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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일 편
석야 신웅순
1.
날씨가 청량하다. 올 봄에는 유난히 공기가 탁했고 올 여름에는 유례 없는 더위가 삼한을 덮쳤다. 가을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더위가 쫒기는 듯하더니 홀연 가을이 먼저 와 자리를 차지했다. 자연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
오래 전부터 필자는 시인을 존경해왔다. 시인의 시를 읽어보려고 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시인은 1977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했고 1979년에는 조선일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탁월한 역량의 대시인이다.
허일 시인은 자연 없이는 생각할 수가 없다. 언제나 시가 자연으로부터 오고 시를 자연으로부터 얻는다. 박재삼 시인도 그의 시조는 자연을 노래했으나 결코 인사를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시는 자연이 곧 인간사요 인간사가 곧 자연이다.
젖샘을 보채다가 허깃잠 든 나를 업고
풋바심 한 철 건너기 강물보다 깊던 날에
흰 무명 옷솔기에 밴 소쩍새 울음소리
감꽃이 별똥처럼 떨어지는 빈 뜨락에
가난한 목숨 길어 정화수 달 띄우면
사르르 물무늬 일어 바람조차 삼갔어라
산울림 타고 넘는 아득한 정토라도
지긋이 눈감으면 가슴 속은 열반이라
합장한 이승 그 밖을 우러르던 눈길이여
-「모정」전문
모정이 이리 멀고도 깊은 것인가. 첫째수는 시인의 유년 시절이요 둘째수, 셋째수는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간절한 바램이다. 자식은 어머니에게는 하나의 종교이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자식이 잘 되기만을 위해 일생 구도의 길을 걸어왔다. 그것이 한국의 어머니상이다.
이근배 시인의 해설을 들어본다.
여기 와서 허일의 향토적 서정이 종교의 깊이에 닿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곧, 인간의 삶의 근원과 그 회귀를, 하나의 서정으로 이끌어 올려, 한국인의 전통적으로 감추고 살아 온 한을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보는 그의 시적 결구는 시를 하나의 기능으로 하지 않고 보다 오랜 사고와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구도의 길에 서 있음을 본다.
젖샘을 보채다가 허깃잠 든 나를 업고 풋바심을 나간다. 이 바쁜 바심 한철 건너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그것은 강물보다 깊다고 했다. 엄마의 흰 옷솔기에는 소쩍새 울음소리가 묻어있다. 어머니는 여름 내내 소쩍새 우는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감꽃이 별똥처럼 떨어지는 새벽 빈 뜨락이다. 가난한 목숨을 길어올려 정화수에 달을 띄우면 새벽 바람은 사르르 물 무늬가 인다. 삼가 새벽 바람도 이를 비껴가는 것인가. 바램은 산울림 타고 넘는 아득한 정토요, 지긋이 눈 감으면 어미 가슴은 이미 열반에 든다. 합장한 어머니의 이승 그 밖을 우러르던 어머니의 겨운 눈길이다.
어머니의 기도가 얼마나 깊고도 간절한가.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애절한 그리움이다. 나직이 불러보는 서러운 내 어머니인「사모곡」도, 한생 가슴 야위 내 어머니「어머니」도 시인에게는 차마 비껴갈 수 없는 서러운 눈물이며 아픈 그리움들이다.
두 번째 엮은 시조집 「이 시대를 살아가며」는 단수만 읊은 선생님의 시조집이 다. 시조는 애초부터 단수이며 그것이 원형이다. 시인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단수라야 가곡이나 시조창 가락에 사연을 얹어 부를 수 있다. 그래야 시조의 제맛이 나는 법이다. 음악성이 있는 단시조라면 얼마든지 옛 창에 사연을 얹어 부를 수 있다. 단시조에서 연시조로 바뀌어 간 것은 1920년 대 이후부터이다. 노래하는 시조에서 짓는 시조, 바로 읽는 시조로 탈바꿈하면서 음악과 문학은 서로 남남이 된 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다. 어언 100여년이나 되어간다. 이로 인해 노래와 문학이 함께였던 시조는 노래는 문학을 잃고 문학은 노래를 잃었다. 현대에 와 시조가 자유시화 되어가는 것도 이러한 연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시조의 근원은 음악이면서 문학이었으니 따져보면 음악성을 잃고서는 시조는 존재할 수가 없다. 시조가 자유시화해가는 것은 어쩌면 이 시대의 아픈 시조의 진화를 수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
어머니!
이 그리움 돌에다 새기리까
당신의 이 아들이
당신 곁에 왔습니다
보세요
여기 이렇게
손주놈도 왔고요
-「성묘」
「성묘」는 시라기 보다는 차라리 그림이다. 언어로 그린 세밀한 크로키라고나 할까. 시조는 이런 것이어야 한다. 12개의 각기 다른 붓질로 그야말로 여백이 있는 멋진 문인화 한폭을 완성해내야한다. 12 도막들은 의미를 가지면서 새롭게 연결을 해주어야 하는데 이 때의 연결고리가 느슨한가 팽팽한가에 따라 시조의 우열을 결정해준다. 특히 종장의 첫 소절 3음절은 일대 반전을 꾀해야하는 시조의 운명축이다. 시조의 생명은 여기에 달려있다.
종장 첫소절 3음절 ‘보세요’가 의미를 반전시키고 있지 않은가. 성묘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머니 이 그리움을 돌에다 새기리까’ 하고 물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이 왔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런데 손주놈도 이렇게 왔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리움을 돌에 새기지 않아도 손주놈이 왔으니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묻고 있다. 한 마디 3음절이 천지를 바꿔놓는다.
가시 돋힌 장미더니…
그대 곱던 시절에는
잔잔히 물결치는
눈썹 위로 달 지는데
내 가슴 저문 뜨락에
목련으로 피는가.
-「아내-그대 곱던 시절에는」전문
젊은 시절의 모습과 나이 든 지금의 모습이다. 장미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시 돋혔어도 예쁜 장미가 젊어서는 참 좋았다. 잔잔히 물결치는 것은 잔주름일진대 40대 중년의 세월을 그리 에둘러 말했다. 그 눈썹 위로 달이 진 것이다. 이제 내 가슴의 저문 뜨락에서는 목련이 피어나는 것이다. 목련은 아무래도 장미같은 미모는 아니나 소박하고 따뜻한 여인일 것이다. 젊음과 늙음을 장미와 목련으로 대비한 것이 이채롭고도 아름답다.
전원범 시인은 허일의 시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언어의 조탁에 의해서 빈틈없이 구성해놓은 시적 골격이며 , 말의 절제 그리고 인위적 이거나 가시적인 기교를 부리지 않고 우리말이 갖는 본질적인 리듬을 살펴 시조의 어떤 정형을 보여주고 있다.
허일 시인의 시조는 시조의 전형이다. 시인에게는 화려한 기교도 없고 꾸밈도 없는 소탈한 모습 그 자체이다. 편안한 읽기만큼 의미 또한 울림이 크다. 감동은 독자와 텍스트, 작가와 텍스트와의 거리가 적당히 유지될 때 생겨난다. 작가와 텍스트 사이의 거리가 가까우면 독자와 텍스트와의 거리는 멀어지고 작가와 텍스트 사이가 멀면 독자와 텍스트와의 거리는 가까워진다. 이 거리 조정이 글에서는 생명이나 다름이 없다. 달리 말하면 객관성의 확보이다.
3.
뚝!
그쳤다
순간에
고요가 숨 죽였다
바람도,
꽃도,
새도 깃을 접었다
소나기
지나간 자리
청개구리
한 마리
-「청개구리」전문
시는 구름처럼 일정한 자취가 없어야한다. 산 같기도 하고 강물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람 같기도 하고 짐승 같기도 하다. 맑은 하늘에 구름이 떠돌며 그리는 그림은 천하 명작이다. 그래서 사람은 끝내 그리고 싶은 구름, 그 모호성을 그릴 수가 없다. 시조는 순간 순간 담아낸 연필화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순간 아니면 그려낼 수 없는 그런 숨은 이미지를 시조는 잡아낼 수 있어야한다.
시인은 이를 기막히게 잡아내고 있다. 소나기가 지나가고 난 순간의 적막이다. 어디서 왔는지 적막을 깬 것은 청개구리이다. 파적의 순간을 잡아낸 명화, 김득신의 야묘도추, 파적도를 연상시킨다.
거울을 닦으면서
생각을 닦습니다
생각을 닦으면서
눈물을 닦습니다
내 눈에
눈물나게 한
아아 그도 지워집니다
- 「거울을 닦다가」전문
거울을 닦다가 생각을 닦고 생각을 닦다가 눈물을 닦는다. 내 눈에 눈물나게 한 그도 지워진다고 했다.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화려한 수사보다는 소박한 수사, 화려한 꽃보다는 향기있는 꽃. 이것이 그의 시조이다.
같은 제목이라도 사람에 따라 다 다르듯 같은 바위와 돌이라도 쓰임새에 따라 다 다르다. 매화 곁의 바위, 소나무 아래의 바위, 대나무 곁의 바위, 화분에 얹어놓은 바위가 다 각각 다르다. 같은 거울인데도 같은 생각이나 초·중·종의 생각이 각기 다르게 읽혀진다. 거울에서 생각으로 생각에서 눈물로 눈물에서 님을 닦고 있는 것이다. 쉽게 읽히면서 눈물 나게 만드는 연금술사라고나 할까. 예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보잘 것 없는 듯도 하고, 바른 것 같기도 하고, 예쁜 것 같기도 하다.
4.
하늘에 고인
내 눈물의 깊이로도
어디라 감히
천심을 넘볼까마는
물 오른 버들치 같은
시조 한 수 채고 싶다
- 「허수아비-나의 소망은」전문
「나는 천생 허수아비라」시조집의 책머리에 있는 한 수이다. 시인의 따뜻하고도 절제된 인품을 느낄 수 있는 시조이다. 시인이라면 일생동안 명시조 한 수쯤 채고 싶은 것이 시인들의 로망이다. 일생을 써도 시조 한 수 제대로 채기가 쉽지 않다. 시조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유이다. 시조는 우리 민족의 호흡이기에 누구나 쓸 수 있다. 반면 아무나 쓸 수 없는 것이 또한 시조이기도 하다. 시조는 격이 있어야하고 아정해야하고 단정해야하고 절제해야한다. 이런 말을 하면 젊은이들이 반발하고 나설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아어만을 쓰자는 말은 아니다. 그 어떤 사건도 모난 돌이건, 둥근 돌이건, 네모난 돌이건, 삼각진 돌이건 상황에 맞게 12개의 돌로 적절히 배치해놓아야 한다. 필요 이상의 돌은 유치해져서 시조에게는 아예 금물이다.
하회탈이 나를 보고
대포 한 잔 걸치자네
흙내음 묻어나는
주름 패인 웃음으로
강물이 만리를 구비친들
눈물보다 깊으랴며……
-「종심(從心)의 길에」
종심은 70세를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로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말이다. 70의 종심은 50세의 지천명과 60세의 이순을 거쳐 공자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성인지도를 말한다. 지금에 이르러선 더욱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나이이다.
하회탈이 나를 보고 대포한 잔 걸치자고 한다. 흙내음 묻어나는 주름 패인 웃음이다. 달관의 경지, 종심의 경지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바로 하회탈은 자신이 살아온 모습이다. 그리고 ‘강물이 만리를 굽이친들 눈물보다 깊으랴며’ 자문자답하고 있다. 흙내음도 살아온 삶이고 주름도 살아온 삶이다. 주름 패인 웃음으로 대포한 잔 걸치자는데 세상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마다할 이가 누가 있으랴. 그러나 눈물보다야 그게 어디 더 깊겠는가. 눈물을 웃음과 대비시켜 독자들의 마음을 울컥 흔들어대고 있다.
한편 더 건드려야겠다.
5.
/
☆
아, 저 섬광!
별이 분신 낙하하는…
만길
어둠을 찢고
혼불 떨어진 거기
아직도
눈을 못 감는
푸른 넋들이 있어……
-「미완의 장」전문
오래 전에 이 시조를 감명 깊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 필자에게 이 시조는 많은 것을 묻게 해준 작품이다. 시조는 고상한 것인가, 그윽한 것인가, 소박한 것인가, 담백한 것인가 등등이다. 아무래도 시조는 모란이나 해당화 같은 화려하거나 요염한 꽃은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매화나 대나무, 소나무, 오동나무 그런 쪽에 더 가까울 것 같다. 스타일이 그렇다는 것이다. 시조 아니면 쓸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다. 시인은 그 깊은 금맥을 찾아 세상 밖에다 보여주고 있다. 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있고, 빠지는 것이 아니라 즐기고 있어 그의 시조는 단정하다. 그래서 시인은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대중적이고도 전문적인 그런 고매한 시조를 창작해내고 있다. 하늘의 달 같기도 하고 음악의 거문고 같기도 하고 새 중 두견새 같기도 하다. 맑고 아정하고 한 같은 시인의 시조는 우리나라 시조의 맛깔스러운 정수 그 자체랄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대와 사회의 비판과 아픔도 보인다.「미완의 장」은 바로 그런 빼어난 역사성, 사회성을 코드에 숨겨놓은 작품이라 단언하고 싶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동학혁명, 일제 침략, 육이오, 5.18 민주화 운동 등등 우리 민족의,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는 떠도는 푸른 넋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인의 눈물 하나 더 보탠다. 이 시조야말로 바로 시인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시인의 기품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휴머니티한 인간미가 물씬 배어있는 따뜻한 시조이다.
애당초
월척이야
마음에 아니 두고
이런저런
뜬 생각에
수궁을 기웃거리다가
그 세상
하 평화로워
가만 찌를 거두다
-「낚시」전문
출처: 서예문인화,2018.10,93-97쪽.
석야 신웅순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