다. 이제 다 늙고 병든 몸으로 조강지처를 찾아든 떠돌이의 그것 같지만, 늘 위태위태하던 그 빈자리를 체념할 수 있는, 쉰내 나는 <몸>의 안도를 아는 사람은 안다. <화해>의 이미지는 밝은 탄력의 그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대체로 갈등과 단절의 시간이 짧았을 때의 경우다.
하긴 여러 해 서울 인사동이라는 마을에 머물다 보니, 내 의지에 관계 없이 온갖 골동품들을 보고 즐길 수 있는 안복을 누렸고, 특히 못이나 <경첩> 따위를 쓰지 않고서도 <몸으로 맞물려 있는> 목기류, 그 소목장들의 솜씨에서 한 걸음 더 속으로 걸어 들어 간 <속경첩>의 현상을 발견하고 전율한 바 있지만-.
그렇다. 시도 사랑도 이렇게 <몸으로 맞물려> 있어야 한다. 그게 시의 <몸>이다. <겉경첩>이 아닌 <속경첩>까지 가야 한다. 문제는 이것만을 고집할 때 우리 시가 또 인스턴트화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미 그것은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집단의 시들에서 경험했다.시는 과정이 있는 <속경첩>이어야 한다. 요즈음 우리 시는 한 세계에서 한 세계로의 이행에 있어 과정을 포기하는 징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경제학도 그런 천민성을 타기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어느 새 피폐한 몸으로 술잔의 수위나 바라보면서 시끄러운 갈등의 언어들을 궛전으로 흘릴 수 있다고 믿는 포즈로는 <속경첩>의 <몸>을 되찾을 수 없다. 그것은 초탈이 아니다, 요즈음 이쪽으로 유혹되는 나의 <몸>을 나는 경계하고 있다. 가끔 그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나는 난감해하고 있다. 분리가 아닌 <처음부터 함께 있음>으로 고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