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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산서당상량문仁山書堂上樑文
군자가 머문 곳에
여전히 유촉(遺躅)이 남아 있고,
자애로운 후손이 지은 집은
아름답게 효사(孝思)를 본받았네.
풍운이 길이 이어지고,
산천이 경관을 바꾸었네.
공손히 생각하건대 괴재(愧齋) 배선생(裵先生)은
명가의 아름다운 현인이고
성대에 초야의 학자였네.
어려서 부친의 사랑을 잃고 슬피 사모하여 몸을 상했으니
이는 효성이 천성에 근본함이고,
자라서는 백형의 가르침을 받아 조예가 일찍 이루어지니
절로 자품이 도에 가까웠네.
성균관에서 진강하는 날에 마음을 속이지 않으니
성주의 칭찬을 입기에 이르고,
사상(泗上)에서 가르침을 받을 때에 뜻을 굳게 하니
스승의 장려를 누차 받았네.
처음 광해군의 난정을 당하여
십 년 동안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고,
문득 남한산성의 화친을 만나
당세에 나갈 생각을 끊었네.
강론하여 밝힌 것은 《춘추》의 존양(尊攘) 의리였으니,
일찍이 내외 경중의 분수에 판단을 하였네.
사는 곳에 시끄러움이 없으니
절로 고반(考槃)에서 읊는 아취가 있고,
서재의 편액에 ‘괴(愧)’ 자를 거니
매양 마음을 보존하여 살피는 공부를 더했네.
의발(衣鉢)을 전함은
안정(安定) 제자의 반열에 맡김이 있고,
태산 북두의 명망은
하남(河南) 백숙(伯叔)의 현자와 같았네.
아! 하늘의 뜻을 믿기 어려움이여,
문득 연수(年壽)가 촉박하였네.
재능과 뜻을 다하지 못하니
여헌(旅軒)이 애도하는 말 깊었고,
이름과 실상이 서로 합하니
우복(愚伏)이 찬미하는 말 극진했네.
어진 손자가 귀하게 됨으로 좋은 벼슬 증직을 받으니
본래 쌓은 아름다운 음덕 알 수 있고,
선형(先兄)의 사당에 올라 동당에 함께 제향이 되니
생전에 우애의 지극한 즐거움 완연히 보겠네.
외루(畏壘)가 훼철되니
사림이 규맥(葵麥)의 탄식 일으키고,
선대의 이름다운 자취 사라져가니
후손이 갱장(羹墻)의 사모 절실했네.
이에 백 년의 옛 터에 나아가,
몇 칸의 새 집을 지었네.
땅은 특별한 데 지내면서 공부할 곳이 아니고,
집은 넓은 건물에 사치하고 클 필요가 없네.
물력을 여러 해에 걸쳐 갖추니
마음으로 계획하기를 많이 하였고,
공사가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니
드디어 눈앞에 우뚝 솟음을 보겠네.
마루와 방에 거처함은
모두 여름과 겨울에 적합하고,
좌우의 도서를 완미하고 읽음은
정히 아침과 저녁에 좋네.
평천(平泉)의 화석(花石)은
더구나 십 대에 끼친 것이니,
문조(文藻)의 강산(江山)을
어찌 삼공(三公)과 바꾸랴?
여러 산이 휘감아 둘렀으니
푸른 병풍에 도화를 펼쳤고,
작은 시내가 소리 내며 흐르니
옥을 울리는 소리가 들리네.
변함없는 천석(泉石)엔
다니시던 남은 자취 선명하고,
무성한 저 상재(桑梓)에는
토구(菟裘)의 옛 자취 완연하네.
여러 대에 걸친 유지를 따라 이루니,
여러 후손들 깊은 정성을 합하였네.
어찌 우연한 일이었으랴?
실로 또한 운수가 있었네.
담을 둘러싸고 사는 이들은
모두 본손과 지손이 이어지고,
청전(靑氈)을 이어서 지킴은
곧 전형(典型)이 있는 바일세.
자주 위가(韋家)의 화수회를 이루니
화목한 기운 항상 무르익고,
길이 진정(甄亭)의 조상 생각 깃들이니
그 덕을 감히 잊을 수 없네.
베옷 입고 나물국 먹으라는 유훈을 읽어
검약의 규모를 삼가 따르고,
초가집 쑥대 엮은 문을 읊은 시 외우니
깨끗한 운치를 아득히 상상하네.
자제를 모아서 학업을 익히는 장소로 삼으니
속진의 번거로움이 침범하지 않고,
빈객과 벗을 맞이하여 문주(文酒)의 자리 여니
풍류를 숭상할 만하네.
인륜이 무너진 세상에
오히려 예악 양심이 없어지지 않고,
병화가 어지러운 나머지
다시 태평한 옛일을 보는 듯하네.
상해(桑海)로 덧없이 변하니
비록 제기를 받들어 정성으로 제향을 드리지는 못하나,
철로(鐵爐)가 오히려 존재하니
어찌 가학을 이어 조상을 더럽힘이 없기를 생각하지 않으랴?
추모하고 정성을 다하는 도리를 다하기를 바라서,
이에 선현을 높이고 덕을 숭상하는 방도를 행하네.
감히 육위(六偉)의 글을 드려서,
들보를 들어 올리는 일을 돕노라.
어영차! 들보를 동쪽으로 하니
부상(扶桑)의 새벽 해가 발에 올라 붉구나.
이때의 기상은 조금도 가려짐이 없으니
청명한 기운이 내 몸에 있음을 알겠네.
어영차! 들보를 서쪽으로 하니
아스라한 가야산이 시야에 희미하네.
옛날에 가마 타고 유람하던 곳
훌륭한 시에 아직도 정채가 남았네.
어영차! 들보를 남쪽으로 하니
도천(道川)의 차운 달이 빈 못에 비치네.
옛 터가 폐하여 현가(絃歌)가 적막하니
운수가 성하고 쇠함에 한을 견딜 수 있으랴?
어영차! 들보를 북쪽으로 하니
무흘(武屹) 높은 산이 북두성과 가지런하네.
책상 지고 배우러 갔던 그 해에 몇 번이나 왕래했던가?
곧은 문로가 먹줄처럼 반듯했네.
어영차! 들보를 위로 하니
만 리에 창창하게 하늘이 드넓구나.
지금 긴 밤이 어둡다고 탄식하지 말지니
해와 별이 다시 비추어 밝음을 우러르네.
어영차! 들보를 아래로 하니
낙동강 양양하게 흘러 그치지 않네.
물가의 수초 채취하여 바람 쐬고 시 읊으며 돌아오니
봉안하던 어느 날 맑은 술 바쳤던가?
엎드려 원하옵건대 들보를 올린 후에
선대의 자취 빛나게 보존되며,
후손들은 더욱 창성하게 하소서.
채가(蔡家)의 가학이 전해져서
뜻을 잘 계승하고 일을 잘 계승하며,
여씨(呂氏)의 향약을 본받아
서로 권면하고 서로 경계하게 하소서.
효제(孝悌)의 풍속을 능히 돈독히 하여
백성의 덕이 후한 데로 돌아가게 하고,
명리(名利)의 바다에 빠지지 말아서
세상의 교화가 순박하게 됨을 보게 하소서.
전배(前輩)의 유풍을 우러르고,
오당(吾黨)과 함께 본받게 하소서.
괴재(愧齋) 배선생(裵先生) : 배상호(裵尙虎, 1594∼1632)를 말한다. 자는 계장(季章), 호는 괴재(愧齋),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1624년(인조2)에 진사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입학하였다. 등암(藤菴) 배상룡(裴尙龍, 1574∼1655)의 아우이고,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괴재집》이 있다. 성주의 도천서원(道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사상(泗上) : 사수(泗水)의 가. 사수는 현재 대구광역시 북구 금호강 변에 있는 지명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노년에 이곳에 지내면서 학문을 강론하였다.
존양(尊攘) :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준말. 왕도(王道)를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치는 《춘추》의 의리를 말한다.
고반(考槃) : 《시경》 위풍(衛風)의 편명인데, 은자가 산수의 사이에 은거하여 한가로이 소요하며 지내는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은거지, 또는 은거의 즐거움을 말한다.
의발(衣鉢) : 스승의 법맥이나 학통을 이어받는 것을 말한다.
안정(安定) : 송(宋)나라 학자 호원(胡瑗, 993∼1059)을 말한다. 경술(經術)에 박통하여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천거를 받아 백의(白衣)로서 숭정전(崇政殿)에 들어가 천자를 대하고 교서랑(校書郞)에 임명되었다. 뒤에는 소주(蘇州), 호주(湖州)와 태학(太學)의 교수가 되어 많은 생도들을 가르쳤다. 후에 그 제자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는데 모두 삼가는 덕이 있어서 그 말과 행실을 보면 묻지 않고도 그 제자인줄 알았다고 한다. 세칭 안정(安定) 선생이라고 한다. 《宋元學案 卷1 安定學案》
하남(河南) 백숙(伯叔) : 송(宋)나라 때의 하남 출신의 학자 명도(明道) 정호(程顥, 1032∼1085)와 이천(伊川) 정이(程頤, 1033∼1107) 형제를 말한다. 여기서는 등암(藤菴) 배상룡(裴尙龍, 1574∼1655)과 괴재(愧齋) 배상호(裵尙虎, 1594∼1632) 형제를 말한다.
여헌(旅軒) :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호이다.
우복(愚伏) : 정경세(鄭經世, 1563∼1633)의 호이다. 자는 경임(景任),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우복집》이 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어진……받으니 : 손자 배정휘(裵正徽, 1645∼1709)가 귀하게 된 것으로 인하여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선형(先兄)의……되니 : 도천서원(道川書院)에 형제가 함께 제향된 것을 말한다.
외루(畏壘) : 산 이름이다. 노자(老子)의 무리 경상초(庚桑楚)가 노자의 도를 얻어 여기에 살면서 3년 만에 크게 풍년이 들게 하자 이곳 사람들이 받들어 제사를 드리려 했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사당을 지어 제사를 받드는 뜻으로 쓰인다. 《莊子 庚桑楚》
규맥(葵麥) : 토규연맥(兎葵燕麥). 이미 사라진 옛 자취를 상심하는 말이다. 당(唐)나라 유우석(劉禹錫, 772∼842)이 화주 자사(和州刺使)로서 내직으로 들어가 주객낭중(主客郞中)이 되어 〈다시 현도관에 노닐며[再遊玄都觀]〉라는 시를 짓고, 또 말하기를 “처음 귀양 갔다가 10년 만에 서울에 돌아오니 도사가 복숭아나무를 심어 그 성대함이 마치 붉은 노을 같았다. 또 14년에 이곳을 지났는데 하나도 남은 것이 없고 오직 토규연맥만 춘풍에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唐書 卷160 劉禹錫列傳》
갱장(羹墻):국과 담. 우러르고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함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 이고(李固)가 말하기를, “옛날 요 임금이 죽은 뒤에 순 임금이 3년 동안 우러르고 사모하여, 앉았을 때는 담에서 요 임금을 보고 밥 먹을 때는 국그릇에서 요 임금을 보았다.[昔堯殂之後, 舜仰慕三年, 坐則見堯於牆, 食則睹堯於羹.]”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93 李固列傳》
평천(平泉) : 당(唐)나라 이덕유(李德裕)의 별장 평천장(平泉莊)을 말한다. 낙양의 20리 밖에 있었는데 당시에 천하의 기화괴석(奇花怪石)을 많이 모았으나 후일에는 황폐하여 잊혀지게 되었다. 이덕유의 자는 문요(文饒), 찬황(贊皇) 사람이다.
상재(桑梓) : 뽕나무와 가래나무. 고향을 말한다.
토구(菟裘) :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읍 이름인데, 은거하는 곳을 말한다. 《좌전(左傳)》 은공(隱公) 11년 조에 “토구를 경영케 하라. 내 장차 노년을 보내리라.[使營菟裘. 吾將老焉.]”라고 한 구절이 있다.
청전(靑氈) : 선대부터 전하는 가업을 말한다.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 321∼379)의 아들 헌지(獻之)가 밤에 서재에서 잘 때 도둑이 들어 방안의 물건을 다 훔쳐서 짐을 꾸렸을 즈음, 헌지가 천천히 이르기를 “푸른 모포[靑氈]는 우리집의 오랜 물건이니 그것만은 놓아두어라.”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위가(韋家) : 당(唐)나라 때 위씨(韋氏)의 가문을 말한다.
진정(甄亭) : 진씨(甄氏)의 사정(思亭)을 말하다.
상해(桑海) : 상전벽해(桑田碧海). 세상의 변천이 덧없음을 말한다.
철로(鐵爐) : 철로보(鐵爐步). 중국 호남성 영릉현(零陵縣) 북쪽에 있는 지명이다. 당(唐)나라 문장가 유종원(柳宗元, 733∼819)의 《철로보지(鐵爐步志)》에 “강가에 배를 매고 오르내릴 만한 곳을 보(步)라고 하는데, 영주(永州) 북쪽에 철로라는 보가 있다. 대개 일찍이 철을 단련하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가 떠난 후에 그대로 지명으로 남게 된 것이다.”라고 한 말이 있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훌륭한 사람이 일찍이 자취를 남긴 곳을 말한다.
육위(六偉) : 상량송(上梁頌)을 말한다. 대들보를 올릴 때 여러 사람들이 힘을 모아 드는 소리를 ‘아랑위(兒郞偉)’라는 의성어(擬聲語)로 표시하는데 상하 사방의 여섯 방향으로 대들보를 드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부상(扶桑) : 동해의 해 뜨는 곳에 있는 신목(神木). 해가 뜨는 곳을 말한다.
현가(絃歌) : 예악(禮樂)의 교화, 또는 예악을 익힘을 말한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노(魯)나라 무성(武城)의 읍재(邑宰)가 되어 예악으로 다스림에 공자가 현가(絃歌) 소리를 듣고 기뻐한 일이 있다. 《論語 陽貨》
무흘(武屹) :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에 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이곳에 무흘정사(武屹精舍)를 지어 기거하며 학문을 강론하였다.
채가(蔡家)의 가학 : 송(宋)나라 학자 채원정(蔡元定, 1135∼1198)과 그 아들 채침(蔡沈, 1167∼1230) 부자간에 전한 가학을 말한다. 채원정의 자는 계통(季通), 호는 서산(西山)이다. 채침의 자는 중묵(仲黙), 호는 구봉(九峰)이다. 이들 부자는 모두 주자(朱子)를 스승으로 섬겼다.
여씨(呂氏)의 향약 : 중국의 남전 여씨(藍田呂氏) 형제 네 사람이 향인(鄕人)들과 함께 맺은 규약이다. 그 규약의 내용은 덕업으로 서로 권할 것[德業相勸], 과실에 서로 경계할 것[過失相規], 예속으로 서로 사귈 것[禮俗相交], 환난에 서로 도울 것[患難相恤] 등의 네 가지이다.
백저문집(白渚文集) 배동환 저 김홍영․박정민 역 학민출판사(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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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산 서당 상량문을 백저 선생님께서 지으셨군요.
인산 서당에 걸려 있는 상량문 사진 입니다.
감사합니다.
수고스럽겠지만, 사진 원본을 받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