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청정이건상량문濯淸亭移建上樑文
오백 년 문조(文藻)의 강산이
덧없이 만경창파로 변해버리고,
일곱 여덟 종손과 지손의 집이
모두 한 구역 새 마을로 옮겼네.
마을은 비록 다르나,
정자는 옛날과 같네.
공손히 생각하건대 탁청(濯淸) 선생 김공(金公)은
명가의 빛나는 문벌이고,
성대의 영준한 현인일세.
운암(雲巖) 형과 우애가 독실하니
저절로 휘장을 치고 지내는 화락함이 있고,
퇴계 선생과 교분을 맺어 사귀었으니
지팡이 짚고 서로 노닐기를 얼마나 했던가?
이 오천(烏川) 한 마을은,
곧 토구(菟裘) 삼대였네.
선려(先廬) 곁에 문호를 세우니
원림(園林)이 서로 이어지고,
주택 옆에 누각(樓閣)을 지으니
화석(花石)이 정연하게 있네.
풍류와 문채는
낙사(洛社)의 기영(耆英)에 못하지 않고,
복록과 상서는
분양(汾陽)의 완국(完局)에 비길 수 있네.
그 조부와 부친이
백 년에 음덕을 전하고,
그 아들과 손자가
한 집에 문채를 모았네.
호채(胡蔡)의 가문 명성이 더욱 크고,
추로(鄒魯)의 고을 풍속이 아직 있네.
어찌 영세토록 공경하지 않을 것인가
상재(桑梓)가 울창하고,
아득히 당년에 즐기던 것을 상상하니
풍월(風月)이 다함 없네.
세상 변고가 어찌 이에 이르렀나
홍수가 한 지역에 산을 삼키고,
일의 형세를 어쩔 수 없게 되니
문중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네.
비록 선대에 남긴 향기와 자취를 찾을 수 없지만,
어찌 차마 고택과 사당을 영원히 황폐하게 하리오?
머리를 모아 상의하여
얼마 떨어진 높고 넓은 언덕에 나아가,
힘을 합하여 주선해서
십여 동 집을 지을 만한 터를 닦았네.
옛 집이 매우 가까우니
재목과 기와를 옮기기 절로 쉽고,
정부가 맡아서 관리하니
재물의 비용이 전혀 들지 않았네.
지세를 따라 배치하니
전후의 방향은 조금 차이가 나고,
옛날 규모대로 지으니
집의 칸수는 조금도 변함이 없네.
공인이 기량을 다하니
홀연히 장대하고 화려한 모습 보겠고,
후손이 성금을 바치니
오직 완벽하고 아름답기에 힘을 쓰네.
사당은 위에 있고,
집은 가운데 있네.
마당 곁에 벌려 선 것은
양정당(養正堂)과 설월당(雪月堂)이고,
집 모퉁이에 이어진 것은
후조당(後凋堂)과 읍청정(挹淸亭)일세.
의연히 군자의 고리이고,
진실로 대가의 전형일세.
계산(溪山)이 밝고 수려하니
오늘을 기다림이 있는 듯하고,
문호(門戶)가 높고 크니
오히려 성대한 때를 상상하겠네.
일이 변하는 것은 비록 무궁하다 하지만,
이룬 것을 지킴은 또한 절로 방도가 있네.
고을의 선비는
하례하기 위하여 앞다투어 오고,
길 가는 사람은
또한 바라보며 사모함을 일으키네.
운연(雲煙)은 색을 더하고,
초수(草樹)는 향을 머금네.
이에 상량(上樑)의 글을 베풀어,
아랑(兒郞)의 소리를 돕노라.
들보를 동쪽으로 하니
어름산 높고 푸른 빛 만 겹일세.
넓고 아득한 모습 여전히 불발(不拔)의 기세이니
대양(大洋) 가운데 우뚝하게 서 있네.
들보를 서쪽으로 하니
평탄한 대로가 맑은 시내 건너에 있네.
행인들이 문호의 성대함을 바라보며
방초 제방에 행차 멈추고 머뭇거리네.
들보를 남쪽으로 하니
선산(先山)에 푸른 기운 비치네.
추원(追遠)의 깊은 정성 모두 사모함을 깃들이니
춘추로 다시 묘재(墓齋)에 모이네.
들보를 북쪽으로 하니
암서헌(巖棲軒) 십 리 길이 먹줄처럼 곧네.
일가의 문헌은 여기가 연원이니
늘어서서 모시던 당년에 도덕에 훈도되었네.
들보를 위로 하니
하늘의 별들이 늘어서서 서로 향하네.
긴 밤이 오래 어둡다고 말하지 말라
흰 해가 문득 광채를 발하리니.
들보를 아래로 하니
땅 가득 크고 넓은 집일세.
좋은 날 맑게 갠 때를 기다려
술 마시고 시 읊음이 모두 문아(文雅)의 선비일세.
엎드려 원하옵건대 들보를 올린 후에
지령이 영원히 보호하고,
후손이 더욱 번창하게 하소서.
효제 돈목의 남긴 풍모가 쇠하지 않고,
시서 예악의 남은 가르침이 널리 미치게 하소서.
옛 것이 새롭게 되기가
지금부터 시작하게 하소서.
탁청(濯淸) 선생 김공(金公) : 김유(金綏, 1491∼1552)를 말한다. 자는 유지(綏之), 호는 탁청정(濯淸亭),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1525년(중종20)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운암(雲巖) : 김연(金緣, 1487∼1544)의 호이다. 자는 자유(子裕)이다. 1519년(중종1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정언, 지평,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휘장을……있고 : 이 구절은 형제간의 돈독한 우애를 말한다. 중국 북조(北朝) 때 양파(楊播)가 두 아우 춘(椿), 진(津)과 함께 우애가 지극하여 형제가 항상 청당(廳堂)에 모여 종일 같이 지냈는데, 청당 사이에 가끔 휘장을 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小學 善行》
낙사(洛社)의 기영(耆英) : 낙사기영회(洛社耆英會)를 말한다.
분양(汾陽)의 완국(完局) : 당(唐)나라 곽자의(郭子儀)의 완전한 복록을 말한다. 곽자의가 숙종(肅宗) 때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가 되어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을 평정하기에 가장 뛰어난 공이 있어 분양왕(汾陽王)에 봉하였다. 인자하고 관후한 풍모를 지녔으며 오래 살고 자손이 많았는데 자손들이 당 아래서 인사를 하면 몇째 손자인지 알지 못하고 다만 턱을 끄덕거렸다. 《唐書 卷120 郭子儀列傳》
호채(胡蔡) : 가학이 있는 가문을 말한다.
추로(鄒魯) : 유학 또는 문교가 흥성한 곳을 뜻한다.
암서헌(巖棲軒) : 도산서당(陶山書堂)의 마루 이름이다. 방 이름은 완락재(玩樂齋)이다.
백저문집(白渚文集) 배동환 저 김홍영․박정민 역 학민출판사(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