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어야 사는 밀알의 신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하지만 영적으로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적어도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죽으러 가십니다. 자칫 예루살렘 입성이 승리의 개선행렬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가시는 길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예언의 응답입니다. 오래 전에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낸 온 인류의 구원자로 세우시겠다는 예언의 응답이었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파스카의 어린양이십니다. 바리사이와 대사제들은 예수님의 모든 기적들과 예루살렘 입성에 대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다가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에 반해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도 많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을 세 분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라자로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실 때에 그분과 함께 있던 군중이 그 일을 줄곧 증언하였다”(12,17). 어떤 사건에 대해 목격자의 증언은 큰 효력을 가집니다.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현장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 죽은 라자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라며 끊임없이 증언했습니다.
목격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건을 전하게 됩니다. 타인을 통해 간접으로 전해 들은 사람들은 별로 전교의 열정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경험하고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사실에 대해 자주 언급하게 됩니다. 버스에 타서도 옆 사람들에게 꼭 한마디를 던지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라자로의 부활에 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군중이 이렇게 예수님을 맞으러 나온 것은, 그분께서 표징을 일으키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12,18)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 굉장하고 충격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그런 소식을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어떤 성당에서 죽은 사람이 살아났대. 근데 살아난 사람이 그 성당 미사에 나온대.” 그 소식을 듣고 우리는 “그런가 보다”라는 식으로 반응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디 한번 가서 보자.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복음은 “착하게 살자, 의롭게 살자, 믿음 없는 것보다 믿음 있는 것이 낫다”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것과 같이 충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순교를 각오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죽었던 라자로가 살아났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셋째는 예수님을 반대했던 대사제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런 바리사이들 사이에 분열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서로 말하였다. ‘이제 다 글렀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소.’”(12,19)
바리사이들은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증인으로 나서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많음을 보고 그들 사이에 내분이 일었습니다. 엄연한 사실을 은폐하려 한 시도는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 사이에서 “우리의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되고 말았어. 예수를 믿고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봐. 이제 소용없게 되었어”라는 이야기들이 불거져 나왔습니다.
그때 매우 중요한 사건을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의 명절인 파스카 축제를 맞아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2) 영광을 얻을 때
그중에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많은 유다인들이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라는 함성 속에 옷을 벗어 길에 깔며 환영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속에 어떤 한 분이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인들에게 그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 분은 누굴까? 왜 많은 사람들이 저 분에게 환호성을 보내는 것일까?”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갑니다.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12,20-21)
그리스 사람 몇 명이 예수님을 뵙고 싶다고 찾아온 사건은 그리 대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히 당시 유다인들의 시각으로 볼 때 매우 하찮은 이방인들이 찾아온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매우 중요한 일로 여겼습니다. 왜 그리스인들은 필립보를 찾아갔을까요? 필립보란 이름은 그리스식 표현입니다. 그들이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를 찾아가 요청한 것은 예수님을 뵙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자세히 보면 필립보가 그들의 요청에 당황하며 머뭇거리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드레아에게 의논합니다. 안드레아도 필립보에게 “우리가 함께 가서 예수님께 이 일을 전하자”고 제의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리스인들이 뵙기를 청하는 말을 전했습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의 얘기를 들은 예수님의 대답은 ‘좋다’ 혹은 ‘싫다’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12,23)
제자들이 그리스인들의 간청을 말씀드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 후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만났든 못 만났든 상관없이 23절 말씀은 우리가 받아야 할 메시지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리스 사람 몇 명이 찾아온 사소한 일이지만, 이것은 굉장히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런 와중에 바리사이들과 대사제들 그리고 율법학자들과 갈등이 있었지만, 어쨌든 이것은 모두 유다인들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그리스인들이 찾아와 예수님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첫댓글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요한 12,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