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세계직지문화협회 직지콘텐츠공모전 대상
금구가 울릴 때 / 배태선
토닥토닥 두드리면 활자活字가 된다. 글쇠판에 박제된 문자가 모니터 위를 훨훨 난다. 프린터가 얄찍한 종이를 잡아당기면 잉크 토너는 말쑥하게 인쇄하여 밀어낸다. 순식간이라 고마워할 새도 없다. 자료를 주섬주섬 챙긴다.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전시된 흥덕사의 유물, 청동 금구를 만나러 잰걸음을 놓는다.
흥덕사지가 인시寅時에 들면, 불에 그을린 금구禁口*의 울림이 동편에서 아슴푸레하게 들릴 듯하다. 입추를 지났건만, 끝이 보이지 않는 더위는 모든 물상을 향해 아가리를 쩍 벌리고 화염을 내뿜는다. 염소 뿔이 물러 빠질 지경인 더위에 땅 위 숨탄것들이 헉헉댄다. 태양은 팔작지붕 기왓장에 이글거리는 끝물을 쏟아붓고, 그 열기는 고스란히 기왓골에 고인다. 그럼에도 용마루 끝의 치미는 꼿꼿하게 허리를 곧추세우고, 귀면 기와는 눈을 부릅뜬 채 잡귀와 재앙을 막느라 밤낮이 없다. 화마가 거쳐 간 이력 탓인지 금당 안 철불鐵佛은 그을린 듯 새까맣다. 앞마당 석탑은 가람의 옛 모습을 그리는지 더위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내리쬐는 땡볕은 보주 위에서 부서지고, 화강암을 달군 말복 더위가 옥개석 처마에 쏟아진다. 그들은 모두 합심하여 ‘직지直指’의 산실産室을 지키는 중이다.
직지의 본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백운화상이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부처와 고승들의 법어, 대화, 편지 등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 엮은 책이다. 일반백성도 쉽게 법어를 접하고 선의 요체를 깨닫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든 것이다. 고려말, 불교는 왕실의 비호 아래 귀족과 결탁해 여러 가지 폐단을 낳는다. 그 부작용의 고통은 힘없는 백성들이 감내해야 했다. 그 만연한 병폐를 보면서 백운화상은 종교의 본질을 오롯이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고려 우왕 3년(1377) 흥덕사에 금구가 울린다. 입을 닫고 마음을 한곳에 모아 예불을 시작한다. 정제된 혼신이 주조된 금속활자로 문장을 찍어낸다. 백운화상의 제자 석찬과 달잠은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스님이 입적한 후에 직지를 간행한다. 사찰이 서적 발행의 메카가 되는 순간이다. 먼 훗날의 행로는 짐작도 못 했으리라.
한국 주재 초대 프랑스 공사였던 콜랭드 플랑시는 고서 애호가로 직지 원본을 수집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고려 태생 금속활자본은 ‘드루오 경매장 경매 번호 711’이 찍힌 채 현재는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오랜 시간 도서관 수장고에서 침묵하던 금속활자본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프랑스에서 고인이 된 재외 동포 박병선 박사의 노력이 있었다.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던 그녀에게 프랑스국립도서관은 1972년 ‘세계 도서의 해’를 앞두고 동양 서적 전시하는 일을 맡긴다. 도서관 서고 정리 막바지쯤, 직지를 만난다. 손끝을 타고 오르는 묵직한 울림이 그녀의 심장을 전율에 쌓이게 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은 독일의 <구텐베르크 42행 성서>였다. 세상은 오랫동안 그렇게 알고 있었다. 78년이나 앞선 직지가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녀는 무려 5년 동안 준비한다. 마침내 세계 도서의 해 전시품에 나와서 그 위용을 인증받게 된다. 또한 국내에서 영인본을 발간할 수 있도록 교두보를 마련한 것도 박병선 박사였다. 이로써 직지에 대한 연구가 국내에서 진전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풀지 못한 의문이 한 가지 남았다. 직지 하권 마지막 부분에는 ‘ 1377년 7월 청주 외곽에 있는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되었다’라고 적혀있다. 흥덕사는 통일신라시대에 건축되어 고려시대까지 존재했던 사찰로, 문헌상으로만 존재하고 그 위치를 알 수 없었다. 간절히 염원하는 이들의 바람이 사그라지지 않은 덕분인가? 1985년 운천동 일대 발굴 조사에서 ‘흥덕사’라고 새겨진 청동 쇠북(금구)과 유물이 발견되어 그 터가 흥덕사지임이 확인되었다. 고려 말 사찰은 화재로 소실되고, 폐사지 흙더미 속에서 금구는 유구한 세월을 묵언 수행하며 보낸다. 발굴 후 정면 5칸, 측면 3칸의 금당이 복원되고 3층 석탑과 함께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고, 문명이 발전하도록 지대한 영향을 준 것 중 하나는 기록이다. 그 기록물이 다수의 사람에게 전해지기 위해서는 인쇄술이 필요하다. 소수 권력층의 소유였던 책이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대중화되고 지식을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혹자는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100대 사건 중 1위는 금속활자발명이라고 말한다.
금구가 울릴 때 활자는 문장으로 빚어져 세계 최고의 금속 인쇄물 직지를 만들었다. 그을린 쇠북의 울림은 후손의 땅을 깨워 퍼즐의 조각을 찾게 했다. 문화재를 찾아내고자 힘을 쏟은 각고의 노력 끝에 직지심체요절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된다. 시대와 시대는 기록으로 이어지고, 숭고함은 기억에 오롯이 각인된다. 자신의 유골을 노르망디 해변에 뿌려 달라고 했던 박병선 박사, 물고기들과 노닐며 물결을 타고 고국의 어느 바닷가에라도 다다르기를 염원했다. 지켜야 하는 건 모두의 몫인데…. 그의 유언을 접하니 고개가 숙어진다.
금당지 동편이 아득한 시간 속으로 든다. 금구의 울림이 들리는 듯 초목은 조용히 예를 갖춘다. 묵직한 걸음을 대구로 옮긴다.
* 금구(禁口)란 금고(金鼓) 또는 반자(飯子) 등으로 불리는 절에서 쓰인 의식 법구의 하나로 북 모양의 종. 진품은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
** ‘백운’은 직지를 편찬한 경한 스님의 호이며, ‘화상’은 스님을 높여 부름. ‘초록’은 중요한 부분만 발췌한다는 말이며, ‘불조직지심체요절’은 부처와 유명한 승려들의 가르침을 깨닫는데 핵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을 이름.
첫댓글 2024 세계직지문화협회 직지콘텐츠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배태선 선생님의 작품입니다.
문장인문학회의 명예를 드높인 배선생님에게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