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딸과 함께 읽는 소설 여행 8
11. 날개(이상) 줄거리
주인공인'나'는 상식의 세계를 떠나 그저 놀거나 밤낮없이 잠을 자면서 아무런 의욕도 없이 방 속에서 뒹굴며 아내의 '사육'을 받는다. 시행착오로 아내를 차지해 본 후로는 한 본도 아내의 남편노릇을 한 적이 없다. 그러한 '나'는 아내가 쓰는 방에 들어가 화장품 냄새도 맡아보고 돋보기로 화장지를 태워 보기도 하면서 아내의 체취를 느껴본다. 이렇게 해서야 '나'는 아내와의 만남을 누릴 수 있고 육체적인 쾌락까지도 맛보게 된다.
아내는 밤낮으로 외출을 하고 밤에는 손님을 데려 오기도 한다. 그리고 아내는 내방에 들러 은화 한 잎씩을 벙어리 저금통에 넣어 주는 것이다.'나'는 아내의 직업에 대해서, 돈의 출처에 대해서 생각해 보다가 벙어리 저금통을 변소에 던져 버린다. '나'는 외출했다가 지폐로 바꾼5원을 한푼도 쓰지 못하고 돌아와 아내의 손에 쥐어 주던 날 아내의 방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하루는 외출했다가 비를 맞고 돌아온 '나'는 노크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만 아내의 매음 행위를 보고야 말았다. 이때부터 아내는 자신의 직업에 거추장스러운'나'를 외출하지 못하게 한다.
아스피린인 줄 알고 먹고 지내던 어느날 '나'는 수면제 아달린 껍질을 발견한다. 리고 계속해서 수면제를 복용하고 잠을 잘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깨닫고 '나'는 조용한 산 속에서 '아내에 관하여', '아달린에 대해서' 연구한다.
'나'는 아달린 여섯 알을 한꺼번에 먹고 일 주야랄 자고 깨어나서 아내에 대한 의혹을 미안해하며 사죄하려고 아내에게 갔다가 매음 현장을 목격하였다. 정신없이 뛰쳐나온'나'는 여기저기를 쏘다니다가 어느 건물 옥상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때 정오의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나'는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구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구나'라고 외친다. <조광>(1936)
핵심 정리
갈래 : 심리주의 소설
배경 : 일제 강점기의 서울 거리.18가구가 살고 있는 33번지 유곽(遊廓)
성격 : 고백적. 상징적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주제 : 전도된 삶과 자아 분열 의식 속에서 본래적 자아를 지향하는 인간의 내면 의지. 분열된 자아에서 통일된 자아에로의 지향
등장 물
나 : 경제적인 생활 능력의 결여되어 있고 사회 활동이 전무한 무기력한 남 편. 아내의 부정과 자아의식의 갈등을 일으켜 극히 불안한 심리적 자 의식을 보이는 인물. ‘나’와 아내의 관계는 ‘닭이나 강아지처럼’이란 동물적 비유가 의미하듯 종속적 관계이다. 성적(性的) 무기력한 남편 으로 아내보다 열등한 상태에 놓여 있는 남성. 아내의 부정과 자아 의 식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켜 극히 불안한 심리적 자의식을 보이는 인 물. 날개의 소생을 꿈꾸면서 사회로의 복귀를 시도한다.
아내 : 남편보다 우월한 존재로 종속상태에 놓여 있는 남편 위에 군림하는 가학적인 여성이다. ‘외출, 내객(來客), 돈’으로 알 수 있듯 아내의 직 업은 창녀이다.
이해와 감상
내용의 난해함과 형식의 파격성으로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의 으뜸으로 꼽힌다.
매춘부인 아내에 붙어사는 무기력한 '나'를 통해 자아의 분열을 그린 한국 최초의 심리주의 소설이다. 주인공 ‘나’의 유일한 삶의 지반이었던 아내로부터의 배반감이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그러므로,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란 그의 외침은 마지막으로 취할 수 있는 ‘탈출 의지’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박제(剝製)된 천재는 무기력 한 탈출 의지로 실패감을 맛보게 된다. 이 소설의 부부 관계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이다. 아내에 대한 예속자 혹은 기생적(寄生的) 존재로서 스스로의 인격적인 소유권과 시민성(市民性)이 없는 ‘나’에 비해 아내는 나를 지배하고 ‘사육하는’ 위치에 있다. ‘외출’, ‘내객’, ‘돈’이란 단어들이 알려 주듯이 아내의 직업은 창녀이다. 쉽게 말해서, ‘나’는 ‘꽃’에 매달려 사는 기둥서방인 것이다. 그래서 ‘나’와 아내의 관계는 ‘닭이나 강아지처럼’이란 동물적 비유가 의미하듯 종속적인 관계이다. 이런 종속 관계는 시간과 공간의 소유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아내의 매음(賣淫) 현장이 ‘나’에게는 금단(禁斷)의 공간이며, 외출을 통해 아내의 가학적 감금에서 일단 풀려 나온 ‘나’는 다시 아내가 쳐 놓은 시간에 감금된다. 자정(子正) 전에는 절대로 집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외출 시간은 아내의 매음과 자신의 자유방임이 묵계된 시간이다. 이러한 자정(子正)의 시간과 반대쪽인 정오(正午)의 사이렌은 강요된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전기(轉機)가 된다. 즉, 대낮의 정점으로서의 정오(正午)는 ‘나’의 유폐성(幽閉性) 극복과 도착(倒錯)된 아내와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전환점으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의 날개와 비상(飛翔)에의 소망은 박제(剝製)와 무력(無力)과 유폐된 시간으로부터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릴 수 있는 탈출의 욕망이며, 아내라는 구속성과 거짓됨에 맞설 수 있게 하는 진정한 자아의 확인이자 건전성(健全性)에 대한 향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