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순애보(殉愛譜)에서 받은 감동
오늘 중학교 동기 한 사람을 52년 만에 만났다. 중학교는 같이 졸업했는데 대학교는 나보다 한 해 늦게 진학해 1년 후배다.
졸업 후 그 친구는 경북으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다가 대구에서 퇴직하고 정착했다. 그러니 만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학교 다닐 때 보고 오늘 처음 본 셈이다.
중학교 동기 아들이 검사인데 오늘 그 동기 아들의 결혼 피로연에 참석하기 위하여 온 것이다. 그 두 친구는 막역한 사이다.
피로연 장소가 명석이었다. 진주로 돌아올 때 승용차에 네 사람이 함께 타고 왔다. 그 중에서 여자 동기가 한 사람 있었는데 찻집에서 차나 한잔 하고 가자고 제안해서 오죽광장 옆의 찻집에 들렀다.
여러 가지 담소를 나누던 중에 내가 오늘 처음 만난 친구에게 그 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물었더니 살아온 여정을 이야기 하는데 친구의 순애보에 모두 넋을 잃고 감탄하면서 들었다. 이야기를 요약하면 대략 이러하다.
십 수 년 전에 자기 아내 다리 마비가 와서 병원에 갔더니 척추 암이었다는 것이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병을 고치기 위해 서울소재 암 전문 병원을 찾아 갔는데 삼성 의료원이나 아산 병원 같은 곳은 입원 하는 데만 몇 달을 기다려야 순번이 돌아 올 정도로 예약이 밀려 있었다는 것이다. 급한 생각에 여러 사람들의 연줄을 동원하여 대학 병원 급이면서 단시일 내에 입원할 수 있는 병원을 찾았는데 다행히 연세의료원에 입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나라 척추전문의로서 명성이 첫 손가락으로 꼽히는 교수를 만나 수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술 전 동의서를 받을 때 교수와 면접을 했는데 그 교수가 척추 뼈 3개와 그것에 붙어 있는 갈비 뼈 한 쌍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철로 만든 핀으로 고정하는 수술을 하는데 평생 휠체어 신세를 질 확률이 높고, 자칫 잘못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하면서 수술 동의서를 요구하기에 허락을 했다는 것이다. 오전 8시에 시작한 수술이 오후 10시에 끝이 났는데 그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담당의사가 파김치가 되어 나오더라는 것이다. 수술은 다행히 잘 되었고 부인도 일상생활을 10여 년간 잘 지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수술한 자리에 농이 생겨 고름이 나오기 시작하여 상비약으로 가정에서 치료를 하던 중 자세히 살펴보니 금속 조각이 보여 수술한 병원에 다시 갔더니 10여 년간을 지나면서 움직임으로 인하여 너트가 풀려 밖으로 나온 것인데 재수술을 하는 수밖에 없는데 첫 수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고 후유증도 더 심할 수 있다고 말 하면서 그래도 수술을 하겠냐고 하기에 동의를 하여 수술을 하였다는 것이다.
인공척추 주위를 지나는 신경이 약해져서 수술 후 손상되어 하반신은 완전히 마비가 되어 움직일 수도 없고 감각도 없는 불구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의료 사고를 인정하여 어느 정도 보상을 받고 퇴원하여 집에서 친구가 직접 병간호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서 밖으로 나갈 엄두를 못 내서 그동안 동창회 같은데 참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병수발 이야기를 하는데 눈물겨웠다.
음식을 손수 만들어 먹여 주고 대소변을 직접 받아 내며 간호를 하는데 욕창이 생기지 않는 매트를 사용하였는데도 3년 쯤 지난 어느 날 등에 물집이 생겨 자세히 보았더니 근육이 함몰되어 뼈가 보일 정도로 조직이 손상 되었더라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치료하여 낫게 된 이야기, 변을 처리하면서 생긴 일화, 소변 줄은 의료 상식이 있는 아들이 갈아 주는 이야기, 설사를 한 변을 처리하다가 오물을 뒤집어써도 전혀 더럽게 여겨지거나 얹짠은 생각이 들지 않는 이야기, 업 친데 데친 격으로 자기가 병이나 4년 전에 위암 수술을 받은 이야기, 처가 댁 식구들이 와서 보고 사위에 대한 미안함으로 요양병원으로 옮기도록 권한 이야기 등 애틋한 순애보를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그러한 불구의 그 부인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비록 몸은 죽은 것과 같지만 상반신의 정신이 살아 있기에 그것만 있어도 족하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감동이었다.
아들이 하나인데 그 아들도 어머니께 지극정성을 다 한다는 것이다. 그 아들에게 유언처럼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너의 어머니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겠다. 너희들은 너 어머니 때문에 희생할 생각은 말아라. 너희들을 뒷바라지 한 정을 생각하여 한 달에 한 두 차례정도 방문만 해 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혹시라도 내가 먼저 죽게 되면 그 때는 너의 엄마를 요양병원으로 모셔라. 나는 너의 엄마 뒷바라지를 하며 돌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우리 동기 세 사람은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그 친구가 마지막으로 이런 말도 했다.
자기가 고향 친구들에게 소홀했던 사연도 덧붙이면서 친구들이 자기를 오해하고 있음을 간접으로 들은 이야기도 피력했다.
나는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을 했다.
“나. 너 정말 존경한다. 나 같아도 너처럼 그렇게는 못할 것 같다. 사람의 행복 척도는 주관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으로 여길 일도 어떤 사람에게는 행복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 행복할 일인데도 그것을 오히려 불행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오늘 우리가 식당으로 가기위해 모였던 이현수 사무실 책상위에 있던 글귀 ‘知足常樂’ 즉 ‘만족함을 알면 항상 즐겁다’는 글이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하루였다.
사람들은 흔히들 쉽게 다른 사람을 비평하는데 그것은 정말 잘 못된 짓이다. 사람은 최소한 그 당사자의 신발을 신고 십리를 걸어보지 않고서 험담을 해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죄악이 될 수 있다.”
여자 친구는 “나는 나를 기구한 운명으로 여기고 살아왔는데 너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나는 정말 행복했었다.”
또, 한 친구는 “나는 오늘부터 모든 것을 감사하게 여기며 살아야겠다.”
나는 오늘 일을 생각하며 과거와 오늘날의 결혼관을 생각해 보았다.
요즈음 사람들의 결혼 모습을 보면 대부분 만혼이다. 젊었을 때 결혼을 하면 함께 가정을 엮어 갈 기간이 길기에 힘을 합쳐 자립하여 갈 생각을 한다.
늦게 만난 사람들은 함께 노력하여 자립할 기간이 길지 않기에 자신들이 합심 노력하여 성취할 생각 보다는 남자는 여자에게 기대려 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기대려는 생각을 하며 계산기를 두드린다. 거기에 무슨 순애와 깊은 정이 있겠는가?
부부가 사는 날까지 서로 바라만 보아도 미소 지을 수 있도록 결합이 이뤄지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고락을 함께하며 숙성시킨 정 때문이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훈훈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내가 못해줘서 미안하고 더 주지 못해서 안타까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오랜만에 만난 대구에서 온 그 친구는 우리 세 사람에게 자신을 되돌아보도록 했고, 성찰하게 했고, 철들게 했다.
고맙다. 친구야!
첫댓글 참 대단한 친구네.
이런 글을 읽으면 나도 그렇게 해야지 하는 생각은 하겠지만
잠깐 간병은 짜증없이 하겠지만 장기간 병수발 짜증없이 하는 사람은
성인에 가까운 사람일것 같이 생각이 드누만 정말 대단해...
이거 다른데 퍼가도 되지?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