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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를 이야기할 때 생각해 보는 것들
1. 이미 치매는 우리 사회에서 암 못지않게 두려운 질환이 되었다. 2024년이면 치매환자 100만 시대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등 고령화 시대의 대표적인 사회 문제로 대두된 치매. 얼마나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인지 각종 통계자료를 통해 살펴보자.
65세 이상 노인 10명 중 1명은 치매
중앙치매센터가 발간한 ‘대한민국 치매현황 2018’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의 65세 이상 노인인구(706만6,201명) 가운데 치매환자는 70만5,473명으로 추정되며, 치매유병률은 10.0%로 나타났다. 65세 이상 노인 10명 중 1명은 치매를 앓고 있는 것이다. 또한 추정 치매환자 대비 의료기관에서 치매진단 및 치매진료를 받은 환자(치매상병자)의 비율은 93.7%였다.
앞으로도 치매환자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며, 2024년 100만 명, 2039년 200만 명, 2050년에는 300만 명을 넘어설 만큼 빠른 속도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치매로 인한 비용부담은 얼마나 될까. 치매환자 1인당 연간 관리비용은 약 2,074만 원으로 추정되고, 국가치매관리비용은 약 14조6,000억 원으로 추정된다. 이는 GDP의 약 0.8%에 달하는 상당한 금액이다. 65세 이상인 치매환자 전체의 연간 진료비는 약 2조3,000억 원, 1인당 연간 진료비는 약 344만 원으로 나타났다.
65세가 되기 전에 치매에 걸리는 초로기 치매 환자도 최근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2009년 1만7,772명에서 2018년 6만3,231명으로 10년간 4배나 증가했다. 여기에는 건강검진 활성화가 일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젊은 세대도 치매 위험에서 안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출처: 중앙치매센터 ‘대한민국 치매현황 2018’, JTBC 뉴스(2019. 7. 26.)>
2. 치매 상황을 생각하면서 일상생활에서 잊지 않고 살아야 할 것을 생각해 본다. 나이가 들면서 잊어버리고 살기 쉬운 것들이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이런 것만은 절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다짐과 소원을 갖는 것이다. 몇 가지를 정리해 보려고 한다.
가. 감사: 가장 먼저 잊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오직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고,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권리를 주장하면서 조금만 마음에 흡족하지 않으면 짜증을 내고,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소원한다. 빈손들고 앞에 나아가는 사람,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종의 자세를 갖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러기 위해서 지극히 작은 일에서부터 감사하기를 훈련해야 하리니 식사할 때에 어느 반찬에라도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 농사한 소출이 어떻게 되더라도 만족하며 감사하는 것, 운동할 때에 승패에 관계없이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 아내와 자녀들의 어떤 말이나 행동에도 사랑하며 감사하는 것 등을 기본적인 경건생활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훈련해야 할 것이다. 나이를 좀 먹었다고 경험이나 성취를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오직 비천한 나에게 하나님이 하신 크신 일을 더 깨달아가며 감사하며 평안을 누리기를 소원한다.
나. 겸손과 경외: 둘째는 겸손이다. 겸손은 하나님의 크심을 바르게 알고, 인간의 지극히 연약함을 바르게 알 때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욥기를 읽으면 친구들과의 치열한 논란이 끝나는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이 등장하시자 욥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인정한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1-6). 이사야나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만날 때 어떻게 했던가?
그러므로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경외로 연결된다. 진정한 경외는 진정한 겸손을 낳는다. 왜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 주장이 강하고 ‘꼰대’라는 비판을 받는가? 하나님의 크심을 잊어버리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바울 사도를 기억하자. 그가 처음에 얼마나 ‘기고만장’ 했던가. 그는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고 고백했다. 당대 최고의 스승에게서 배운 그였지만 사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하고 스스로 높아져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고 나서 잘못된 지식을 버리고 바른 것을 붙든 그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본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9-13).
나이를 먹을수록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도한다. 점점 낮아지고 천해지되 남들은 높아지고 축복을 받게 되기를 기도한다.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욥을 기억하자.
다. 온유: 겸손과 함께 나오는 것이 온유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부드럽거나 쉽사리 화를 내지 않는 것 혹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자신을 꺾고,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을 꺾는다고 하는 것은 곧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을 포함한 자신의 존재(인격)를 부인하는 것을 말하며, 자신을 부인한 그 자리에 오직 전능자의 의지와 말씀으로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온유의 반대 상태는 굴복하지 않음, 꺾지 않음인 것이고 성경에서는 ‘목이 곧다’라고 표현하였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7:51). 그렇다면 ‘온유한 사람’이란 자신을 꺾고, 전능자로부터 나는 권세, 세워진 질서 혹은 정당한 가르침에 굴복하는 사람을 말하니 하나님의 뜻 혹은 성경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시면서 사셨다(요 4:34; 참고.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요 8:29). 이것이 온유한 사람의 삶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사울 왕은 어떤 책망을 받았던가?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삼상 15:22-23). 처음에는 겸손했던 사울 왕이 이렇게 변해버린 것을 기억하면서 나 역시 늘 주의하고 경계하며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처럼 오직 주님의 자비가 아니면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내 고집과 이성과 선입견과 자존심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말자.
라. 사죄: 죄많은 세상에서 늘 넘어지는 자신을 보면서 굳게 붙들 것이 은혜로운 주님의 사죄라는 진리다. 아무리 큰 죄라도 능히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보혈과, 마귀의 어떤 공격에도 능히 이기게 하시는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붙들 수 있게 하시는 은혜를 기억하자. 나를 바라보거나 환경을 바라보면서 쉽게 넘어지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의 연약함 때문에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느끼거나 무기력한 삶을 사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모든 연약과 허물을 다 가리시면서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를 덮어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의 평안과 자유를 누리며 살자. 살아온 나날에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고 심지어 죄책감에 휩싸일 수 있지만 그런 모든 것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바라보며 그 사랑의 손길에서 평안과 감사를 누리자. 다른 것을 잊어버리면 안타까워하면서도 사죄의 은혜를 잊어버리면서도 무감각한 자가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마. 심판: 역사를 바라보며 가장 생생하게 기억할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항상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과, 그날은 우리에게 도적같이 갑자기 온다는 것과, 그날엔 우리의 행한 바에 따라서 심판이 행해질 것이라는 엄염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얼마나 부조리와 불법이 많아서 괴로워하며 분노하는 시간이 많은가. 그러나 심판의 날에는 누구라도 만족할 수밖에 없이 모든 것에 대해 가장 정의로운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하루를 책임있게 살아야하겠고, 지금의 모든 부조리한 것에 한탄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주는 위로가 얼마나 큰가. 모든 악으로 인하여 지금은 울지라도 그날에는 웃으며 찬송할 것을 바라보며 이 땅의 삶은 오직 나그네의 삶임을 명심하자. 찾아갈 본향이 있는 나그네, 영원한 집이 있는 나그네임을 기억하며 살자.
바. 영화: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하며 구속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으니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주셔서 신령한 몸을 입고 살아가도록 하셨음을 기억하자. 구원의 진리에서 우리를 창세 전에 예정하사 때가 되매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죄는 용서하시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하셨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점점 거룩함을 이루며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다가 죽을 때에 온전한 영화를 입게 하셨다고 가르치는 것을 굳게 붙들자.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 소망이요, 우리의 최종적인 모습임을 기억하자. 지금은 얼마나 비천한지 모르지만-『카프카』의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리는 잠을 깬 아침에 벌레로 변하고, 심지어 가족들까지 징그러운 벌레 한마리로 대하지만- 주를 믿는 우리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변신을 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 감탄하며 살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1-3)
해가 갈수록 무언가를 잊어버리는 일이 많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한다. 그것이 치매의 수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가끔은 치매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지금까지 생각한 것들만큼은 절대로 잊지 않기를 소원한다. 잊지 않는 것만 아니라 더욱 더 많이, 더욱 더 깊이 생각하면서 살기를 소원한다.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