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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 편
석야 신웅순
1.
시인 정훈(1911-1992) 하면 몇 가지 키워드가 떠오른다. ‘자유시, 시조, 머들령, 밀고 끌고, 동백’ 등이다.
시인은 자유 시인이며 시조 시인으로 초기에는 자유시를, 중기 이후에는 시조를 썼다.「머들령」,「밀고 끌고」,「동백」등은 그의 대표작들이다.
요강원을 지나
머들령
옛날 이 길로 원님이 나리고
등짐장사 쉬이 넘고
도적이 목 지키던 곳
분홍 두루막에 남빛 돌띠 두르고
할아버지와 이 재를 넘었다.
뻐꾸기 자꾸 울던 날
감정 개명화에
발이 부르트고
파랑 갑사 댕기
손에 감고 울었더니
흘러간 서른 해
유월 하늘에 슬픔이 어린다.
―「머들령」 전문
시인은 1937년 11월『자오선』창간호에「六月空」을 발표하고 1940년『카톨릭 청년지』에 이 작품을 다시 개작하여 발표했다. 이것이 대표작「머들령」이다.
머들령 시집의 지헌영의 발문이다.
『머들령』이 상재됨으로써 민족문학건설에 새로운 풍미가 가미될 것을 즐기며 끝으로 소정에게 묻고자 한다. “우리 시인은 슬프지 않을 수 있었던가, 또 시름하지 않고 어찌 하겠는가.”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울분과 설움을 시「머들령」에 담았다. 머들령은 대전 동구 상소동에서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 사이에 있는 험준한 고개로 마달산에 있는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시인은 일제 징용을 피해 충남 금산군 추부면에서 숨어지낸 적이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서 한밭까지 거리는 약 40리인데 머들령을 넘어야 오고 갈 수 있는 곳이다. 그 경험으로 쓴 시가 머들령이라고 한다.
1994년 대전 중구 하소동 만인산 휴양림 입구에 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정훈은 충남 논산 출생으로 호는 소정이다. 1933년 휘문고보를 거쳐 1940년 일본 메이지 대학 문과에 수학, 대동아 전쟁으로 귀국, 1937년 『자오선』창간호에 「유월공」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단했다. 초기에는 자유시를, 중기 이후에는 시조를 썼다. 시집으로『머들령(1949)』외『파적(1954)』,『피맺힌 연륜 1958』,『산조 1966)』,『거목(1979)』이, 시조집으로 『벽오동(1955)』,『꽃 시첩(1960)』등이 있다.
2.
절랑 앞에서 끌게
엄니랑 뒤에서 미세요
한밭 사십릿길
쉬엄쉬엄 가세요
가다가 지치실 때는
손만 얹고 오세요
염려 말고 오세요
발 소리만 내세요
엄니만 따라 오시면
힘이 절로 난대요
이 나무 팔고 갈 때는
콧노래도 부를께요
형이 제대할 때까지
구김없이 살아요
엄니랑 미세요
절랑 앞에서 끌께요
우리의 섧고 거센 길을
밀고 끌고 가세요
- 「밀고 끌고」전문
이 작품은 1989년『가람문학』에 발표된 「밀고 끌고」의 시조이다. 1-2 중학 국어에 게재된 자유시「밀고 끌고」를 개작해 발표한 것이다.
여기에는 ‘나’인 어린 동생과 형과 어머니가 등장한다. 손수레를 끌고 있는 이는 ‘나’ 어린 동생이며 어머니는 그 뒤를 밀고 있고 형은 군에 나가 있다. 모자가 나무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당시의 어려웠던 시대와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집은 대전에서 40리 떨어진 머들령 넘어 금산 어느 두메 산골이다. 그 곳은 산이 깊어 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마을이다. 배경은 바로 그 두메 산골과 대전이다. 나이 어린 동생이 어머니와 함께 손수레에 나무를 싣고 시장으로 팔러 갔다 오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 눈물겹게 그려져 있다. 6.25 이후 참담했던 당시의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리헌석은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적 주체가 시인 자신이 아니고 어린 소년이다. 수레를 끄는 소년과 수레를 미는 소 년의 어머니라는 소재를 통해 삶에 대한 굳센 의지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라는 주제를 나타내고 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소년의 굳센 의지와 소년의 어머니에 대한 효가 당시의 어려운 시대·사회상과 함께 상징적으로 구체화되어 있다.
3.
정훈 시인의 시조 작품으로는 단연 단시조「동백」을 빼놓을 수 없다.
백설이 차가운 하늘 한 모서리
푸른 잎 사이사이 다홍으로 불이 붙네
그 뉘를 사모하기에 찬 하늘에 타는가.
―「동백(冬柏)」 전문
이 시조는 『자유문학(1959.3)』에 수록된 4연의 자유시「동백」의 ‘백설이 눈부신/하늘 한 모서리//다홍으로/불이 붙는다//차가울사록/사모치는 정화(情火)//그 뉘를 사모하기에/이 깊은 겨울에 애태워피는가’를 시조로 개작, 시집『꽃시첩(1960.6)』에 실은 작품이다.
시인은 기 발표된 작품일지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과감하게 개작했다.「六月空」을「머들령」으로 제목을 바꾸어 발표했으며,「밀고 끌고」의 자유시는 시조로 개작했고 그리고 자유시「동백」또한 시조로 바꾸었다. 자유시를 시조로 개작한 것으로 보아 시·시조를 쓰면서도 시조에 더욱 애착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설이 차가운 하늘 한 모서리에 푸른 잎 사이로 다홍으로 불이 붙는다. 얼마나 사모했기에 모진 추위 속에서 찬 하늘에 붉게 타는 것인가. 강인한 의지와 정렬을 이 시조에서 읽을 수 있다.
산(山)을 그리다 말고
차를 재촉한다
그윽한 묵향(墨香)은
안개처럼 이는데
쪼르르
차 따르는 소리
새도 귀를 기울여
―「정(靜)」 전문
이 작품은 ‘광주 의재 화백 산장에서’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허백련 화백이 그림을 그리는데 반가운 객이 찾아왔다. 차를 내오라 재촉하는데 방안에는 그윽한 묵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쪼르르 차를 따르는데 새들도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 장면의 분위기를 기막히게 잡아낸 간결하면서 선시 같은 시조이다. 객은 물론 화백을 찾아간 정훈 시인이리라.
『거목』(1979)에 실려 있는 작품으로 말년의 자신의 모습을 의재 화백에 투영시켜 그리지 않았나 싶다. 정훈 시인이 평소 아끼던 작품 중의 하나라고 한다. 이도현 시인도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쩌면 작품 「靜」은 말년의 자신의 생활 전모를 담은 자화상이랄까, 한약방 조그만 방에 앉아서 먹을 갈고 있는 정훈 노시인을 보는 듯하다.
평소 차를 즐겨 들고, 그래서 찻집은 하루에 한 번 꼭 출입해야 하였으며 환자를 돌보 면서 가끔은 먹을 갈아 사군자를 그리곤 했다. 이것이 정훈 시인 말년의 여유요 멋이기 도 했다.
감상하는 데에 무슨 제한이 필요하랴. 독자 나름대로의 몫을 찾아 즐기면 그만이다. 자신을 주체로 감정 이입시켜 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거목』자서를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지나온 성상의 세월을 되집어보게 된다. 늘그막의 자서는 누가 읽어도 시를 읽는 것 만큼 가슴이 뭉클하다. 시를 창작하는 이들의 태도는 이런 것이어야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생각하건데 시인은 도객과 흡사해서 시인은 시를 쓰기에 앞서 인간으로서의 숭고한 품 격을 갖추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생각이 이에 이르고 보면 나는 시인일 수 없다.
시인이 될 수 있는 바탕을 갖추지 못한 내 자신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쓴 시는 한갓 유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중략…
내 시랍시고 써 온 반세기는 진실로 길고 아픈 세월이었다. 고독하고 고달픈 삶 속에 서 글과 더불어 울고 웃고 비분과 절망과 절규도 함께 했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애환이 얹힌 나의 유일한 반려자이기도 한데야 어찌 정이 들지 않았겠는가. 이러 저러한 뜻에서 차마 버리기가 아쉬워 시집이랍시고 갈무리하게 된 것이다.
4.
시집 『머들령』을 낸 얼마 후 6.26가 터졌다. 일제의 압박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하고 좌우익의 혼돈에서 길을 찾지 못한 채 이젠 민족 상잔의 아픔까지 겪어야했으니 우리 민족에게는 참으로 모질고도 모진 세월이었다.
시인의「파적」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부-
고동이 운다
항구와 항구에서
향수를 쓸어 담아다
떠날 때면
그렇게 우는 것이냐
나도 이젠
피리를 깨틀고
우람한 목청을 배우고 싶다
커-다란
슬픔을 노래할
이런 날이면
색소폰이라고
한아름 안고 서서
부부부- 불고 싶다
- 「파적」의 전문
파적, 피리를 깨틀고 색소폰이라도 ‘부부부’ 불고 싶다고 했다. 색소폰 소리는 저음으로 한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뱃고동소리는 항구와 항구에서 향수를 모조리 쓸어담아 떠날 때면 그렇게 우는 것이냐고 노래하고 있다. 파적하고 우람한 목소리를 배워 색소폰이라도 한아름 안고 서서 불고 싶다고 한 시인의 심정이 이러한 것인가. 헤아리되 헤어릴 수 없고 헤어릴 수 없으되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은 무슨 슬픔이 이런 것인가. 이 커다란 민족의 슬픔을 피리 소리에는 실을 수 없는 것이어서 피리를 깨뜨리고 우람한 목청을 배워 뱃고동 소리로 색소폰 소리로 울고 싶다고 했다. 이 시가 바로 당시의 시인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의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했다. 청천벽력이 어디 있는가. 여기에서 시인은 할 말을 잃는다.
……
간디를 잃은 인도의 슬픔
백범을 잃은 이 땅의 슬픔
고아를 두고
어버이는 가셨다
풍랑에 배를 두고
사공은 가셨다
……
오호라 서럽기 앞서
의분은 가슴을 치나니
님은 가셔도 님은 살아 계신다
……
님이여
미련 없이 가시라
이성에 괴로움이 정성에 복되시와
영화 길이 누리시라
-「사공은 가시고」일부
6.25, 김구의 암살은 시인에게는 통절의 슬픔이었다.
제 7 시집 제 4 부 애사첨(哀詞帖)에는「가람스승 영 앞에」,「애도 이호우사형」,「애보 석정 사형의 병보를 듣고」등의 작품들이 실려 있다. 이 작품들은 선생과 인연을 맺은 분들이 작고하면서 감내할 수 없는 추모의 애절한 정을 절절이 읊고 있어 심금을 울린다. 스승 가람 선생의 별세는 선생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을 안겨주었다.
이 하늘에 큰 별이
또 하나 떨어졌습니다.
전통과 얼 찾기에
그렇게도 외치셨는데
겨레가 못다 깨친 채
임은 멀리 가셨습니다.
임은 학자이시기 앞서
나라를 사랑하셨습니다.
욕된 영화보다는
아픈 의절을 택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뉘를 뫼시고
의과 절을 물으리까
- 「가람 스승 영 앞에」일부
시조집 『벽오동』(1955)에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서가 실려있다. 선생은 당시 시조 문학사의 위상에 대해 말하고 정훈 선생의 시조작은 현대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일가를 이루었다는 찬의 말씀을 붙였다. 정훈은 1979년 가람시조문학회도 가람 선생의 호를 따 창립했다. 거기에는 가람 선생의 유지를 이어간다는 정훈 선생의 깊은 또 다른 사제의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가람시조는 지금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가람 선생과의 인연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다.
이 근래 신문예운동도 꾸준히 해왔다.그러나 한때 시조를 민족주의자의 노리개로 삼 아 구조 그대로서 무농(撫弄)되었다가 오늘날에는 그 다수한 작자들의 그림자도 없어지 고 문청들은 자유시형으로만 열중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정훈군은 시작에 뜻을 두어 시집『머들령』,『파적』을 이미 간행하였고 이 시조집도 출판하게 되었다. 시재를 탁월히 태어난 정군으로 시조작의 조예는 놀랄만 하다.구조의 구각(軀殼)을 깨끗이 벗어나 새로운 한 경지를 개척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나는 이런 점으로 이 작을 일독삼탄(一讀三嘆)하며 이 서를 마친다.
- 「가람선생의 서」일부
1955년이니 당시엔 자유시 천지였다. 이에 정훈 선생의 시조작은 놀랄만하다했다. 가람 선생님의 뜻을 이어갈 하나의 재목으로 여기셨던 것 같다. 애정있는 사제 간의 문맥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5.
『벽오동』은 시인의 개인적인, 생활 속의 소소한 정서를 담고 있는 시조집이다. 소소한 것에도 당시의 삶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 왠지 서럽기도 하고 아프게도 하다. 6.25 직후였으니 겨레의 삶이 얼마나 척박했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작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안평산 기슭에는
살구꽃 구름 일고
장끼놈 끌끌 울어
카투리 부르는데
순이야 네 연지볼에는
호박꽃만 피는다
-「춘궁」전문
안평산은 유년시절 살았던 천비산과 이웃해 있는 산이다. 안평산에는 순이가 살고 있나보다. 장끼가 끌끌 울어 카투리를 부르는데. 순이의 볼에는 누런 호박꽃이 피었다.
오래 굶으면 살가죽이 들떠 붓고 누렇게 되는데 이를 부황이 뜬다고 말한다. 6.25 이후 가난했던 참담한 시절, 흔히 보릿고개 때 만연했던 춘궁기의 병이다. 이를 호박꽃으로 표현했다. 이보다 더 아픈 상징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 어려울 듯 싶다.
날씨가 거꾸로 간다. 입추가 지났고 말복도 지나가는데 더위는 뒷걸음만 친다. 옛날엔 가난과 싸웠지만 이제는 기후와 싸워야 할 판이다. 모든 것이 과유불급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싶다. 옛날에는 자연을 건드리면 부정탄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자연 앞에서 한없이 경건하고 겸손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시를 쓴다는 것도 이와 같으리라. 시를 쓰기 전 먼저 사람이 되야한다는, 인간으로서의 숭고한 품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정훈 선생님의 겸허한 말씀이 오늘 따라 가슴을 친다. 어디 시만이랴.
서예문인화,2018.9,118-123쪽.
첫댓글 노오란 장다리 밭에 나비 호호날고 / 초록 보리밭 골에 바람 흘러가고 / 자운영 붉은 논둑에 목매기는 우는고.//
50년 대 중학교 2학년 교과서에 실렸던 정 훈 선생님의 '춘일春日' 이 아마 제가 처음 배운 현대시조는 아니었는지?
맞아요.그 시조가 생각이 나요.그것은 잘 모르겠어요.언제 한 번 교육 박물관에가 살펴보아야겠네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