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 11:9)
성경에서 보게 되는 하나님이 행하신 사건은 현재의 시간개념에서는 모두 지난 과거의 일이다.
창조 사건으로 시작하여 선악과, 홍수 심판, 바벨탑 사건이 모두 그러하다.
시간의 의미로는 과거에 이미 완료되었으며 같은 사건은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교훈을 고리로 하여 과거의 사건을 현재와 연결한다.
잘한 일은 본받고 잘못한 일은 본받지 않을 것을 가르치는 교훈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인간에게서 우리가 본받을 것은 없다.
사도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고 하지만 사도를 사도 되게 하신 분이 성령임을 생각하면 인간은 본받을 대상이 아니다.
선악과 이후의 인간을 생각하면 성경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인간은 죄로 인해 죽은 자이고 하나님께는 진노의 대상일 뿐이며
육신의 힘으로는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무시하고 육신의 일에 의미와 가치를 두는 말은 우리를 저주에 이르게 하는 다른 교훈이다.
성경의 사건들은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유지하고 지키시는 원칙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선악과 먹은 인간을 에덴에서 쫓아내시고 생명나무의 길을 그룹들과 불 칼을 두어 지키게 하신 일은 인간은 스스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분명한 원칙이 된다.
이러한 원칙이 지켜지고 유지되는 현실에서 자신의 믿음으로 생명에 이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칙에 위배 되는 심판에 이르는 죄로 규정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취지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벨탑 사건을 ‘과거에 인간이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는 교만을 행하다가 언어가 혼잡하게 되고 흩어지는 벌을 받았다,그러니 우리는 자기 이름을 내려고 바벨탑 쌓는 교만을 행하지 말자’라는 교훈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나 다른 교훈을 따르는 결과가 된다.
선악과 사건으로 시작해서 의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은 왜 죄를 행하는 인간에게 처음부터 개입하지 않으신가?’이다.
하나님은 뱀이 여자를 유혹할 때, 인간이 탑을 건설하고자 할 때는 조용하시다가 문제가 발생한 후에 개입하셔서 조치하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마치 ‘사후약방문’처럼 생각되는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의 피로 이루실 나라에 초점을 두어야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속성인 사랑과 긍휼은 죄에서 드러난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피 흘려 죽으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증거되기에 인간에게서 죄가 나오도록 환경을 조성하시고 죄를 유발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세 전의 계획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에 죄를 범하지 않은 인간이란 없으며, 죄를 범하지 않도록 막으시는 하나님의 일도 없다.
그런데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자 됨으로 착각하는 가운데서 성화라는 이론이 나오고 이것을 믿음의 삶으로 동조하는 같은 생각의 사람이 자신의 행함으로 성화라는 탑을 쌓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 교회에서 드러나는 바벨탑이다.
바벨탑 사건은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창 11:1)로 시작한다.
언어는 인간이 자기 생각을 드러내고 전하는 수단이고 도구라는 것을 생각하면 언어가 하나라는 것은 단순히 세상의 모든 언어가 하나였음을 말한다기보다 인간의 생각이 하나였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언어가 하나라면 당연히 말도 하나인데 ‘말이 하나였더라’라고 구분해서 말하는 것도 생각이 하나였기에 말이 같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간에게 이로움이 되는 것을 하나님의 선한 뜻으로 분별하는 생각이 같고 말도 같았기에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아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라는 의견에 누구도 반대하지 않고 하나가 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 생각과 욕구에 부합된 말을 옳다고 믿기 때문에 자기의 말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죄를 스스로 발견할 능력이 없다.
바벨탑은 땅을 근원으로 하여 하늘을 지향하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땅에서 시작하는 인간의 일로 하늘에 이르고 자기의 이름을 내어 흩어지지 않은 관계를 이루자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인간을 온 지면에 흩으심으로 탑 쌓는 일을 그치게 하신다.
하늘을 지향하는 인간의 욕망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인간이 천국에 닿고자 하는 의도로 하나님을 찾고 부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땅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늘에 닿고자 하는 바벨탑을 쌓는 욕망이다.
아무리 천국을 소망하고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땅에 속한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기에 바벨탑을 쌓은 인간의 속성과 다르지 않다.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한 것도 견고한 탑을 쌓는 일에 더 좋은 것을 택한 것으로 본다면, 현대의 사람들이 복과 구원을 위한 신앙에 더 좋은 것을 택하고 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교회는 하늘에 닿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분명한 죄로 지적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가 할 일이다.
그런데 현대의 교회는 오히려 육신의 일을 토대로 하여 하늘에 닿고 자기 이름을 내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흩어지지 않고 함께 천국에 들어가자는 말로 헛된 신앙을 조장한다.
그리고 누구도 이러한 말에 반대하지 않는다.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을 흩으신 것은 욕망의 상태 그대로 온 땅에 퍼지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개개인의 죄를 따질 필요가 없다. 비록 사용하는 언어는 다르지만 자기를 위한 생각과 욕망이 하나라는 점에서 죄는 하나다.
국가에 따라 언어가 달라도 인간세계에서의 언어와 말이 하나인 속성에서 같은 죄가 나온다.
그리고 죄의 자리에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탑을 건설하는 것을 두고 보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건설하는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신다.
인간의 욕망에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이다. 그리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온 지면에 흩으신다.
그렇게 흩어진 어떤 인간도 자신을 의로 규정할 수 없다.
어디에 존재한다 해도 결국 탑을 쌓은 같은 속성의 인간으로 함께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개입은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눅 1:51)라는 말씀으로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하늘의 언어와 말로 인해 인간이 쌓아온 의와 믿음이 헛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언어의 혼잡이다. 그리고 택하신 자들을 사방에서 모으신다(마 24:31).
그렇게 세상에는 인간의 언어와 말로 하나 된 세계와 하늘의 언어와 말로 하나 된 세계로 구분되는 사태가 발생하며 이것이 성령이 오신 오순절 사건의 의미다.
그래서 참된 방언은 하늘의 언어와 말, 즉 복음이다. 땅에서 자기 의를 구하는 인간의 종교는 바벨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