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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우, 그 불멸(不滅)의 예술혼
- 따뜻한 감성과 격조 높은 선율(旋律)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월간『禪으로 가는 길』 고문)
1. 소중한 인연의 매듭과 의미망
모름지기「이건우, 그 불멸(不滅)의 예술혼 – 따뜻한 감성과 격조 높은 선율(旋律)」을 전제한 논고의 모두(冒頭)에서 아직도 아쉬움이 주어지는 현상은, 지난 2025년 7월 29일 평남 대동군 출신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역임한 서울대 음대 작곡과 이건용(1947∼) 교수의「거울에 비친 ‘제3세대’-한국 현대음악 정체성의 기원과 유산을 묻고」 세미나 발제에서 ‘1. 세대론의 유효성과 한계 : 1, 2세대와의 단절과 계승’에서 한국 현대음악사를 조망할 때 세대론이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유용한 틀을 제공함을 거듭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까닭에 제1세대로 일제강점기에 서양음악을 수용하고 창작의 씨앗을 뿌린 작곡가 김순남(金順男, 1917~1983), 이건우(李建雨, 1919~1998). 이상근(李相根, 1922~2000)을 각각 선구자로 확정했다. 또 한편 참고사항 <표 1>에서 ‘단지 주요 교육 배경으로 국내 초기 서양음악 교육(일본 영향), 핵심과제(서양음악의 수용 및 기초확립), 전통과의 과제(민요 선율의 직접적 차용, 계몽적 활용),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파인 대표작곡가 3인(김순남, 이건우, 이상근’을 각각 소개한 그 현재성은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이 같은 정황에서 지난 2025년 10월 6일, 한국 전통음악에서 길어 올린 질료를 현재의 관현악법으로 재창조하는데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인 김대성(金大成, 1967∼)은, 「가곡과 굿, 관현악으로 빚은 대서사시-김대성의「금잔디」, 고구려의 숨결을 품고 피어나다」라는 논제의 작품해설에서 “국악관현악을 위한「금잔디」는 겨레의 보편적 정서인 ‘그리움’과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기상’이라는 두 개의 상반된 이미지를 하나의 거대한 서사로 엮어냈다.”라는 지적은 검증과정에서 더없이 유의미하다. 또 한편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의 애틋함에서 출발하여 민족의 역동적인 생명력으로 확장되는 충동감은 저토록 가곡「금잔디」를 통해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고뇌의 삶을 살다간 DMZ와 인접한 강원도 삼척태생인 천재작곡가 이건우(李健雨, Lee Kunwoo, 1919∼1998)를 망각의 기억에서 새삼 호명(呼名)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정황이라면 2026년 1월 새해가 열리는 대망의 시간대에서 그간의 기획연재물인「대한민국을 바꾼 가요사 - 우리나라 대중음악사(7)」는, 해방공간에서 작곡된 몇몇 문제의 곡을 새로운 시각에서 이론적인 체계를 갖춰 새삼 밝혀준 사실이다. 그 같은 일례로 광복 직후, 미군의 서울 입성 축하곡으로 가요의 종사자들이 합의해서 1945년 8월 22일에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가요가「사대문을 열어라」(박영호 작사, 김용환 작곡)를 비롯하여「귀국선」(1946년), 그리고「울어라, 은방울」(1946년)을 대표곡으로 소개해 주었다. 따라서 해방공간의 최고 작곡가로 평가받는 김순남의「해방의 노래」,「건국행진곡」, 김성태의「독립행진곡」,「아침 해 고을시고」, 이건우의「여명의 노래」, 나운영의「건국의 노래」, 안기영의「해방 전사의 노래」 등으로 각각 구분되는 현상이다.
그 같은 일면에서도 지난 2025년 12월 25일의 보컬 클레식(vocalclassic) 안내와 보기에서 외국인 성악가가 한국가곡을 부르는 무대가 신선한 감동을 안겨줌도 그렇거니와 앞서 지난 추석 연휴에 방송되어 큰 화제를 모았던 KBS K가곡 슈퍼스타 편은 모처럼 전국의 많은 시청자에게 깊은 인상을 안겨주었다. 차제에 이 프로의 출연 인물 중에서 명예의 금상 수상자인 노르웨이 출신 소프라노 성악가 한네 마리트 모드달 이베르센(Hanne Marit Mordal Inversen)은 한국어 가사와 정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표현하기가 쉽지 않음에도 대다수 시청자에게 존재감이 생소한 이건우 작곡가의 한국가곡「금잔디」를 그만의 진정성 있는 해석과 안정적인 발성으로 곡의 아름다움을 맛깔스럽게 전달하여 신선한 충동감을 안겨준 사실이다. 까닭에 이날의 TV 방송중계로 지극히 섬세한 선율과 담백한 정감이 한층 더 재조명되었을뿐더러 화려한 기교보다 절제된 감정과 깊은 선율이 돋보이는 곡으로, 한국가곡 특유의 서정미를 한껏 일깨워 그 나름으로 한국가곡의 보편성과 예술성을 함께 보여준 의미 있는 사례였음은 못내 자명하다. 그 같은 점에서 ‘세월은 강물처럼 덧없이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로 채워가는 것이기’에, 지난해 낮은 산자락이 푸르름에 젖는 성하의 계절에 창밖을 묵언으로 응시하다가 필자와 50년 남짓 사제 간의 소중한 연(緣)을 맺어온 월간『禪으로 가는 길』의 이종철 발행인으로부터 카톡을 통해서 ‘이메일로 작고한 저의 큰아버지 자료를 보냅니다.’를 전송받게 되었다.
그렇다. 불꽃처럼 시혼(詩魂)을 불태우다 삶을 마감한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 1902~1934) 작사, 이건우 작곡의「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평자 그 나름으로 나직이 흥얼거리며 한순간 정겨운 음조에도 취해보았다. 차제에 무척이나 뒤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국민 대다수에게 그 존재가 생소한 ‘비운(悲運)의 천재작곡가 이건우’는 암울한 민족사의 격동기인 1919년 8월 21일에 강원도 삼척군 원덕면 호산리 289번지에서 출생하여 낮은 산자락에 탯줄을 묻었으며, 그 당시 호산리는 인근에 원덕 면사무소가 있는 강원도 최남단의 동해안 연안 지역으로 경북 울진군과 맞닿은 공간이다. 특히 서울에서 거의 5백여 리나 떨어진 곳으로, 해망산을 뒤로 동해의 푸른 바다와 맞닿은 백사장 이곳저곳에 동백(冬柏)이 흐드러지게 꽃 피는 호산리에서 선친이 몇 척의 어선(魚船)을 소유한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한 탓에 어린 이건우는 가끔 섭조개를 따 숯불에 구워 먹으며 아득한 유년을 보내며 성장하였다.
그와 같이 이건우의 사촌도 삼척에서 양조장을 운영할 정도로 넉넉한 경제력을 지닌 가문이었다. 까닭에 그 자신은 부유한 경제력 탓에 고향에서 276km나 떨어진 강원도의 도청 소재지인 춘천으로 진학하였고, 춘천고등보통학교에서 당시 음악 교사인 후이지 슌지(藤井俊治)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미래의 음악가로서 청운(靑雲)의 꿈을 서서히 일깨웠고, 1938년 3월 춘천고등보통학교 제10회 졸업생으로 유학을 위해 도일(渡日)하였다. 어디까지나 지나치고 뒤돌아보면 삶의 매듭은 그 관계 층위에 맞물린 인연의 끈일 것이나 모처럼 불교 전문월간지인『禪으로 가는 길』2025년 9월호 권두 칼럼에서「비운의 천재작곡가 이건우의 삶-격조 높은 예술혼과 불멸(不滅)의 노래」로 결부(結付) 지어 거론하면서도 못내 뒤늦은 감으로 그 아쉬움은 절실한 심사였음은 솔직한 심사(心事)였다.
차제에 지난 2020년 6월 19일 「드림 쉐어」에서 한국가곡연구소 설립 10주년 기념사업으로 기획, 제작된 나라 잃은 시대에 태어난 천재작곡가 이건우 탄생 100주년 기념 음반인「다시 부르는 노래 이건우 가곡」의 출시는 더없이 소중한 정신작업임에 틀림이 없다. 이같이 그 자신은 일본 유학 이후 1943년에 귀국을 서둘러 해방공간(1945∼1948)을 전후로 조선 제1의 작곡가로 칭송받으며 활발한 활동을 벌인 빛나는 존재였으나 불행하게도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한국전쟁(The Korea War) 당시 민족주의에 이끌려 월북하고 북한 땅에서 생을 마감한 지극히 불행한 한 예술가의 삶은 더없이 불행한 사건일 따름이다.
각론하고 천재일우(千載一遇랄까? 지난 2020년 6월 30일, 「연합뉴스」의 송광호 기자의 “작곡가 이건우가 월북하기 전에 작곡한 가곡 전곡을 복원한 음반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매됐다.”라는 보도기사처럼 작곡가 이건우 월북 이전 작곡한 가곡 전곡을 한국가곡연구소가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월북 이전에 남긴 가곡의 전곡을 복원하여 제작하였다. 또 한편 국내 최초로 국제무대에서 활동 중인 소프라노 서예리 독일 다름슈타트(Darmstadt) 음대교수와 바리톤 정록기 한양대 음대교수, 윤이상(尹伊桑, 1917~995)의 제자인 피아니스트 홀거 그로쇼프(Holger Groschopp)가 앨범 작업을 함께 했다. 따라서 개념도 불투명한 이념의 문제로 갈등과 대립이 심각한 사회 현상에서, 우여곡절 끝에 복원된 이건우의 가곡음반은 한국의 근현대음악사에 역사적 자료로 그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그 같은 측면에서 음반제작 그 자체 하나로도 한국가곡 발굴 및 한국가곡의 발전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은 명백하다.
특히 개념상 양악(洋樂) 장르에서 가곡(歌曲)은, 서양음악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후 자연스럽게 흡수된 하나의 음악 양식으로 시(詩)에 곡(曲)을 붙여 반주가 곁들여진 노래를 뜻한다. 서양음악 분야에서 ‘가곡’이라는 명칭을 쓰게 된 것은 일본의 영향으로 추정될 따름이다. 일명 ‘마음의 노래·겨레의 노래’로 해방 이전의 한국가곡(1922~1944)은 서양의 예술가곡 장르보다 100여 년 남짓 늦게 출발하였으나 1920년대 초, 시편에 멜로디를 입히고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가곡 시대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그와 같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유학을 끝내고 해방공간 시간대에 놀랍게도 일본 음악계에서 명성을 얻은 신지식인이었으나 월북한 탓에 안타깝게도 작곡가 이건우, 그 삶의 족적(足跡)은 월북으로 상실된 실체였다.
까닭에 이건우 작곡가의 가곡이 지닌 의미는 한국가곡이 자리매김한 지 불과 20년 직후인 1940년대 일제강점기의 끝 무렵인 해방공간 전후에 작곡되었다는 사실도 그렇거니와 그가 추구한 작곡 방향과 탄탄한 작곡어법은 ‘한국가곡의 정체성’ 확립에 주목할만한 업적을 남겼다. 한편 이채롭게도 2019년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음반으로「다시 부르는 노래, 이건우 가곡」앨범의 자켓 하단에 ‘북으로 간 작곡가 이건우 탄생 100주년 기념’이라는 부제의 표기처럼 그 자신의 존재가 뒤늦게나마 비중 있게 평가받은 분위기다. 이처럼 이영진 음악평론가의 깊은 관심과 한국가곡연구소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다행스럽게 이건우 작곡가의 투명한 예술혼의 결과물이 그 가치를 확증케 됨은 예술인의 종사자로서 더없이 감사(感謝)하는 심사(心事)이다.
2. 위대한 예술혼과 삶의 족적(足跡)
모름지기 2013년 3월 음악 월간지『객석』에서 김상헌 평론가의「김세형 가곡의 재조명」 논고에서 “1940년대에 ‘한국음악’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됨과 동시 작곡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신진 음악인의 등장에 변형하기 시작한다.” 까닭에 김순남과 이건우의 역시 작곡을 전공으로 교육받은 점에서, 1920~1930년대의 작곡가들과 차별화되며 이들의 음악 어법 또한 기존의 작곡가들과는 차별성을 지닌다. 즉 1920~1930년대의 작곡가들은 서양의 전통적인 조성음악을 배우고 받아들이던 ‘제1세대’ 음악가로 칭한다면, 1940년대의 ‘제2세대’ 음악가들은 서양의 현대음악을 받아들여 서양음악과의 ‘동시대성’을 꾀하였다. 비교적 이들의 평가에서 현대적인 음악 어법을 받아들인 동시에 ‘민족적인 요소’ 또한 추구했다.”라는 역설은 합리적이다.
그렇다. 2022년 11월 14일『강원일보』(19면)「월요칼럼」의 <작곡가 이건우를 아시나요?> 지면에서 이건우 작곡가의 모교인 춘천고등학교 후배 이영진(43회) 음악평론가는 기고문에서 “1919년 강원도 삼척 원덕에서 태어난 비교적 온순한 성격과 품행이 바른 이건우는, 음악가의 꿈을 키우며 1938년 3월 춘천고등보통학교(10회)를 졸업하고, 도일해 동경고등음악학원(쿠나타치 음악대학원의 전신으로 현 국립음악대학)의 작곡부에서 수학한 엘리트다. 한편 그 자신의 수학 과정은 1938년~1939년 동경고등음악학원(東京高等音楽学院)(현 구니타치음악대학), 1939년~1943년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東京帝國高等音樂學校) 졸업이 그의 학력이다.
이처럼 그 자신은 일본 유학 당시인 1940년 제9회 일본음악콩쿠르(日本音楽コンクール)(마이니치(每日)신문사 주최)에서 바이올린 조곡 작곡부문 3등 입상하고 다시 1942년에 제1회 관현악콩쿠르(管弦楽コンクール)(빅타축음기회사 주최)에서 교향시「청년(青年)」으로 1위 없는 2위로 수상하였다. 이처럼 이건우는 그 당시 “누구보다 주목을 받는 천재작곡가로 일컬어진 그 자신의 스승인 스가타 이소타로오(1907~1952)와 이치카와 토시하루(1912~1998)와 함께 마지막까지 경합했음”은 놀라운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 같은 관점에서 이건우 작곡가는 한때나마 일본의 음악인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고, 그 무렵 일본 음악계에서 독일파의 거장으로 평가받던 작곡가 모로이 사부로(諸井三郎, 1903~1977)가 그의 스승이었을뿐더러 당대 음악계의 거장들이 격찬한 조선 유학생으로서 가장 촉망을 받는 인물이었다.
모름지기 해방공간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며「자장가」,「산유화」,「진달래꽃」 등의 작곡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던 당시 조선 제1의 작곡가 김순남(金順男, 1917~1986)과 양대 산맥을 구축하고 뒷날 일본음악문화 협회에서 작곡가로 활동하다가 강제징집을 피해 1943년 귀국 후인 1944년 개성공립고등여학교와 또 강릉공립고등여학교의 음악교원으로 재직 중 광복(光復)을 맞았다. 그러던 그가 어떤 심경((心境)의 변화인지 서울로 생활근거지를 옮겨 김순남과 교유하면서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한 음악을 추구한다는 명분 아래 이념의 늪에 빠지게 되고, 그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되었다가 한국전쟁 직후 출감되었으나 자진 월북하였다.
특히 한국전쟁이 끝나고 5·16군사혁명 이후의 대한민국은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던 엄혹한 정치 상황이라 이건우란 이름조차 감히 입에 올릴 수 없는 정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서울 올림픽 유치 관계로 1988년 이후에 해금(解禁)이 완화되어 이건우가 작곡한 가곡을 듣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또 그 자신이 남긴 김소월·정지용·박세영의 시편에 선율을 붙인 빛나는 가곡은 한국적인 정서(情緖)가 다분히 묻어나 처연(悽然)한 분위기(情調)다. 또 여기서 빛바랜 이념논쟁은 접어두고라도 역사 속에 묻혀있던 비운의 그 자신을 소환(召喚)하여 새롭게 조명하는 작업은 그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그 같은 현상에서 월간『작은 책』(2007년 6월)에 노동은 중앙대학교 교수의「시대를 빛낸 문화예술가-김순남과 이건우」에 관한 중량감 실린 논고는 흙 속의 진주처럼 못내 빛날 존재감으로 그 정체성이 확증된다.
이 같은 여세의 추이(推移)로 2023년 6월 9일 자『강원일보』(14면)의「강원도 클래식 음악가 열전」에서 “정치적 이념에 월북 택한 비운의 천재, 이건우 작곡가”의 고교 후배로, 춘천고등학교 43회 졸업생인 이영진 음악평론가의 남다른 복원을 위한 집념은 가늠할 일이다. 특히 춘천고(15회) 동문으로 한국 근현대미술의 거장인 조각가로 함경남도 함흥태생인 권진규(權鎭圭, 1922~1973)보다 몇 해 앞서 유학한 이건우는 같은 연배의 윤이상과 나운영과도 함께 유명세를 날린 작곡가였으나 자진 월북도 그렇지만, 그간에 블랙 리스트의 경계 인물로 반세기 남짓 망각의 실체였다. 그렇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일깨움처럼 이건우의 위대한 예술행적은 뒤늦게나마 2025년 9월 9일 자의『경인일보』의「말살에도 문화는 꽃폈다 – 민족작가들의 노력(항일의 기억, 광복의 기쁨/12)」에서 “노영호가 간행한 항일의지를 담은 창가 7곡이 수록된『槿花唱歌』(근화사, 1921)를 노동은(魯棟銀, 1946~2016) 중앙대 교수가 소장했다가 그 후 유족이 2019년 평택시에 기증하여 지난 2022년 행정적으로 경기도 등록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라는 기사도 결코 이와 무관치 않다.
각론하고 이건우의 경우, ‘피가 뜨거운 젊은 시절 정치적 이념에 이끌려 월북하였기’에 한국음악사에서 불행하게도 베일에 가려진 존재였다. 그의 가정은 비교적 경제력이 여유로움에도 1927년에 보통학교를 남들보다 늦은 9살에 입학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참고로 ‘덕흥보통학교(현 호산초) 졸업증서 대장에는 1917년 6월생으로, 춘천고등보통학교(현 춘천고, 10회) 학적부에 1919년 8월생으로 표기돼 있음’도 이건우 연구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지니고 각별하게도 천착(穿鑿)했던 노동은 교수(중앙대 국악대학 창작음악과)의 검증 결과다. 일단 연유야 어떠하던 그 자신은 덕흥보통학교를 마치고 1933년 4월, 삼척에서 276㎞나 떨어진 춘천고보에 입학하였다. 지정학적으로 강원도 동해안에 있는 읍소재지 가운데 최남단의 원덕읍은 행정 편의상 경상북도 울진군에 인접하였고 도청 소재지도 강원도청보다 경상북도청이 훨씬 가까운 위치에 있는 처소였다.
또 한편 그의 보통학교 재학 당시 전 교과목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성적은 창가(唱歌)였고, 춘천고보 입학 당시 상급학교 진학을 삶의 좌표로 설정한 까닭에 ‘강원도청 소재지의 교육 수준과 문화적 환경을 염두에 두고 춘천으로 유학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주어질 것이다. 따라서 그가 상급학교 진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중요 인물은 재학 당시 음악교유(敎諭, 현재의 교사)인 후이지 슌지(藤井俊治)다. 훗날 이건우 자신도 ‘시간·장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정열을 다했다.’라며 그 스승의 한결같은 가르침에 감사하였다. 또 하나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후이지 슌지 선생에게 지도받은 바이올린은 훗날 작곡의 동기부여(動機附輿)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차제에 우연의 일치일 것이나 동시대의 동경유학생인 홍천태생으로 강원도 최초의 일본 음악(성악 전공) 유학생인 하대응(河大應, 1914~1983)과 이건우의 음악 행적은 비교적 상이(相異)하다. 일단 하대응의 부친이 농업에 종사한 환경에 견주어 이건우의 부친은 어선 수척을 거느린 넉넉한 재산가였다. 또 한편 두 사람은 보통학교를 마치고 도시(서울과 춘천)에서 유학한 일, 현악기 중에 바이올린을 익히며 음악적 영감을 받았고, 일본 유학을 함께 한 그 자신은 하대응과는 달리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이데올로기, ‘피아노의 시인 쇼팽’처럼 민족주의의 몰입으로 순수한 창작의 예술혼을 못내 불태운 인물이다.
까닭에 광복을 맞아 마치 강원도 강릉태생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 저항 시인인 초허(超虛) 김동명(金東鳴, 1900~1968)이 한국의 대표적인 작곡가 김동진(金東振, 1913~2009)과 사제 간의 연(緣)을 맺었듯 이건우는 경기중학교 재학 당시 뒷날 국제적인 전위(前衛)예술가로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 장르를 창안한 백남준(白南準, 1932~2006)과도 사제 간의 소중한 연을 맺었다. 당시 백남준은 음악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 이건우의 각별한 지도를 받으며 이 시기에 놀랍게도 다섯 개의 곡을 작곡한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다. 뒷날 백남준은 ‘한국음악의 르네상스기’라는 거창한 표현을 거론할 때마다 이건우와 김순남에 관한 남다른 감회를 떠올리며 깊은 감사의 마음도 잊지 않았다. 또 한편 그 자신은 1945년 해방이 되는 해에 ‘당대 최고의 음악 스승’ 이건우를 만나게 되어 작곡을 지도를 받으며 새로운 음악을 공부하는 기회를 얻었음도 놀랍거니와 이건우 선생을 통해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곡가 아널드 쇤베르크(Arnold Schonberg, 1874-1951)의 음악 세계 또한 접하게 되었다. 까닭에 전통 고전음악을 공부하면서 틀에 박힌 듯한 질서정연함에 싫증이 났던 그 자신은 새로운 기법의 현대음악을 접하게 되면서 비로소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맛보았음을 기억에 오래 담아 깊이 술회(述懷)하였다.
따라서 의식이 깨어 있는 민족주의자로서 광복 직전에 월북하였지만, 그 이건우 작곡가의 창작기법은 한국가곡의 차별성을 지닌 지대한 업적을 남겼음도 그렇거니와 서양음악의 조성 체계에 비춰 한국가곡의 서정적 선율과 애상적 장단에 그 표현의 한계성이 있음을 파악하고 민족 고유의 멋과 정감을 놀랍게도 대중에게 선보이는 동기를 부여했다. 또 한편 우리 음악사에서 가곡이 뜻하는 시대적 의미는 일제강점기의 끝 무렵인 해방공간 전후 작곡되었음을 몸소 결과물로 실증해주었다. 이처럼 그 자신이 추구한 작곡 방향과 탄탄한 작곡어법은 한국가곡의 정체성 확립과 한국가곡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기틀의 마련으로 평가받기에 이른다. 그 같은 양상에서 월북 이후에 그 자신의 주요 경력으로 ‘1944년~1945년 개성공립여자고등학교와 강릉공립고등여학교 재직 당시인 1946년과 47년「이건우작품발표회」개최를 하고, 1954년~1959년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과 1960년~1973년 조선음악가동맹 창작실 작곡가로 다시 1974년~1989년 황해북도예술단 작곡가를 역임한 뒤에 작고할 때까지 평양에서 줄곧 거주하였다. 또 한편 이건우 작곡가는 1950년 월북하여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념문제와는 의식적으로 철저히 거리를 두고 오로지 창작 음악에만 전념(專念)하였으나 한 때는 남로당 계열의 작곡가로 알려져 한때는 북한 정권의 탄압을 당하였다. 그 이후 1990년부터 평양의 윤이상음악연구소 명예연구사로도 활동하였으며 그간에 줄곧「창성은 좋아」,「소년 빨치산의 노래」,「동백꽃」,「포위섬멸의 노래」,「노호하라, 남해바다여」등 무려 200여 곡의 가곡을 다양한 종류와 형식으로 창작했음은 지극히 이채롭다.
무엇보다 지난 2019년 3월 28일 ‘3.1운동 100주년 기념 및 뉴욕주 3.1운동 기념의 날 제정 경축 기념행사’인 머킨 콘서트홀의 음악 콘서트에서 비운의 천재작곡가 이건우의 민요적 색채가 짙은 가곡「금잔디」도 뜨거운 갈채 속에서 공연되었다. 한편 2020년 6월 30일「연합뉴스」의 송광호 기자는「작곡가 이건우 월북 이전 작곡한 가곡 전곡 복원」, '다시 부르는 노래 이건우 가곡' 발매를 기사화하여 실체가 상실된 그의 존재감을 일깨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자신이 월북 전에 작곡한 가곡 전곡을 복원한 음반이 국내에서 첫 발매가 된 정황도 그렇거니와 서울출생으로 작곡가며 피아니스트인 김순남, 정작 조국으로 외면을 당한 경남 통영출생으로 세계적인 현대음악의 작곡가 윤이상(尹伊桑, 1917~1995)과 함께 해방공간에서 활약한 그 자신이 월북 이전에 남긴 가곡 전곡(월북 이전에 남긴 14곡의 가곡과 월북 후 작곡한 1곡 등 15곡)을 복원하여 최근 발매한 음반「다시 부르는 노래 이건우 가곡」을 통해 ‘인생을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그 역설(逆說)은 한층 더 유의미하다.
차제에 그 자신이 1948년 가곡집「금잔디」(5곡),「산길」(6곡),「베이스를 위한 연가곡집」(3곡)을 발표한 곡들이 다행스럽게도 앨범에 수록됐다. 모처럼 앨범에 포함된 나머지 한 곡인「동백꽃」은 월북 7년 후인 1957년에 월북 시인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인「애국가」를 작사한 박세영(朴世永, 1902~1989)의 시를 작곡한 것으로, 삼팔선 이남에 남겨둔 사랑하는 가족을 애타게 그리며 쓴 가곡이다. 까닭에 최영식 한국가곡연구소장은 "이건우가 추구한 작곡 방향과 탄탄한 그의 작곡어법은 한국가곡의 정체성 확립에 기준을 제시했다. 그의 작품을 음악적 자료로 남겨 보존할 가치가 있어 앨범 작업과 가곡집 출간을 진행했다."라고 깊은 감동 뒤 눈물겹게 술회(述懷)하였다.
또 한편 1997년에 묶어낸 이건우의 작곡집『동백꽃』에는 대표작 25곡이 수록되어 있으며「동백꽃」,「몽금포의 배노래」,「고향의 봄」이 그 같은 일례다. 특히 박세영의 가사에 곡을 붙인「동백꽃」은 1957년에 작곡한 가곡으로 그간에 월북 이전의 작곡어법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다정다감이 묻어나는 가곡이다. 따라서 북한에서 결혼한 북한 최초의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로 1937년 일본 도쿄(東京) 무사시노(武藏野) 음악대학(피아노 전공) 출신으로 다시 1953년 최우등으로 레닌그라드 음악대학을 영예롭게 졸업한 황해도 해주태생인 문경옥(Mun Kyongok, 1920~1979)은「동백꽃」을 작곡한 배경을 그녀의 자서전에서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과 가족을 애타게 그리는 마음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곡으로 북한에서는「그리운 금강산」만큼이나 사랑받는 노래임’을 언급하면서 비록 정확한 연대는 미상이나 북에서 재혼한 남편 이건우와 함께 민족의 통한으로 가슴을 저며주는 가극(歌劇)「원한의 분계선」을 작곡하였다. 이처럼 북한 최초의 여성 작곡가로서 ‘섬세하고 소박한 정감, 밝은 서정성과 가벼운 율조(律調)로 채색된’ 6편의 교향곡을 비롯해 69편의 성악곡, 그리고 수십 편의 피아노 협주곡(協奏曲)을 남긴 존재감 빛나는 실체이다.
특히 1949년의 봄, 김일성 주석이 레닌그라드를 방문할 때 문경옥은 그 자신에게 유학을 직접 챙겨준 김주석을 환영했다. 또 이날의 환송식에서까지 ‘작곡을 많이 하라’는 각별한 김주석의 배려에 보답하기 위하여 1950년 8월 창작한 피아노소나타 「영웅」을 헌납하였다. 비록 1947년 8월 28일 제2기 소련 유학생의 일원으로 평양을 떠나 마침내 레닌그라드 음악대학에 진학했기에 3학년 재학생의 창작한 곡이었지만 소련작곡가동맹회관 공연에 초청되어 환호를 받았고, 소련의 언론은 ‘조선의 어린 여성 작곡가의 출연을 신선한 충격이다.’라고 보도해 주었다. 또다시 1951년 조국이 전화(戰禍)로 불타는 그 현상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작곡한「승리」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교향시 서곡이다. 놀랍게도 이 곡은 그해 12월 소련작곡가동맹 제6차 대회 작품발표회에서 쇼스타코비치(Dmitri Dmitriyevich Shostakovich) 등 세계적인 작곡가들의 작품과 함께 연주됐으며 청중의 반응이 뜨거워 그녀는 무대에 3번이나 올라 인사를 해야 했다.
모름지기 문경옥은 1953년 7월 귀국길에 올랐고 평양국립예술극장 소속으로 배치가 됐다. 다시 그 이듬해에 그 자신은 평생의 역작이 된 뮤지컬「솔개골 사람들」의 작곡을 끝냈으며, 인연의 끈은 그녀의 귀향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영화「소년 빨치산의 노래」의 작곡가인 이건우와의 우연한 만남이 이뤄졌다. 당시 그 자신도 평양국립예술극장에 재임 중이었을뿐더러 수차에 거쳐 그녀의 뮤지컬 창작에도 적극적인 도움을 준 관계로 마침내 천재 시인 백석(白石, 1912~1996)의 첫 부인이었으나 유산(流産)문제로 고부(姑婦)간의 갈등을 겪다 이혼한 문경옥 작곡가와 1955년 1월 4일 결혼하여 마침내 여생을 함께한 인생의 길동무가 됐다. 뒷날에 노동은 교수는 본격적인 연구논문「이건우의 삶과 예술」에서 이건우 작곡가를 ‘동백꽃’을 사무치게 노래한 음악인임을 전제(前提)하고 “「동백꽃」은 해방공간의 이건우 어법과 달리 조성적인 것은 모두 북쪽의 미학관에 바탕을 두고 소통의 음악 창작을 한 결과다. (136쪽)”라고 작곡의 모티프를 합리적 해법으로 밝혀주었다.
뒷동산 동백꽃 피는/내 어머니 사시는 그곳/맑은 시내물도 정을 담아 흘렀네.//
산이 첩첩 높아서 넘지 못하나/넓은 바다 막히어 내사 못가나.//
가시덩굴 엉키인 고향이기에/붉게 타는 동백꽃 내 마음인줄 아시라.//
뒤동산에 동백꽃 피는/내 어머니 사시는 그곳/고향 그리운 마음 향기되어 풍기라//
-「동백꽃」에서
이처럼 불멸의 예술혼에 의해 그나마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인 북녘땅에서도 이건우가 “민족을 위한 참다운 음악 창작의 길에서 이룩한 보배”로 평가받는 연유이다.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창작 장르는 “양악 기법을 새로 적용하여 민족 언어에 바탕을 두었기에 작품창작과 음악의 다양한 종류와 형식을 민족의 정서 표현에 알맞게 창조한 작곡가”로 평가된다. 이처럼 그 자신의 대다수 작품은 그 색조가 민요적 음계와 리듬에서 도출되었음에도 대조적으로 민요적 리듬과 가락은 절제되는 분위기다.
각론하고 1988년 11월 28일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해금 가곡제에 참가해서 “만약 분단의 비극이 없고 이건우와 김순남의 경우 그들의 작곡 활동이 순탄했다면 작곡가 바르토크 벨라(Bartók Béla, 1881~1945)나 졸탄 코다이(Zoltán Kodály, 1882~1945)가 헝가리 민족의 자랑이 된 것처럼, 우리 민족의 음악 유산으로 자랑할 업적을 남겼을 것이 자명하다.”라는 음악평론가 박용구의 담담한 감회(感懷)는 또 하나의 신선한 충격이다. 무엇보다 한층 심장이 울컥한 사실은 “저는 일본에서 가장 발전된 서양음악의 작곡기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내 고민은 민족음악의 토대가 없는 속에서 먼저 서양의 작곡기법을 체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편 음악적인 예능, 그 자신의 작곡기법이 민족성의 확립에 장애가 되었다는 그였지만, 남쪽에 남겨둔 두 자녀에게 대한 애틋한 감정을 평생 잊지 못하였다. 한편 월북작곡가 김순남과의 운명적인 만남도 그렇지만 남쪽에 남겨놓고 헤어진 5살 귀염둥이 딸을 뒤늦게 접한 것은 평양 공연을 위해 서울전통음악단에 동행했던 한 기자가 건네준 1991년 북한 정부로부터 기증받은 피아노 앞에서 찍은『한겨레신문』지면을 통해서다. 까닭에 무심한 세월이 흘러 어린 딸 종애(婃愛)는 40대의 성숙한 여인인 그 자신 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배낭 위에 얹고서라도 모두 데려올 것을.”이라며 울먹이다 끝내 눈망울을 붉혔다. 또 그날 그 자리에 함께했던 이건우 작곡가의 고향인 삼척 원덕면 출신인 장을병(張乙炳, 1933~2009) 성균관대학교 총장과의 극적인 만남은 눈물겨운 장면을 연출한 또 한편 감동의 드라마였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현상은, 기적과도 같이 ’서울 올림픽‘ 개최가 확정된 국제 관계로, 1988년 무렵까지 일체(一切)로 금지됐던 월북작곡가의 여러 가곡이 정치적으로 해금(解禁)되면서 그 나름으로 김순남, 안기영의 경우, 실질적으로 지대한 관심을 불러준 정황에 견주어 상대적으로 안타깝게도 그 역량(力量)이 한층 더 지대한 이건우 작곡가는 비교적 큰 관심을 얻지 못하고 지극히 소홀하게 외면된 현상이었다. 까닭에 그간에 월북작곡가에 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음에도 사실상 이건우에 관한 연구는 해방공간에서 민족음악 정립을 위해 가장 공과가 뚜렷한 실체였지만, 현실적으로 그 결과는 더없이 실망감을 안겨준 결과일 따름이다. 일단 연유야 어떠하든 그 같은 맥락에서도 동시대의 작곡가 중에서 그가 남긴 업적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각별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이처럼 이건우가 주로 작곡한 예술가곡에 견주어 전반적으로 작곡기법과 민요적 색채가 특징적으로 잘 드러나는 가곡집「금잔디」와「산길」은 응당 예외 없이 연구 대상으로 비중 있게 분할·검토되어야 할 과제임에 틀림이 없다. 그 같은 일면에서 일차적으로 그 자신의 음악적 생애를 개괄적으로 검토하는 반면, 서양 예술가곡의 배경과 한국 예술가곡의 배경, 그리고 예술가곡의 음악적 특징에 관한 연구 차원에서 그간에 선행 연구자에 의한 결과물은 더없이 유의미하다. 차제에 전반적으로 그 자신의 곡에 관한 분석결과가 ‘자연을 소재로 하여 님에 대한 그리움이나 과거에 관한 아쉬움을 표현하되 다소 경향적인 성격의 시를 소재로 사용한 것과 시의 내용이 길거나 서사적일 경우에 빈번한 박자와 템포의 변주(變奏), 그리고 민요적 색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곡의 처리’는 비중 있게 식별할 점이다.
어디까지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에 맞물린 지극히 기이한 운명일 것이나 작곡가 김순남은 1917년 서울 낙원동에서 태어났고, 동갑내기 윤이상은 경남 산청에서 출생하고 통영에서 성장했다. 또 같은 운명의 공동체인 두 살 아래 이건우는 강원도 삼척이 고향이다. 한편 청년기부터 작곡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던 김순남은 해방공간에, 또 이건우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월북하였다. 또 한편 윤이상(尹伊桑, 1917 1995)은 1956년 파리를 거쳐 독일로 유학한 직후, 유럽 현지에서 현대음악가로서 명성을 쌓아가던 중 불행하게도 1967년 동베를린의 간첩 사건에 연류되어 국내에 소환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년간의 복역 중에 국제적 항의와 독일 정부의 도움으로 인해 석방됐으나 이후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디아스포라(Diaspora)로 살다가 통한(痛恨)의 삶을 마감했다. 그간에 안타깝게도 이 3인의 위대한 작곡가는 해금되기 전까지 한국음악사에서 이름 세자가 지워지거나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은 상태이다.
각론하고 참담한 시대적 상황에서도 국제적으로 활동하며 음악계에서 ‘매혹적 목소리, 세계무대 날개 달았다’로 평가되는 재독 성악가인 서예리(1976년생)가 그간에 남북이 고립된 정치적 문제로 불행하게도 한국의 문화예술계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던 ‘김순남과 이건우, 윤이상의 가곡’을 ‘세 분의 음악은 절절히 와닿아’ 스승인 최영식의 소개로 접하게 된 ‘북으로 간 작곡가 김순남·이건우, 그리고 윤이상’의 작곡을 해외 독창회 때 서예리 성악가가 앙코르곡으로 열창해 주었다. 그 같은 일면에서 ‘서정성에 맞춘 작품들로 공연’을 수차례 이어왔다. 까닭에 이 같은 뜻깊은 추모의 정이 잇닿아 상상만으로도 가슴 뛰는 연주회가 2019년 12월 27일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열렸다. 모처럼 기획되어 성황리에 막을 내린 이 공연은 지난 1월 11일 개최된「2020 남북문화예술교류 포럼」의 하나로 기획되었고 시행된 국가 차원의 뜻깊은 행사였음도 다시금 주지할 점이다.
그간에 보편적으로 통일문학이 심도 있게 논의되는 이 같은 현상에서 필자가 2024년에 김의중 작가의 소설 평설인「유년의 수채화-달빛 아래서, 그 이별 뒤의 정한(情恨)」에서 기술하였듯이, 2016년에 북한 당국이 금지곡으로 지정한「우리의 소원(안석주 작사, 안병원 작곡)」(1947)을 한순간 충동적으로 부르고 싶은 것이 솔직한 관심사(關心事)임에 틀림이 없다. 앞서 영화감독인 부친 안석영(安夕影, 1901~1950)의 작사를 작곡하고 지휘자로 활동한 안병원(安丙元, 1926~2015)이 작고(作故)하기 전인 2013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제「우리의 소원」이 불리기를 더는 원치 않는다.’라던 그 의미가 분별이 되기에 비장감(悲壯感)이 묻어난다.
또 한편 이건우에 관해 학문적 연구를 체계적으로 감당할 후학이라면 선행 연구자료로 인문사회예술융합학회의 학제간연구에 경희대학교 구수영, 홍성규 교수의 공동연구물인 2021, vol. 43, no. 6, 통권 82호에 수록된 학제 간 연구논문인「해방 시기 작곡가 이건우 예술가곡작품의 음악적 특징-가곡집『금잔디』와『산길』을 중심으로」(Musical Ccharacteristics of Art Songs Composed by Lee Kun-woo during the Period of Liberation : Focusing on the Collections 『Kum-jan-di』and 『San-gil』」(문화와 융합 v. 43 no. 6. 2021년, pp. 167-195)에서 편의상 지면 관계로 논문초록(abstract)을 옮겨 참고키로 한다.
모름지기 “1988년 금지되었던 월북작곡가들의 곡이 해금되면서 작곡가 김순남, 안기영 등은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반면에 이건우는 비교적 큰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또한, 지금까지 월북작곡가들에 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건우에 관한 연구는 비교적 미비하다. 이건우는 해방공간에서 민족음악 정립을 위해 노력한 작곡가 중 빼놓을 수 없는 작곡가임이 분명하다. 본 연구에서는 이건우가 해방 시기에 작곡한 예술가곡 중 작곡기법과 민요적 색채가 특징적으로 잘 드러나는 가곡집『금잔디』와『산길』을 연구 대상으로 선정하여 가곡집에 수록된 총 11곡의 음악적 특징에 대해 알아보았다. 먼저 이건우의 음악적 생애를 개괄적으로 알아보고 서양 예술가곡의 배경과 한국 예술가곡의 배경, 그리고 예술가곡의 음악적 특징에 대해 알아보았다. 다음으로는 그의 가곡집『금잔디』와『산길』에 수록된 곡의 음악적 특징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분석하였는데, 첫 번째로 자연을 소재로 하여 님에 대한 그리움이나 지나간 시간에 관한 아쉬움을 표현한 것을 알 수 있었고, 가곡에서는 흔히 나타나지 않는 경향적인 성격의 시를 소재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시의 내용이 길거나 서사적일 경우 빈번한 박자와 템포 변화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마지막으로 민요적 색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곡이 있음을 발견하였다.”라는 이 계통의 참고할 학술자료로 관심 있게 챙겨 분별할 점이다.
3. 자유로운 영혼과 극명한 예술혼
특히 한국가곡사(韓國歌曲史)에서 이건우 작곡가의「자유로운 영혼과 극명한 예술혼」에 결속된 그 족적(足跡)은, 그 자신이 직접 작곡한 작품으로 확증될 것이나 제작 연대순의 기록을 빌리면, 1940년의 교향시「청년」과 바이올린 조곡, 1946년의「민전행진곡」(임화∙김광균∙오장환∙김기림 작사)을 포함한「반전가」(이건우 작사),「스케치」(관현악),「여명의 노래」와 피아노 소품, 1947년「베이스를 위한 연가곡」,「심화」,「피」,「노들강」(박아지 시),「진달래 피는 나라」, 합창곡「자유의 종소리」(3∙1 기념가) , 1948년의 가곡「가는 길」(김소월 시), 가곡「금잔디」(김소월 시), 가곡「꽃가루 속에」(이용악 시), 가곡「붉은 조수」(김소월 시), 가곡 「빈대」(이병철 시), 가곡 「산」(김소월 시), 가곡 「산길」(박산운 시), 가곡「소곡」(정지용 시), 가곡「엄마야 누나야」(김소월 시), 가곡「자장가」(박세영 시), 가곡「추풍령」(박산운 시)을 비롯해서 지극히 안타까울 따름이다.
또 한편 연대 미상인 작곡으로는「노호하라, 남해바다여」(관현악, 합창),「높이 들자 항쟁의 기치」,「소년 빨치산의 노래」, 가곡「동백꽃」(박세영 시), 가곡「통일의 봄맞이」, 가극「원한의 분계선」(리건우∙문경옥 공동 작곡), 기악곡「광명의 봄을 그리며」, 기악곡「조국을 그리는 마음」, 기악곡「행복한 마을에서」, 신민요「몽금포의 배노래」, 신민요「창성은 좋아」(리봉학 시), 칸타타「하나 된 조국을 위하여」등을 포함한 다수의 작품이 있음은 호흡을 가다듬고 묵언으로 응시(凝視)할 일이다.
차제에 이건우 작곡가의 생애와 경력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약술(略述)하면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민족적으로 수난을 겪던 일제강점기에 강원도 삼척 원덕에서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비교적 온순한 성격과 품행이 바른 그 자신은, 음악가의 꿈을 키우며 1938년 3월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도일하여 마침내 일본 유학생으로 동경고등음악학원(쿠나타치 음악대학원의 전신으로 현 국립음악대학)의 작곡부에서 수학한 엘리트 음악인이다. 또 한편 그 자신의 일본 체류 당시 수학 과정은 ‘1938년~1939년 동경고등음악학원(東京高等音楽学院)(현 구니타치음악대학), 1939년~1943년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東京帝國高等音樂學校) 기악부(바이올린 전공) 졸업으로 정리된다. 특히 일본 유학 중 학생 신분임에도 1940년 일본 마이니치신문사(海日新聞社) 주최 제9회 일본음악콩쿠르 작곡부에서「바이올린 조곡」으로 3위 입상하였으며, 1942년 요미우리신문사(讀賣新聞社)와 동보영화사가 공동주최한 제1회 교향곡 현상모집에서 교향시「청년」으로 2위에 입상하였다.
모름지기 1943년 귀국한 후 군 징집을 피해 강원도 양양에서 잠시 도피 생활을 하다가 1944년 개성고등여학교 음악교사를 거쳐 강릉고등여학교에서 음악교원 생활을 하던 중에 광복의 새날을 맞았다. 해방 직후에 서울로 돌아와 해방가요「여명의 노래」와 통일전선 조직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노래인「민전행진곡」을 작곡했다. 한편 1945년 우리나라 최초의 창립인「조선음악건설본부」는, 이른바 순수음악계에 종사했던 인물이 중심축을 이룬 이 단체의 수장으로『조선음악통론(朝鮮音樂通論)』의 저자로 광복 이후 창악인(唱樂人) 중심으로 설립된「국악원」(대한국악원의 전신)의 초대 원장인 함화진(咸和鎭, 1884~1949)을 포함하여 최연소 그룹인 20대 기수인 이건우, 김순남, 박은용도 함께 뜻을 모았고, 1946년에 조선 음악아카데미즘 수용 목적의「음악가의 집」 회원으로서「이건우 작곡발표회」도 개최되었다.
한편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조선음악건설본부」가 불법화 조직체로 인정되면서 이건우는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다. 이 같은 혼돈의 시간대에서 그 자신은 조용히 침묵하며 현실을 응시하는 따뜻한 감성의 예술가가 아니라 심장이 뜨거운 혈기에 찬 민족의 혁명아였고, 예술혼(魂)의 소유자였다. 까닭에 그 자신은 주저함 없이 순수한 음악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다른 일면에서 겨레의 노래이자 맑은 영혼의 예술 작품을 끊임없이 발표하였고, 그 나름으로 ‘불멸(不滅)의 예술혼’으로 승화된 정체성을 확장하였다. 그 같은 양상(樣相)은 1946년 9월에 조직된 ‘음악가의 집’에서 김순남, 김원복, 정희석과 함께 이건우는 동경 유학세대 중심으로 실내악 운동을 펼친 행위에서도 더없이 입증된다. 이처럼 그 자신은 음악동맹 서울지부 서기장으로 제1회 근로자 음악경연대회(1947년)를 직접 기획하였으며, 1948년 4월 박용구, 신막, 안기영, 박은용과 함께 105인인 김구(金九, 1876~1949),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의 북행에 따른 남북 대화 지지성명도 주도하였다.
그간에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지대한 공적의 소유자임에도 이념의 문제로 철저하게 소외된 이건우의「월북 이후 북한에서의 삶과 예술」의 족적(足跡)을 그 나름으로 고뇌하며 일관된 집념(執念)으로 어렵게 검증하고 체계적인 연구논문으로 정리해준 노동은(魯棟銀) 교수의 학문적 공적은 필자 그 나름의 지극히 합리적이고 지대한 결과임에 틀림이 없다. 까닭에 ‘이건우 작곡가의 체포 직전인 1948년 5월과 11월에 각각 발행한 두 편의 가곡집『금잔디』와『산길』은 김순남의 가곡집『산유화』와『자장가』에 맞물린 해방공간 민족음악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되는 작품집이다.
그렇다. 앞서 몇몇 평자들이 민족의 애한(哀恨)을 절절히 읊조린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 1902~1934)의 깊은 정감이 응축된 시편으로 ‘죽은 이(또는 떠난 이)에 대한 그리움과 이별의 슬픔을 자연의 이미지로 표현한 시편’으로 “잔디 잔디/금잔디/심심산천에 붙은 불은/가신 임 무덤가에 금잔디(생략)”를 작곡한「금잔디」는, 김순남의「산유화」와 함께 민족 미학을 완숙하게 표현한 이건우의 대표 작품이다. 또 한편 민요적 색조(色調)가 한층 더 조화롭게 처연(悽然)할뿐더러 형식상 단조로우나 깊은 정감이 묻어나는 밤의 산길을 읊어낸 월북한 박세영(朴世永, 1902~1989) 시인의 시편인 “그리움에 못 이겨 가는 산길에/울음 우는 작은 새 나를 반기고/이름 모를 꽃포기/피어있네, 피어있네.(산길)”은 그 자신의 대표 작곡에 결속(結束)된다.
특히 1948년에는 가곡집『금잔디』와『산길』을 발간한 이건우 작곡가는 김순남, 박영근 등과 함께 앞서 1945년 9월에 발기된「조선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과「조선음악동맹」에서 중앙위원으로 프롤레타리아 음악운동 또한 열중하다가 1949년 9월 좌익 인사 검거의 강화로 구속되었고, 마침내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말에 형무소에서 풀려난 이건우는 월북과 함께 빈도수 높게「소년 빨치산의 노래」,「안해도 전사처럼」,「우리의 자랑」 등을 전시 가요로 발표하였다. 무엇보다 이건우의 월북은 그의 가족에겐 감당할 수 없는 현실적 고통이었다. 까닭에 아들 종욱(鍾旭)은 서울의 중앙고등학교와 홍익대학교 건축미술학과를 졸업하고 군 복무도 마쳤지만, 그간에 주위의 싸늘한 시선과 ‘빨갱이 자식’이란 감당할 수 없는 냉소로 끝내 불교에 귀의(歸依)하고 10여 년간의 수행 중 1980년대 중반 승려가 되었음도 그렇거니와 따님인 종애(婃愛) 역시 정상으로 사회생활을 이어갈 수 없어 질고(疾苦)와 통한(痛恨)의 세월을 눈물 속에서 흘려보내며 고뇌의 긴 밤을 지새웠다.
모처럼 가슴 아픈 시대적 상황에서 작곡가 이건우는 1953년「조선작곡가동맹」이 결성되자 중앙위원회 중앙위원(위원장 이면상)이자 동시에 부위원장으로 선정되어 그 나름의 활동을 이어갔다. 또 한편 1954년 이후에는「조선음악가동맹」의 부위원장, 그리고 1960년부터는「조선음악가동맹」창작실 소속 책임작곡가로 중임을 담당하였으나 1953년 북한 정권으로부터 숙청되었다가 1960년 복권되어 성악곡과 가극, 기악곡을 폭넓게 발표하며 작곡할 창작활동을 벌려 뒷날 공훈예술가로 대접받는다. 또 한편 1974년부터 황해북도예술단 작곡가로 있으면서 여러 가극 창작에도 그 역할을 담당하였고 1990년 평양의 윤이상음악연구소 명예연구사로 임명되었고, 200여 곡에 이르는 작품을 창작했다. 1997년에 작곡집『동백꽃』을 발표했다. 무려 그 자신은 전통적인 수법과 현대적인 작곡기법을 절충하면서도 가곡이 지닌 서정성을 추구하며 현대적인 열기를 담대하게 풀어내는 차별성을 지닌 작곡가로서 우리나라 근현대음악사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되고 있다.
까닭에 1990년 10월 범민족 통일음악회에 참석하여 사실상 남쪽의 서울전통예술단의 가이드 역할도 곁들였다. 이처럼 열정적으로 켜켜이 자신의 집념을 지켜낸 끝에 1997년 12월에 작곡집『동백꽃』을 발행하던 중 1998년 2월 22일 병으로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삶을 마감하였다. 차제에 불운한 삶에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1년 뒤인 1999년 11월, 북한 당국에 의해「리건우음악회」가 평양 윤이상음악당에서 북쪽의 수많은 창작가와 다수의 예술인이 참석한 가운데서 성황리 개최된 것은 또 하나 역사적 사건이다. 어디까지나 그 자신이 다사다난(多事多難)한 삶의 일상에서도 초지일관(初志一貫) 지켜내며 끝내 긴장의 끈을 예술의 투혼으로 결코 늦추지 아니하고 무려 200여 편의 창작곡을 발표하며 예술 활동의 적극적 참여는 더없이 신선하고도 놀라운 충격일 따름이다.
각론하고 이건우 작곡가의 선행 연구자인 노동은 교수가 연구논문인「이건우의 삶과 예술-‘해방공간 시기 이건우의 삶과 예술’」에서 지적하였듯 ‘해방이 되자 이건우는 뒤늦게 서울로 올라와 김순남과 함께 작곡가로 음악운동을 하였다. 30대 전후 일본 유학생 출신들인 신진 음악가들이 중심이 되어 1945년 8월 16일에「조선음악건설본」가 건설되면서 이건우는 작곡부 위원으로 활동하며 “봄이 왔네 봄이 왔네/무궁화 강산에 봄이 왔네”라는「여명의 노래」를 작곡하여 전국에 유명 작곡가가 되었다. 용아(龍兒) 박용철(朴龍喆, 1904~1938) 시인의 시를 작사한 이 곡은 당대의 테너 이인범과 소프라노 마금희, 그리고 서울합창단(최희남 지휘)과 취입한 음반으로 전국으로 퍼졌고, 또『임시중등음악교본』(1946)에 게재되어 전국으로 그이의 이름과 노래가 단숨에 알려졌다.’를 짐짓 호흡을 가다듬고 깊이 헤아릴 바다.
또 한편 진정한 학자적 양심의 눈부신 편린(片鱗)이랄까? 격동의 시간대에 개념도 모호한 이념의 문제로 그 존재감이 잊혀 실체가 불투명한 인물에 관한 연구로 고뇌의 밤을 밝히며 고증과 탐색 끝에, 2009년 4월 한국가곡연구소 창립기념으로 개최된 제1회 학술세미나에서 노동은 교수가「이건우의 삶과 예술」의 원전비평(原典批評)이라 칭해도 지나치지 않을 본격적인 연구논문을 발표하고 또 곁들인 행사로 이건우의 미발표작이 소프라노 김인혜 서울대 성악과 교수와 베이스 김민석 서울대 성악과 강사에 의해서 초연(初演)된 행사일지라도 못내 그 의미와 가치는 지대하다.
모름지기『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모임 오작, 2019) 15호의 특집은 여러 세대의 의견과 주의 주장을 다양한 형태로 구도 처리하였다. 또 한편 그 특집 코너의「작가와 작품」 중에서 정정훈이 빈약한 기록과 기억을 다시 끄집어낸 탄생 100주년을 맞은「어느 월북 작곡가, 이건우 탄생 100주년에 즈음하여」는 의미가 못내 인상적이라 그 감회(感懷)는 남다를 밖에 없다. 이 같은 관점에서 자료 정리 일면일지라도 지난 2019년 3월 28일 오후에는 한국음악재단(회장 김경희), 뉴욕한인회(회장 김민선)의 공동 주최로 뉴욕 맨해튼에 소재한 카우프만 뮤직 센터 머킨 콘서트홀(Merkin Concert Hall at Kaufman Music Center)에서 대한민국 3.1정신과 임정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가곡의 밤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모처럼 기념콘서트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연대기별로 엄선(嚴選)하여 해방을 전후로 한 한국가곡의 역사와 흐름을 한 자리에서 감상하는 기회가 제공되었음은 새삼 유념할 바다.
특히 이날의 1부에서 1920년대 한국가곡의 탄생 이후부터 40년대 해방까지 한국가곡의 정착기 작품이 주로 선을 보인 가운데서 또 그렇게 러시아의 대표적인 망명 음악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yevich Shostakovich)로부터 놀랍게도 그 자신의 실력을 검증받은 우리나라 최초 현대음악 작곡가인 김순남의「진달래꽃」과「산유화」, 그리고 또 다른 비운의 천재작곡가인 이건우의 민요적 색채가 짙은 가곡「금잔디」가 모처럼 선을 보여 청중에게 깊은 감동과 신선한 충격(衝擊)을 안겨준 따뜻한 감성의 정한(情恨)은 한 번쯤 배경 지식(schema)으로 기억할 일이다.
각론하고 비록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이 개최되었지만, 1988년 해금 조치 이후의 그 어떤 후속 사건은 남북 간에 일어나지는 아니하였다. 한편 평창동계올림픽과 북·미 간 평화협정 분위기 속에 남북한 예술단이 서울과 평양에서 명분상의 교차 방문 공연을 벌였으나 그것은 일회성 이벤트로 치부되었다. 사실 그 30년 전의 해금 조치도 내용상 거의 불확실성인 반쪽짜리 해금이었기에 사상적 내용과 관계된 작품은 해금에서 배제되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른바 ‘순수 예술 작품’에 한해 해금을 허용한 탓에 정지용, 임화, 박태원 같은 문인의 시와 소설, 이쾌대의 그림, 김순남의 음악 중 그 일부가 지상의 빛을 보았지만, 사회성이 조금이라도 반영된 작품은 여전히 금지의 형옥(刑獄) 아래 갇혀 있기에 그 시사성(時事性)은 못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일단 논고의 말미(末尾)에서 지난 2018년 8월 12일 자『시사저널』지의「해방과 독립 사이에서 사라진 노래들」 제하의 논고인 「음악평론가 강헌의 하이브리드 음악 이야기」에서 73주년 광복절을 맞아 “진정한 국가(國歌)' 기다려 본다.”에서 예리한 시선과 식별력에 기인(起因)한 건강하고 생산적인 비판 정신은 지극히 바람직하다. 따라서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을 목전에 두고 당시 노태우 정부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사십 년간 금지되었던 납북 혹은 월북 작가들의 문학작품 해금을 허용하였다. 따라서 올림픽이 끝난 가을, 음악과 미술의 해금 조치를 단행하여 대립 일변도로 치달으면서 그나마 동질성보다는 이질성만 강조해 왔던 남북한 간의 문화적 반목을 좁힌 첫 번째 명백한 조치였다.
결론적으로 그간에 어둠의 베일에 가려졌던 비운의 작곡가 이건우의 개별적인 창작어법은, 서양음악 작곡 1세대가 이룬 한국가곡의 방향 정립은 주목할 업적이다. 까닭에 ‘한국가곡은 서양음악 양식(樣式)을 옮겨 지은 우리 민족의 예술혼은 물론이거니와 한국가곡을 학술적 연구 대상으로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이론과 실기 분야의 밑거름이 됨’도 그렇거니와 그 자신이 운명하기 직전까지, 조국의 통일을 갈망하면서 부모에 대한 존경심과 자녀에 대한 그리움을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예술혼은 비장감이 묻어 있다. 비록 역사적으로 일제강점기와 국토분단의 가혹한 현실 앞에서도 음악인의 몫이랄까? 그 소임의 수행은 한층 더 다정다감(多情多感)이다. 이처럼 그 자신의 차별성을 지닌 창작어법에 서양음악 작곡 1세대가 이룬 토대 위에 동시대의 그 누구보다도 한국가곡의 정체성 확장에 주목할 업적을 남긴 실체임은 더없이 명백하다. 또 한편 해방공간에서 작곡한 가곡의 음악적 특징으로, 작곡기법과 민요적 색채가 짙은 11곡 중 비교적 이건우 작곡가의 대표적 작품으로 거론되는「금잔디」와「산길」의 음악적 특이성은 ‘임에 대한 그리움과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 시의 내용이 길거나 서사적일 경우, 빈번한 박자와 템포(tempo)의 변화, 그리고 민요적 색채의 두드러진 형태’의 맞물림이다. 모쪼록 존재의 뿌리인 가정(家庭)을 중심축으로 하여 ‘조국(祖國)→민족(民族)→가족(家族)’에 잇닿은 연계성은 그 삼각대위(三角代位)의 분할·통합이기에 끝내 깊은 사유로 가늠할 일이다.
* 약력 : 강릉출생,『華虹詩壇』(1965) 발행인, 시문학 출신, 한국시문학학회 회장, 강원도민대합창 이사장, 관동대학교 교수
(대학원장, 총장대행) 역임, 시집 외 저서 다수, 현재 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한국기독교문인협회, 한국
현대문예비평학회, 아태문인협회 고문, 월간『모던포엠』주간, 사) k 정나눔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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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