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시간에 들른 양촌 둔치의 축제장을 대충 돌아 본 후 사람들이 몰려드는 걸 보며
반대로 서둘러 축제장을 빠져나와 대추로 유명한 이웃 연산으로 향한다
오늘이 축제 마지막 날이라 다채로운 행사 프로그램이 있다지만
소란스러운 걸 좋아하지 않다보니 볼륨 높은 스피커 소리도 귀에 거슬려
곶감과 그외 눈에 띄는 물건 몇가지를 얼른 구입한 후 자리를 뜬 것이다
특별히 연산에 들르려는 이유는 지역 특산물인 대추를 구입하고
오래전에 다녔던 '할머니 순대국' 맛을 보고 가기 위해서였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해져 길 찾는데 애를 좀 먹었다
한적했던 시골동네가 제법 번화해졌다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는 할머니 순대집
국밥으로 나오는 순대국이 8,000원인데 양이 제법 많다
좀 이른 시간이지만 배를 불렸으니
운전하려면 거북하지 않게 소화를 시킬겸 근처의 돈암서원을 들려 보기로 했다
'논산한옥마을' 앞의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우선 한옥마을부터 들어가 본다
집은 정갈한 모습이지만 인기척을 느낄 수 없어 빈집에 온 느낌이다
한옥이야 아름다운 건축물이지만
그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어야 주거 공간에 스민 생활의 아름다움이 드러날텐데
집들은 거의 비어있어 약간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로 거닐어야 했다
어쨋든 대충 구경을 끝낸 후
다음은 본격적으로 한옥마을과 이웃한 '돈암서원'을 보러간다
정비된 언덕길을 약 150m쯤 걸어가면 홍살문과 세계유산 마크가 새겨진 비석을 만난다
건물의 위치에서 이 곳을 드나드는 문인 홍살문은 건물의 왼쪽에 자리하고 있어
어쩐지 옆문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안내석
번역문도 없이 영문으로만 씌여 있는 세계유산 인정서 같은 비석인데
서원 문패 아래에는 우리나라의 유명서원 아홉개 이름이 새겨져 있다
왼쪽은 서원 이름이고 오른쪽은 제향 인물이며 숫자는 설립 년도이다
소수서원(영주) 안 향 1543년
남계서원(함양) 정여창 1552년
옥산서원(경주) 이언적 1572년
도산서원((안동) 이 황 1574년
필암서원(장성) 김인후 1590년
도동서원(달성) 김굉필 1605년
병산서원(안동) 류성룡 1542년
무성서원(정읍) 최치원 1615년
돈암서원(논산) 김장생 1634년
서원은 고정산 줄기 끝자락의 완만한 구릉지에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좌측으로는 계룡산이 멀리 자리하고 우측에는 대둔산을 끼고 있다
출입문인 입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양성당과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 거경재와 서재(西齋)인 정의재가 배치되어 있다
뒤쪽에는 사당인 숭례사를 두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형식을 따랐다
양성당 앞마당에는 서원의 창건 과정과 김장생 부자의 업적을 새긴 원정비가 있다
그 오른쪽의 양성당 옆에는 문집과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과
김장생의 부친 김계휘가 후학을 가르치던 정희당이 자리한다
또 그 앞의 큰 건물 응도당은 한국서원의 강당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하며
지붕 양 측면에 '榮(영)'이라는 지붕을 덧대어 벽으로 비가 들이치지 않게 한 구조물이 특이하다
대문 밖에 세워진 산앙루(山仰樓)는 2006년에 건립된 건물이다
음풍농월(吟風弄月)
바람과 달을 보며 시를 짓고 읊는다는 글귀가 걸려있다
산앙루(2층)에서 바라본 돈암서원 출입문인 입덕문(入德門)
돈암서원
돈암서원은 1634년에 지역 유생들이
沙溪(사계) 金長生(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성리학 교육시설이다
원래는 현재의 위치 인근에 있는 임리 솔밭에 있었다고 하는데
19세기 후반 홍수 피해를 입어 현 위치로 옮겼다
1660년(현종 1)에 왕이 '돈암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려 賜額書院(사액서원)이 된 후
지역의 공론과 학문을 주도했다
돈암은 임리 숲말 근처에 있는 바위 이름이 서원의 이름됐다
돈암서원 건물 배치도
連山돈巖書院之碑
애초에는 임리에 있던 서원을 홍수로 이전한 연유를 비문에 설명한 비석이다
서원의 정문인 입덕문은 솟을 대문으로 외삼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입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돈암서원원정비'와 양성당 그리고 그뒤로 숭례사가 바라뵌다
좌우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정의재와 거경재가 마주보고 있다
응도당(凝道堂) 보물 제 1569호
돈암서원 응도당은 유생들이 장수강학〈1 하던 건물로서
1880년(고종 17)에 돈암서원을 숲말에서 이 곳으로 옮길 때
옛터에 그대로 두었던 것을 1917년에 옮겨왔다
그런데 양성당(養性堂)이 이미 강학의 기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래 위치와 다르게 사당과 대각선 위치에 건물을 배치하였다
응도당은 예를 실천하는 건축 제도에 제시된 건축양식에 따라 지어졌으며
돈암 서원의 건물 배치와 규모는 사계(沙係) 김장생(金長生)이
『의례』와 『주자대전』을 고증하여 죽림서원(竹林書院)의 법도를 따라 지었다고 한다
응도당은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ㅅ자 모양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는 모두 마루를 깔았고 옆면에는 비바람을 막아주는 풍판을 달았으며 풍판 아래에는 눈썹지붕을 두었다
처마의 암막새〈2 기와에 『숭정육년계유이월서원 崇禎六年癸酉二月日書院』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1633년(인조 11)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서원의 규모나 구조적 측면에서 한국서원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볼 수 있다
양성당의 오른쪽에 있고 좌향은 북쪽을 하고있다
〈1 장수강학(藏修講學) : 유생들이 몸과 마음을 수양하고
스승과 문답을 주고 받으며 공부하는 것을 강학이라 한다
〈2 막새 : 기와 지붕의 암기와 끝을 마무리 하는 장식
정희당(靜會堂)
정회(靜會)는 유생들이 수행하는 방법 중 하나로 고요하게 몸소 실천하며 수행한다는 뜻이고
사계 김장생 선생의 부친인 황강공께서 강학하던 건물이며
대둔산 자락의 고운사 터에서 1954년에 옮겨 왔다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후면열 가운데 2칸은 마루방을 두었다
우물 마루를 깔았다
향나무 보호수
수령 약 300년 된 향나무로 수고 8.5m로 2019년 8월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정희당과 장판각 사이에 있다
장판각(藏板閣) 향토 유적 제 9호
장판(藏板)이란 판을 간직하여 보관한다는 뜻으로
김장생의 문집인 '사계전서"와 김장생 부친인 김계휘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황강실기'
김집의 문집인 '신독재전서' 등과 '경서변의' '가례집람' '상례빈요' 등이 보관되어 오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우물마루를 깔았다
정의재(精義齋) (西齋)
정의(精義)란 자세한 의의라는 뜻이다
학문을 하는 유생들이 모여 경전의 의의를 자세히 강론하던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강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를 갖고 있으며 유생들이 기거하던 건물이다
거경재(居敬齋) (東齋)
서재와 마찬가지로 유생들이 기거하고 개인 학습을 하던 공간이다
거경(居敬)은 성리학의 수양 방법중 하나로 우러르고 받드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는 태도를 갖는 마음 가짐을 의미한다
강대석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를 갖고 있다
양성당
김장생이 생전에 강학 활동을 하던 건축물로 사후에도 강학 활동 용도로 사용되었다
숭례사 내삼문 앞의 건물이며 고경재와 정의재를 양옆에 거느리고 있다
돈암서원 원정비
돈안서원원정비는돈암서원의 역사를 기록한 비석이다
연산도암서원지비(連巖豚巖書院之碑)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비문의 내용은 돈암서원을 세운 배경과 구조.
사계 김장생 부자의 성품과 학문적 업적에 대한 칭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장생 부자는 주자학과 예학의 대가로서 벼슬을 멀리 하고 고향에 내려와 학문연구에 매진하였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썻으며
앞면에 전서체로 된 제목은 김장생의 증손인 김만기가 썼다
비석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네모난 받침대 위에 대리석으로 비의 몸을 세우고
지붕의 가첨석(加添石)을 머릿돌 형태로 올렸다
본래 돈암서원은 숲말에 있었는데 1880년(고종 17)에
홍수로 물이 차서 이 곳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비문의 내용과 현재의 건물 배치는 일치하지 않는다
숭례사(崇禮祠)
예를 숭상한다는 의미의 崇禮祠 사액 현판이 걸려있는 사당으로
군자가 덕을 닦고 학문을 이루는 것을 뜻하는 건물이다
사당 내부에는 주향(主享)인 沙溪(사계) 金長生(김장생)과 愼獨齋(신독재) 金集(김집),
同春堂(동춘당) 宋浚吉(송준길), 尤庵(우암) 宋時烈(송시열)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들 네분은 모두 문묘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돈암서원은 선정 서원이기도 하며 매년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제향때가 아니라서 문을 걸어 놓았으니 내부는 들어가 볼 수 없어 담너머로 넘겨다 보았다
숭례사 내삼문
내삼문은 제향을 지내기 위해 출입하는 문으로
사당 앞의 어칸과 양 협칸을 별도로 하나씩 세우고 문과 문 사이에는
담장이 쳐져 있는데 '지부해암' 박문약례' '서일화풍' 등
김장생과 그의 후손들의 예학정신을 보여주는 12개의 글자를 새겨 놓았다
꽃담장에 새겨넣은 아래 글자는 사계 선생의 예학정신이 담긴 글귀이다
地負海涵(지부해함)
대지가 만물을 짊어지고 바다는 만천을 포용한다
博文約禮(박문약례)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瑞日和風(서일화풍)
상서로운 햇살과 온화한 바람
전사청(典祀廳)의 옆문
향시에 쓰이는 제기 등을 보관하고 제수를 준비하는 장소로서
숭례사와 가까우니 이 쪽문을 이용하여 제사 때에는 제물을 나르는 것 같구나
서로가 귀를 기울이 듯 추녀를 맞댄 건물들
담장 옆에 기이한 형태로 서있는 감나무
경희당(慶會堂)
현재 관리 사무소로 사용되는 건물로서 인기척이 느껴지지만 사람을 만나지는 못했다
다만 현판 아래 놓인 서가에서 안내문을 취득할 수 있었으며
댓돌위에서 숭례사를 향해 카메라를 맞췄더니 약간 오묘한 그림이 나오더라!
안마당
전사청(典祀廳)
면밀하게는 아니지만 경내를 찬찬히 둘러보고
입덕문을 나서면서 서원의 본채라 할 수 있는 양성당과 숭례사를 다시 한 번 마주했다
바깥 건물인 산앙루 지붕 위로 조개구름이 퍼지기 시작하지만 날씨는 종일 흐렸다
연산의 들 너머로 수려한 자태를 뽐내는 향적산(574m)이 낯설지 않았고!
주차장 옆의 싸리 단풍은 아직도 고운 자태를 잃지 않고 눈부셨다
작정하고 찾아간 것은 아니었으나
한 번쯤은 생각속에 넣어놓고 있었던 돈암서원을 들르게 되어
나름 흡족한 탐방이 아닐 수 없었다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이나 의미는 한꺼번에 섭렵할 수 없으니
미흡한대로 이정도의 발걸음만으로도 만족한 걸음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