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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이후 요동은 어떤 곳이었을까?
어떤 분은 심지어 발해가 문명국인지도 의심스럽다는 말을 하는군요.
솔직히 이게 우리의 일반적 발해에 대한 현재의 인식인지도 모르지요. 남북국 시대니 해도
통일 신라 시대를 입버릇화 되어버린 현실처럼.
당나라가 발해를 단순히 립싱크로 해동성국이라는 말을 붙였을까요? 자국 중심사관에서 타국을
쉽게 인정하지 않고 기록하기를 꺼리는 역사관에서 더욱.
이런 지도가 있어 한번 붙어 봤습니다.
뭔 영토가 크다고 해서 좋은 나라는 아니지만
현재의 중공 면적이 아닌 당시 발해 시기의 당나라과 비교해서의 발해라는 나라가 결코
작은 규모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낄수 있음에 첨부해 보았습니다.
함(咸), 신(信). 소(蘇), 복(復), 진(辰), 해(海), 동(同), 은(銀), 오(烏), 수(遂), 춘(春), 태(泰) 등의 요동 50여 곳 성안에서
- 요사(遼史) 식화지(食貨志)-
-송사(宋史) 송기전(宋琪傳)-
개원성 서남쪽에 영원현이 있고 또 그 서남쪽에 남경이 있으며 더 남쪽에 합란부가 있고
-대원일통지-
발해가 다스린 5경의 도시 인프라 규모와 건축물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한 비교로 상경용천부의 크기가 16㎢ 로 로마 13.7㎢ 보다 크며 동경용원부와
서경압록부는 외성이 존재 하고 중경현덕부도 외성이 존재한다는 소리가 나오면서 실제
더 컸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발해의 중요 건축물은 고구려 전성기때 이상의 규모로 보고되고 있지요.
해동 성국이라는 칭송을 뒤로 하고라도 발해의 5경을 혹자는 당의 영향을 받았니 하지만
실제 당나라의 5경은 4년 정도의 짧은 기간 안사의 난의 피신처로 발해와는 용도에서나
근본 성격부터 다르고 당시 당나라는 장안, 낙양의 양경 체제였습니다.
발해의 5경은 기본 고구려의 5부에서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잘못된 인식중 하나가 발해를 고구려나 당의 아류 정도로 생각하는데
실제 발해의 도시 인프라와 인적 영향력은 요와 금나라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문명이며
성할때의 영토도 요사에서 요서지역까지 주를 두었다는 기록에서부터 지금 밝혀진 유적 유물에 의해
북방 영토가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습니다
발해 멸망후의 요나라 시절에도 발해지역은 동경 요양부로 그 도시 크기는 요나라
중경 대정부보다 더 컸습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요나라가 기근으로 요동에서 나오는 농산물 잉여가 상당히 풍부하고
번성하여 수로로의 조달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올정도로 연운 16주와 함께 요동은
양대 곡창지대였습니다. 물론 현재 발굴되는 발해의 북방 영토의 확장과 관련해서 당시의 온난한
기후와 더불어 요동의 식량 사정은 예전보다 더욱 풍부했을 것임을 알수 있겠지요.
실제 요동지역은 수십만호로 고대 각 호당 인구수로 보았을때 넓게 잡아 200만에서 300만 정도가
살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요나라의 경우에 수도가 상경임황부이지만 중경대정부가 실질적인 수도로 그것을 건설한 사람 역
시 발해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문명이라는 것이 순식간에 전멸하는 경우는 세계사에서도 극극히 드물 경우입니다.
카르타고를 예로 들지만 실제 로마에 멸망하고 복속된 후 더욱 융성했던 도시중 하나가
카르타고 입니다.
발해의 거대한 도시 인프라는 단순히 발해때에 축척되어 나온 힘이 아닙니다.
현재 고구려의 인구를 과거 350만에서 현재 500만으로 늘려 잡은 추세로 가는 것도 고구려가
수당에 대처한 군사수나 국력에서 뿐 아니라 실제 고구려의 중요 성들의 도시 규모가
상당한 크기로 확인되고 있어 과거의 인구 추정치가 상당히 보수적 견해가 깔렸음의
인식 변화들입니다.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키면서 물론 인적 자원의 수탈이나 도시 인프라가
파괴된 시기도 있었지만 요동이라는 지역의 고구려 도시 규모는 일순간에 다 파괴하고
인적 수탈을 다 할 만큼 작은 규모가 결코 아닙니다. -현재 그래서 요동 지역의 고구려인들이
상당수 그대로 남아 있고 각지에서 저향하는 세력들의 인적 자원과 도시 인프라로
다시 일어 설수 있었던 것이 발해라는 설득력이 더욱 높아지는 이유중 하나라고 봅니다.-
물론 당의 영향력이 요동에 제대로 지속적으로 미치지도 않았구요. 당은 신라와의 결전과 토번의 성장 이
후 이런 여러 전쟁의 후유증에 이후 여러 난들이 나타나고 이정기의 제나라등 절도사에게 힘을 주는 상
황으로 갈수 밖에 없었고 결국 당나라 조정은 유명무실해 집니다.
고구려의 발달한 도시 문명을 만든것은 그 근간 이전 시대의 문명의 역사가 당연히 있었기 때문이기에
고구려 이전의 고조선 문명사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며
발해라는 나라 역시 앞선 고구려의 인적 도시 인프라속에서 태어나고 융성하다 이후 요,금 시대에도
요와 금나라에 상당한 문명적 영향력을 미치고 이후 고려 시대로 오면서 요동이 점진적으로 하락
쇠퇴해 갔다고 보는 것이 좀 더 합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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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식적으로 발해의 거대한 도시인프라와 인력이 일시에 후퇴했다고 보기보다는 요금을 지나서 고려시대에 오면서 점진적 쇠퇴를 겪고 이후 조선 시대에 오면서 좀더 쇠락한 형태화 되었다고 봐야겠지요.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기윈전이 만주가 요서가 중심이었다면 기원후부터는 요동이 만주의 중심이며 우리의 부여 고구려 발해 고려 요금으로 이어집니다
한가지 말씀드리고싶은것은 고려시대에도 요양부터 공험진까지 고려의국경선이었으며 이것은 수서 당서 요사 금사 원사 고려사제외 조선초기기록이
모두다 그곳으로 적시하고있습니다 요즘 교과서 보세요 길주설이라는 코미디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