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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글마루 20주년 기념호로 출판됐던 <글마루 2006>의 특집 "글마루 20년을 돌아본다 "에 실렸던 글들을 여기에 옮겼습니다.
참으로 그리운 마음들을 나누어봅니다.
■특집―글마루 20년을 돌아본다
글마루 素描
최경희
내가 처음 글마루에 나간 해가 87년 봄일 것이란 게 드러났다. 글마루가 벌써 15주년을 찾아 그 기념특집을 낼 것이라는데 고참 동문들 묵은 회고담이나 에피소드 등을 실을 참이라며 하필 주변머리 없고 요량머리 없고 지각머리까지 없어 별 수 없이 오랫동안을 뭉그적대며 주저앉아 있던 탓밖에 없는 나한테 시위를 떠난 그 화살이 꽂히고만 것인가 보다.
처음엔 물론 사양을 했었다. 그러나 그 넉살좋고 유들유들한 김동찬 출판팀장이 착 가라앉혀 물 올린 촉촉하고 나긋나긋한 음성을 연출해내 귀신같이 내 허점 이곳저곳을 잘도 골라 요리조리 되작거려 질러가며 구슬리는가 싶더니 종당엔 그 야릇하게 처진 눈꼬리에 무슨 음모라도 숨어있는 듯한 심상찮게 요요한 실웃음을 달고 내 흐트러진 마음을 훔쳐내 도르르 감아 올아 날름 삼켜버리는 능구렁이 수법에 그만 나도 모르게 소롯이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타고나기를 주전없고 실속 없고 속알머리까지 없어 내가 안쓴다치면 누가 쓰랴 하는 터무니없는 만용까지 가세해, 짐짓 나를 이 형극의 길(?)로 내몰고 만 셈인가.
평생을 빌붙어 시도 때도 없이 진절머리 나게 나를 유린하며 함께 늙어온 오월동주 내 두통이 요즈음은 무슨 오기인지 이전에 없었던 더 첨예한 공법으로 고지탈환전이라도 벌이는 중인지 가히 단발마적 기승을 부리는 중인데 행여 다칠세라 어르고, 달래고, 빌고, 기고하는 턱도 없는 아첨으로 그 변덕스런 비위를 받들어가며 펜대를 잡고 생각의 앵글을 맞춰 가는 판인데 그만 첫 문턱에서 덜컥 걸려들고 말았다.
회고담이라는 걸 쓰자면 아무래도 차례를 챙겨 써나가야 할 일이었다. 그러자면 내가 글마루에 처음 나간 대목부터 출발시켜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류의 글은 픽션이 아니고 논픽션이어야 함으로 사실적이라야 하는 건데 처음나간 그 대목이 딱 짚이지가 않는 것이다. 정확히 언제부터 내가 글마루 서원 서생이었는지가 아리송한 것이다.
사실기록 같은 게 없는 데다 하도 오래 전 일이고 또 원체가 시원찮은 것 투성인 내 기억이라 갈데없이 긴가민가 하는 선에서 오락가락하고만 있었는데 문득 떠오른 게 그때 나를 글마루에 이끌어 내준 꼼꼼하고 틀림없는 은행가 출신 시인 박만영 선생이었다. 때맞춰 신통한 생각이다 싶어 좋아라 냉큼 전화를 했다. 본인, 나간 해도 아물거리는 판국인데 깨꿍맞게 어찌 남 일까지야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할 것이지 따지기는’ 하는 요지로 여전히 한 옥타브쯤 올린 카랑카랑한 목청이 말끝머리를 밀어 올려 출렁이는 여운이 남게 하는 개성 있는 억양으로 약간의 냉소와 야유투 경상도 사투리가 되돌아왔다.
뜻밖이었다. 마음 풀고 있다 얼김에 한방 맞고 얼얼했다. 그리고 자괴감마저 들었다. 이렇게 되면 혹 떼려다 혹하나 더하는 셈인가. 딴에는 그게 틀린 말은 아니다. 하긴 무슨 사생결단 낼 일이라고 여기저기다 물 막음 대듯 입방아 찔 일도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총대를 메어 버렸으니. 역시 오백 나한 한 또래로는 한 타령일 뿐 손익은 무승부 피장파장 뾰족한 수는 없을 듯 싶어진다.
첫방에서 이렇게 보기 좋게 헛방을 쳤지만 그렇다고 이제와 손들 수도 없는 노릇 이번에는 좀더 싱그러운 방법으로 선도가 훨씬 싱싱한 세대를 추려내기로 했다. 그때 알기로 그 시절 나보다 조금 먼저 글마루에 나온 한층 젊고 섬세한 이청자 서생께 전화를 했다. 푸른 하늘을 하얗게 가르고 속공으로 날아올 하얀 공이 내 손안에 담쏙 담겨질 홈런을 기대한 그에게서도 왠지 한물이 간 듯한 냄새를 풍기며 신통찮게 말끝을 얼버무리고 만다. 그렇지만 지난날 페니 한 푼 틀림없이 꼬박꼬박 회계기록을 하던 그답게 ‘대대로 내려오는 회계기록을 참조하면 회원동태가 나와 있을 테니 참고하라’는 퍽 신뢰가 갈만한 안을 건네주었다. 수긍이 가 기록을 추적해 봤지만 그 시절 것은 이미 어디론지 증발, 오리무중이었다. 특색 있는 아이디어들이었으나 채택할 방법은 없었다.
두 방을 헛방으로 날려 보내고 나서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그리고는 허공을 향해 무슨 묘안이 없을까 되지락 되지락 궁리하고 있던 중 이 방법밖엔 없겠다 싶은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깊이 묻혀있는 묵은 카드발굴안이었다. 내가 그간의 것들을 미련스레 거의 버리지 않고 쌓아두었던 글마루 교재나 시간마다 들고 나온 동문서생들 묵은 작품 속에 혹시 참고할만한 게 숨어있을 것 같은 예감이었다. 지난날들의 숨결과 풍문이 새겨져 있을 묵혀둔 타임머신을 찾아 뻐근해 오는 허리를 추스르며 새벽녘까지 여러 뭉치 묵은 기록물들을 꺼내 한 장 한 장 청승맞게 들추어보는데 과연 예감대로 어느 때 것이었는지 박양권 선생 수필 “아홉살 글마루”를 건져 올렸다. 놀랍게도 대어였다.
그 글에서는 “86년 8월 3일”에 글마루가 시작했다 기록하고 있다. 선생 자신 기억도 그렇지만 그때 일기장에 확실히 “8월 3일 고원 교수님 모시고 시모임 시작”이라 적고 있다 했다. 그 다음은 “8월 17일 일요일 글마루 장소를 옮김”이라 되어있고 바로 그날 교수님께서 모임 이름을 “글마루”라 명명하신 거라고도 적고 있다.
기록해 둔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가 그렇지 못한 내 취약점을 아프게 짓뭉개고 있었다. 그런데 또 어느 때 것이었는지 교수님 필적으로 된 “글마루 문예학원 연혁”에는 “87년 7월 ‘시창작교실’과 ‘오렌지 고원 문학교실’ 수료생 중심으로 ‘글마루 문학교실’이라는 새 이름으로 개편 8월 3일 개강”이라 기록된 게 있었다. 앞서 두 분 기록에서는 개강날짜는 같은 8월 3일인데 연도가 차이가 나 있다. 앞글은 86년도 뒷글은 87년도이다. 이점 박양권 선생은 단호히 본인기록 86년도가 맞다 못을 박는다.
어떻든 내가 처음 글마루에 나간 장소는 월셔에 있는 어느 건물 2층이었는데 그곳은 박디니 서생 잘 아는 부동산 사무실이라 했다. 박양권 선생은 그리로 글마루가 이사한 게 바로 87년도라 선언하듯 단언을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봄철에 내가 나왔다는 사실을 당당한 어조로 증언을 했다. 이리해서 내가 글마루 나간 해가 87년도 봄이라는 게 판명이 된 것이다.
돌이켜보니 박양권 선생은 긴세월 글마루에 뿌리박은 기둥으로 우뚝 서있었다. 그 기둥은 글마루 수문장이었고 증인이었다. 선생은 이미 생래적으로 기둥감이었다. 한번 지어먹은 마음 우직하여(?) 변할 줄 몰라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움직이지 않고 한자리에만 서 있어야 하는 업보로 선택의 여지없이 무슨 일이건 간에 싫든 좋든 보아두어야 하는 증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분을 등잔 밑이 어두워 찾지 못하고 나는 잠시 변죽만 울리고 있었던 듯하다.
또 하나 진귀한 기록이 있었다. 처음 글마루에 나간 그때 내 육필로 기록한 그 당시 글마루 서생 명단이었는데 먼저 기재된 서생들 16명은 인적사항이 타이핑으로 돼 있고 그 영자 이름아래 표기한 한글이름은 인적사항이 타이핑으로 돼 있고 그 영자 이름아래 표기한 한글이름은 교수님 필적으로 기록돼 있었다. 그 명단 말미 공간에 17명째 석상길, 18명째 이청자, 19명째 최경희 서생들은 각자 육필로 신상사항을 기록하고 있었다. 또 맨 아래 여백엔 교수님 주소가 기록돼 있기도 했다.
그때 당시는 이 기록물이 별로 귀하지도 않고 쓸모도 없어 버려 버려도 아깝지 않던 종잇장이었는데 어쩌다 지금까지 남아 있던 게 놀랍게도 한 역사의 현장기록이 되었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 한 장이 지금은 전통을 보전하는 글마루 역사와 값진 추억의 고전 방명록으로 자리바꿈하고 있었다.
내가 글마루에서 처음 쓴 수필이 “어느 날의 隨想”이었고 시는 “窓”이었다. 내가 아직도 갖고 있는 그 수필원본에는 “도입부 배경이 드러나야”한다는 교수님 지적을 빨간 글씨로 첨서하고 있다. 본문 중에 “단 한 줄 글귀를 써본 일없이 다만 써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이미 늙어버린 내 패러독스의 顯在를 진지한 글방분위기에서 싫도록 맛보아야만 했다”는 대목에서 교수님은 한문을 풀어서 쓸 것과 글을 보니 “글귀 한 줄 써본 일이 없는”그런 글은 아닌 것 같다고 하신 말씀이 아직 기억에 남아있다. 시 “窓”을 평하시고는 아름다운 시를 쓴다는 말씀도 주셨었다.
모두 10명 남짓 오붓하고 진지한 분위기가 참 좋았다. 교수님의 자상하고 부드러운 인상과 열정적이고 밀도 있는 아카데믹한 문학강의를 내몸이 다 귀가 되어 듣고 있노라면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맞는 듯 내 속에 잠자고 있던 문학성의 싹들이 장구한 세월에 다져진 단단한 지각을 아프게 뚫고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었다. 그때마다 이상하게 내가 나를 채근하고 있었다. 교수님 건재하시는 동안 부지런히 그분이 갖고 있는 모든 걸 남김없이 전수해야지 하는 다짐이 절로 나오고 있었다.
그건 아마 늦깎이가 갖는 불안심리가 요인인 듯 했다. 나 혼자만의 이런 조급한 생각으로 강의에 임해오던 세월이 한참 지난 어느 땐가 우연히 좌중에 이런 화두가 돌았을 때 기이하게도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걸 알고 놀랐다. 이심전심 늦깎이들이 갖는 공통분모이던 것 같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그해 초가을쯤엔가 내가 나간 때는 출석한 일이 별로 없었던 박복희 서생이 한국에 되돌아간다며 지금은 없어진 대형식당 “시연” 별실에서 교수님 모시고 조촐한 송별연을 가졌었다. 만찬을 들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는데 분위기가 무르 익어갈 무렵 여흥으로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는 아직 가라오케 같은 게 없던 시절이여서 육성에다 젓가락 장단을 쳐가며 흥을 돋구던 때였다. 내 차례가 되어 피할 수도 없어 딱하나 비장하고 있는 내 18번 흘러간 옛 노래 “목포의 눈물”을 이민 와 처음 사람 앞에 꺼내 선 뵐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를 보니 오갈 들 것까지는 없을 성싶어 그냥 내있는 그대로만 불렀었다. 마치고 나니 글보다 돌에 더 능한 돌 같은 사나이 석상길 서생이 느닷없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더니 왠 5불짜리 지폐 한 장을 내 이마에 딱 소리가 나게 손으로 부쳐주며 무어라 괴성 같은 걸 질러댔다. 이어 박만영 선생은 예의 그 한 옥타브쯤 높은 경상도 사투리로 “이난영 코맹맹이 소리보다 훨씬 잘 불러요” 등등 독특하고 기발한 갈채와 환호로 들썩이며 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때 찍은 사진이 지금도 헝클어져 있는 내 사진 뭉치 속 어딘가에 끼어 있을 것이다.
91년도에 글마루가 처음 문집을 냈다. 그간에도 가끔 문집에 대한 얘길 하곤 했지만 이루진 못했다. 이 문집은 글마루 창간호인데 그 편찬과정과 내용물이 그 후 연이어 나오는 세련된 문집보다 더 의미가 있고 추억이 담긴 문집이다. 교수님과 서생들 모두가 함께 편집에 참여한 순수하고 소박한 수작업으로 된 훈훈한 사람냄새가 나는 처녀기념호란 특징을 갖고 태어났다.
A4용지로 엮은 그 문집을 열어보면 참 재미있다. 컴퓨터로 찍어낸 글, 육필로 써낸 글, 다른 지상에 발표한 글을 카피해낸 글들이 공해 없는 이삭에 박힌 옥수수 알들처럼 결따라 제멋 따라 쪼로록 빼곡히 채워져 있는 게 아무런 치장 없이 싱그런 바다냄새만 풍기는 섬처녀 표정으로 엮어져 있어 가슴이 확 풀려오는 그리움의 한 페이지다. 게다가 문집 표지에는 교수님 친필로 “글마루 文集 91”이라 도톰한 사인펜으로 제자가 씌어있고 우측하단에는 그보다 가는 글씨로 “글마루 文藝學院”이라 씌어있기도 하다.
이 문집을 대할 때면 내가 지금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여고시절 교내 문예부 문집 “뿌리”와 견주게 된다. 그 문집은 지금 반세기가 훨씬 더 넘긴 명으로 누렇게 변색된 데다 산화된 종이 가장자리가 부슬부슬 떨어져나가고 있고 문집 표지와 뒷부분 몇몇 글들은 없어진 상태이다. 그 문집을 만들 때 우리들 문예부원은 선생님 지도에 따라 얇고 푸르스레한 투명해서 손에 닿으면 가슬가슬 소리가 나는 원지를 철판에 다 대고 글씨 솜씨 있는 친구가 철필로 사각사각 소리 내어 글씨를 새긴 후 누르스름한 모조지를 등사기에 쌓아 놓고 까만 잉크 먹인 롤러로 원지를 밀어내어 스테이플로 찍어 엮어낸 것이다. 그 안에는 반세가 넘은 그 시절 문학소녀들 그리고 우리를 지도하신 허빈 선생님의 체취와 갖가지 추억들이 고엽처럼 닿으면 부스러지려 하는 책갈피 속에서 아직도 생생히 너울대고 있어 나를 소녀가 되게 하고 있다. 특히 내 생애 최초로 쓴 처녀작 시 “고 장원석선생 영전에 바치는 노래”가 수록돼 있어 나는 더욱 이 마른 풀잎 같은 초라한 팜플렛을 소중히 감싸고 있는 듯 하다.
91글마루 文集으로 돌아가자. 그날 우리는 멜로스에 있는 나성한인감리교회 안 어느 작은방에서 들고 나온 원고를 각자 최종 점검을 해가며 편집을 하고 있었다. 교수님은 우리를 마주본 맨 앞자리에서 편집을 진두지휘하신다. 제출한 작품에 가나다순으로 차례를 매겨 목차를 만들고 계셨다. 임박해서야 가까스로 시 몇 편인가를 들고 헐레벌떡 들이닥쳐 이것저것 챙기느라 부산한 교수님 앞에 최종점검을 받을 양으로 내민 작품을 처음엔 대충 훑어보시다 ‘지금은 바빠 안 되겠다’시는 원고를 되돌려 받고 머쓱해 있다 체념한 듯이 자리에 주저앉고 마는 이숙표 서생. 교수님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작품에 미리 찍은 스테이플 바늘을 톡톡 따내는 게 깨방정 떨며 튀어 하필 교수님 작업 중인 하얀 종이 위에 신호탄을 보내듯 한낱 두낱 떨어트리게 하고 있지만 본인은 그 튀는 바늘의 향방을 전혀 감지 못하고 또 알 필요 같은 건 없다는 태평한 표정으로 계속 그 공해물질을 쏘아대고 있는 후에 “꽃가마 언덕길” 자전소설을 펴낸 김순애 서생. 영문도 모르고 이게 어디서 자꾸만 날아드냐시며 아담하고 하얀 손으로 그 탄피의 잔해를 못마땅한 얼굴빛으로 쓸어내며 억울하게 피폭 당하고 있는 교수님. 밖에서 누가 나를 찾는다기에 나갔더니 이용우 서생이 그 흘끔한 눈초리로 넌지시 작품을 내밀면서 바빠 편집에 임할 수가 없다며 도망치듯 내뺀 후 방에 돌아오니 박양권 선생이 “내 젖꼭지가 없어졌어요. 어디 있는지 좀 찾아줘요. 누가 밑에 깔렸는지 돌려줘요”하고 외치고 있었다.
마감이라는 긴박감이 죄어오는 현장이라 모두가 긴장하고 진지한 탓이었는지 좁은 방안은 팽팽하고 무거운 분위기였는데 난데없는 젖꼭지 실종 공고를 외치는 바람에 기다렸다는 듯 폭소의 파도가 일어 깔려 가라앉아 있던 것들을 한꺼번에 확 휩쓸어 가버렸다. 숨통이 트이자 모두 일손을 놓고 실종된 젖꼭지 수색을 하느라 술렁이며 북새통을 이루었는데 그 ‘젖꼭지’는 선생의 수필제목이었다.
교수님은 책표지를 만드는 중이었는데 무언가를 박양권 선생께 복사하라 이르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분은 무언가를 단단히 착각을 했었는지 거푸 세 번씩이나 되풀이 복사 해다 드렸으나 매번 맞추질 못했는지 얼굴빛이 벌겋게 달아올라 ‘어어 참, 어어 참’ 하시는 교수님 앞에 어찌할 바 몰라 뒤통수만 긁적이고 서 있는 선생 뒷모습이 꼭 야단맞고 있는 초등학생 모습이었다.
편집이 다 끝날 때까지도 작품이 오지 않아 목차에 이름만 실리고 작품명은 빠진 채 부군이 제본을 할 때야 맨 끝에 간신히 끼워 넣었는데 글 한쪽이 실종된 상태로 마지막 장을 장식한 박디니 서생 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그 장면이 생생히 다시 떠올라 혼자서 미친 듯 솟구치는 웃음을 몇 차례 배가 아프게 토해내다 내 변덕스런 머리통 비위를 거슬렀었는지 갑작스레 또 예의 두통이 시작돼 글쓰기를 중단해야만 했다. 이렇듯 모두가 처음 겪는 진통을 고비고비 넘기며 드디어 初産 “글마루 文集 91”이 탄생했다.
93년에 글마루 재학서생으론 처음으로 김순애 여사 자전적 수기 “꽃가마 언덕길”이 나왔다. 책제목은 교수님 사모님(고영아)께서 붙여주신 명작이다. 그분의 파란만장한 생애 일대기를 수록한 생생한 실기로 일제 강점기 시대와 해방되어 분단된 조국, 그 조국을 떠나서 미국의 전혀 다른 세 개의 시대를 살아온 세칭 개화된 현대여성이 겪은 시대적 수난 형극의 길을 세상에 드러내어 놓은 것이다. 김 여사는 나와는 동향인이었고 또 시대와 학교는 달랐어도 여고시절 교장 김영배 선생님을 같은 스승으로 모시기도 한 처지이다. 또 내 외숙모와 광주 수피아 동문이기도 했다. 글을 시작하면서 이것저것 많은걸 의논해 왔고 지난 예기들을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털어놓으며 울고 웃고 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특히 이 글을 쓰는데 대해 동부에 사는 쌍둥이 아들 중 하나가 비참했던 과거를 미국까지 와서 사람들 앞에 공개하는데 대해 극구 반대를 해온다며 고민하고 방황하기도 했으나 마침내는 아들 동의를 얻어내어 책을 내게 되었었다. 책이 나와 글마루 주최로 한국회관에서 화려한 출판기념회도 가졌었다.
내가 모아둔 글마루 기별 명단을 죽 훑어보니 인원이 제일 많은 때가 95년도 여름특강 때로 23명이었다. 그 이름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니 참 감회가 새로워온다. 그중 서너 명은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게 아마 잠시 머물다 간 이들인 것 같다. 그런데 그 23명 중 한 사람만 남성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여성들이다. 내가 처음 나왔을 때는 비슷한 비율이던 게 점차 여성들이 몰리기 시작하더니 남성들이 도태되고 있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교수님께서도 가끔 그 점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남성영입 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어떻든 그 청일점은 갈 데 없는 박양권 선생이다. 그 박 선생이 하루는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일찌감치 조퇴할 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교수님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 빠져나가려 하는 걸 내가 옆에서 “밤일하러 가십니까”하고 일찍 나가는 이유를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와’하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깜짝 놀랐다. 무슨 영문일 줄을 몰랐다. 사실은 얼마 전 그분이 밤일을 시작했단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였는데.
또 한번은 수업 중 박디니 서생이 무슨 얘기 끝엔 가에 개 얘기를 했는데 너무 장황하게 늘어놔 강의하시는 교수님 시간을 수월찮이 범하는 것 같아 “개소리 그만 합시다”했더니 또 한바탕 폭소사태가 일고 말았었다.
지난날들이 참 아름답고 그립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공부를 하다보니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십여 년을 소녀로 돌아가 못 이루었던 꿈을 가꾸고 키웠었다. 내 인생에 있어 없어서는 아니 될 곳 나를 챙기며 추스릴 수 있었던 인생도장이기도 했다. 아마 글마루를 거쳐 간 이들이 다 같이 갖는 공감대일 것이다.
그 많은 얘기들을 어떻게 한꺼번에 다 쓸 수 있겠는가. 다음에 또 기회를 갖기로 하고 아쉽지만 여기서 맺기로 한다.
■특집―글마루 20년을 돌아본다
그래도 쓰고 싶은 글
박양권
“이것도 글이라고”
내가 써 놓은 글을 읽어 내려가다 나오는 말이다. 확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 그러나 찢어버리지는 못하고 이리저리 뜯어 고치지만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글.
“배우고, 많이 쓰다보면 좋은 글을 쓰게 될 거”라고 지도 교수님은 말씀하신다. 교수님 말씀대로 배우고 쓰고, 또 쓰고 해도 그날이 그날이다. 글다운 글쓰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독자들이 내 글을 읽고 얼마나 웃을까? 작품 하나 내놓기가 겁이 난다.
“이렇게 쓰기 힘든 글을 왜 쓰노라 고생하나?” 붓을 던졌다가도 얼마 가지 않아서 또 글 쓰고 싶은 생각이 든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고 나서 몇 번 또 써본다. 역시 마음에 안 드는 글뿐이다. 하도 답답해서 지도교수님께 이런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면 글 쓰는 눈이 조금 뜨이는 징조’라고 하신다.
그 말씀에 용기를 얻어 다시 글을 써본다. 역시 마음에 안 드는 글뿐이다. 눈이 뜨이는 게 아니라 눈이 점점 내려 감겨지는 게 아닌가? 정말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도 교수님의 지도를 열심히 받는다.
교수님은 칠판에다 정삼각형을 그려놓고 각 변에다 소질, 체험, 수련을 적어 넣는다. 그리고는 아무리 소질이 있어도 수련과 체험이 없으면 좋은 글이 안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글을 쓰려면 체험, 수련, 소질 등 고루고루 갖추어야 된다고 하신다.
또 이런 예를 들어 말씀하셨다. 역시 칠판에다 정삼각형을 그려놓고 각 변에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 이라고 써넣으신다. 그리고는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을 해야 좋은 글이 나온다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교수님은 우리들에게 책을 많이 읽게 하고, 꼭 독후감을 쓰도록 하셨다. 그리고 작품을 많이 쓰게 했다. 쓴 작품은 꼭 토론을 갖게 했다. 그야말로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못하게 지도를 하셨다.
글 짓는 요령도 역시 그림을 그려놓고 지도해 주셨다. 칠판에다 균형이 잡힌 예쁜 화병을 그려 놓는다. 목, 몸통, 밑둥, 균형 잡힌 화분에 중심선을 내려 긋는다. 모든 글의 잘 되고 못됨은 중심이 있고 없는 데 있다고 하신다.
그리고 화병의 목 부분은 시작, 즉 도입 부분이요, 몸통은 전개 부분, 밑 부분은 끝맺음 즉 종결이라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목이 굵고 몸통이 가늘어도 안 되고, 밑이 굵고 몸통이 가늘어도 안 된다고 하셨다. 글을 어디까지나 균형이 잡힌 글이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교수님의 가르침대로도 안 된다. 도입이 잘 됐다 싶으면 전개가 엉망이고, 전개가 잘 됐다고 보면 종결이 엉망이다. 처음에 잘 나가던 글이 중간에 가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며 아무리 써 보아도 균형이 잡힌 예쁜 화병 같은 글이 안 된다.
나는 언제나 저 화병같이 균형이 잡힌 예쁜 글을 쓸까? 아마도 나는 소질, 체험, 수련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게 아닌가? 거기다 많이 읽지도 않고, 많이 쓰지도 않고, 생각도 게을리 한 내가 어떻게 좋은 글을 쓸 수가······.
쓰면 되겠지, 오랫동안 쓰다보면 나아지겠지 아무리 써 봐도 글다운 글이 안 나온다. 거기다 「글쓰기는 쉬워도, 잘된 글은 그리 흔하지 않다. 쓸모없는 글은 문자의 공해」라는 글과 말을 듣고 나서는 글쓰기가 더 겁이 난다.
아무리 써 봐도 마음에 안 드는 글, 거기다 겁까지 주는 글, 글쓰기가 이렇게 힘들 줄은 정말 몰랐다. 붓을 던져 본 적도 많았다. 그래도 쓰고 싶은 글 욕심에 또 붓을 들고······.
* 편집자 주 : 고 박양권 님의 유고들을 정리하다가 글마루의 풍경을 보여주는 글이 있어서 한 편을 옮겨 실었다.
■특집―글마루 20년을 돌아본다
글마루 20주년에
정해정
내가 글마루에 인연을 맺은 것은 1992년 봄 학기 부터이다.
88서울 올림픽이 다 끝나고 남은 것은 잔치 뒷 끝의 허탈과 많고 많은 쓰레기. 그 쓰레기 속의 종잇장처럼 을씨년스런 늦가을 바람에 날려 태평양을 건너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내가 종종 하는 말이지만 이민 초창기에 한국마켓에서 우연히 만난 고향친구가 등 떠미는 바람에 생활 수단으로 엘에이 다운타운 한쪽 귀퉁이에서 핸드백 노점상을 한일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통 큰 짓이 어디 있을까. 장사라고는 한번도 본적도, 경험도 없을 뿐 아니라 영어도, 스페니쉬도 한마디도 못했으니...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꼭 맞는 것 같다.
처음에 손님이 오면 몇 발 뒤로 물러서고, 까맣고 통통한 여자가 오면 좌판 밑으로 숨어버렸으니까...... 손님이 물건을 안사고 그냥 가면 휴-- 한숨을 쉬었으니까.
내 자신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뭔가 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써보자!!! 그런데 어떻게???
마침 새로 생긴 모 방송국에서 문예공모를 한다고 방송이 나왔다. 내가 글을 쓸 수 있는가 시험해보기 위한 좋은 기회였다.
“무화과 익어 가는 계절”이라는 수필 비슷한 작문을 발표 해봤다. 운이 좋았던지 아니면 동포사회에 글 쓰는 사람이 적었던지 최우수라는 상을 받고 마음이 급해졌다.
어느 날 ‘최경희’ 선생님이라는 분이 전화를 하셔 공부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그곳이 바로 <글마루>였다.
시인이시며 비교문학 박사이신 ‘고원’ 교수님의 문학교실이었다.
나는 열심히 열심히 공부했다. 한 문단에 몇 문장이 들어가야 하며 뱀 꼬리가 어디에 붙어야하며, 문장이 ‘롱’ 이면 ‘롱’이라는 것. 생각나는 대로, 붓가는 대로 쓰는 것이 글이 아니라는 것. 글이란 구성과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 은유법 등등등...
나에게는 참으로 신기하고 새로운 공부였다.
십 년을 결석도 지각도 안하고 꼬박꼬박 숙제를 해오니 교수님도 총애를 하셨고 시샘도 받았다.
시도, 소설도, 수필도, 발표를 해서 많은 상도 받았다.
이제는 장르를 하나 정하려고 동화를 접해보니 아아!! 바로 이곳이 고향이로구나.
아동문학이 해본 중에 가장 어려운 장르이지만 색다른 보람이 있고 재미가 있어 행복했다.
내가 동화를 선택한 이유는 어린이에게 어떤 교훈이나 꿈을 심어주자는 거창한 목적보다는 남은 생을 어린아이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살다가 가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에서이다.
‘글마루’와 ‘고원’ 교수님은 내 문학생애에 은인이며 갚아도 갚아도 부족한 빚쟁이이시다.
글마루 백주년을 기대해본다. 파이팅!!!
■특집―글마루 20년을 돌아본다
글마루로 가는 길
강경자
따뜻한 정월달 아침이었다. 서울에 사시는 언니가 전화하셨다. 외삼촌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이 비보를 듣고 몹시 슬펐다. ‘재작년 성탄절 카드를 보내주신 것이 마지막 카드였구나.’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6.25전쟁 때 아버지와 헤어져 이산가족이 된 나는, 외삼촌님이 서울에 살고 계셔서 마음 든든하게 살아 왔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내 꿈을 그 분이 살아계실 때 이루지 못한 것이 나를 몹시 괴롭혔다. 엘에이로 이주하기 전에 서울에서 외삼촌님을 만나면 가정을 가져도 공부는 계속하라고 말씀하시던 기억을 더듬었다.
나는 아득히 높은 겨울 하늘로 홀연히 떠나가신 외삼촌님을 위해 시를 지었다.
호박꽃이 피던
외갓집 돌담 위에
눈이 내리네
흰 눈이 내리네
이별의 슬픔이
흰 눈이 되어
내리는 눈 입에 받아
타는 목을 축이네
비단에 잠긴 외갓집
겨울마당 나뭇가지에
헤어진 서러움에
흰눈이 눈부시게
눈꽃을 피우네
―외갓집
내 꿈은 작가의 길로 가는 것이었다. 국문과에 다니면서 서대문에 있는 무용연구소에도 다녔다. 그러나 나는 글을 써야 되겠다고 판단하고 무용은 그만두었다.
가정을 꾸미고 살면서, 나는 먼 뒷날 무미한 삶을 살았다고 느낄 때에 오는 허무한 생각에 내 희망은 사라났다, 사라졌다, 긴긴 세월이 내 머리를 복잡하게 하였다. 외삼촌을 이제 만나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실현이 불가능한 꿈에서 깨어나서 여행하며 건강하게 살자. 나는 굳게굳게 결심했다.
바쁜 연말이 가까워 왔다. 나는 그 동안 써서 모아놓은 글을 정리하고, 작가의 꿈은 접고 가벼운 마음으로 연말을 지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날 밤 꿈에 고인이 되신 외삼촌이 나타나셨다. 그 분은 두꺼운 코트에 중절모를 멋있게 눌러 쓴 중년의 모습이었다. 엘에이 공항에서 환하게 웃으시며 “경자야! 나는 떠난다.” 라고 말씀하시며 안내원에게 여권과 비행기표를 보이고 멀어져갔다. 바로 그 모습이 오랫동안 뵙지 못했던 외삼촌님이 저에게 주신 영원한 시진이 되었다.
나의 외삼촌은 대학 교수로 재직하시며 문학에 뜻을 두고 살아오신 분이시다. 그 분의 시집, 수필집, 그리고 도서관에 관하여 출판하신 책들은 저에게 힘이 되고 공부가 되었다. 외숙모님이 보내주신 외삼촌님의 유고집 ‘낙우송’에 있는 좋은 구절을 나는 가끔 되새겨 본다. 작가가 되려던 희망을 포기했는데 꿈에 나타나신 외삼촌님 때문에, 나는 내 침대 옆에 앉아서, 집 가까이에 있는 공원에서, 나는 다시 글 쓰게 되었다. 어려서 뚝 꺾어 베어 물면 단물이 입안에 고이던 사탕수수와 호박꽃위에 비치던 달빛, 반딧불이 날던 외갓집의 여름밤을 그리며 일기를 쓰고 시도 지었다.
내 가슴속에서 오래된 마른풀이 다시 돋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 항상 자욱하던 짙은 안개가 없어졌다. 나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 다음해 (금년) 4월 초에 나는 글마루에 갔다.
오래전에 고원교수님이 시창작법을 지도하신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보았다. 나도 언젠가 공부할 수 있는 길이 트이겠지... 막연한 기대 속에 세월은 흘러갔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육십을 넘어서 글마루로 가는 길이 열렸다.
금년이 창립 10주년이 되어서 글마루 기념호에, 시 두 개를 실었다. 그리고 8월 1일 기념행사에 참가하는 큰 기쁨을 가졌다. ―1996년 가을
■특집―글마루 20년을 돌아본다
글마루와 내 친구
배희경
손잡이만 달린 스타이로폼 관이었다. 딸 하나 멀리 두고 세상에서 가장 외롭게 살다간 사람이다. 그래도 저런 관에나마 들어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최선을 다해 자기가 마련하고 간 관이다. 정부 보조금으로 상조회에 들었다. 그 돈을 딸에게 안기려고 먹지 않고 쓰지 않고 기를 쓰며 살았다. 그렇게 죽어간 불쌍한 친구가 들어있는 관, 초라해 보이면 안 되었다.
자꾸 눈물이 쏟아졌다. 가엾은 친구, 언제 가도 나를 반겨주던 다정했던 친구, 딸이 그리워 전화에서나마 딸이 웃으면 같이 웃고, 딸이 울면 같이 울고 하던 친구. 우는 일이 몇 갑절 더 많았던 외로웠던 친구는 가고 없다.
그녀와의 대화가 생각났다.
“글마룬가 굴레방아인가 나가더니 통 내겐 들리지도 않네. 나완 이젠 인연 끊을 작정이니?”
“죽기 전에 어찌 그럴 수 있겠니. 숙제 하다 보니 시간이 없어서 그래. 미안.”
“그 나이에 숙젠 무슨 숙제냐. 징그럽다. 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나 너무 좋아서 해야 되겠어. 많이 배우고 있어.”
“배워서 죽을 때 가져갈거니?”
“그럴지도 모르지.”
“아사라. 아사라.”
친구는 대단히 못 마땅한 표정이다.
얼마 후에 그녀는 전보다는 좀 누그러진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글을 쓴다니, 그럼 내 얘기 써서 책 좀 내 봐라. 괜찮을 거야.”
“난 소설 쓸 줄 몰라. 그리고 쓴다면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만 쓰고 싶어.”
“그럼 내 얘기는 아름답지 않단 말이지.”
“그럴 수 있지 뭐.”
“그만 둬라 그만 둬. 사람 사는데 어떻게 아름다운 일만 있니.”
“있든 없든 아무튼 나는 그래.”
그녀는 또 화가 나 버렸다.
또 그 후의 우리의 대화다.
“얘, 그것이 벌써 칠년 전 일이야.”
“뭣이?”
“너와 내가 녹음한 것 말이다. 앞뒤 열두 테입이니까 꽤 많지. 그 때만 해도 옛날이야. 요새 같이 뗑해서야 어림도 없지.”
그녀는 어딘가 지쳐보였고 눈은 아래에 깔려있었다.
“네가 하도 소원했으니까 됐지.”
“고맙다. 넌 오기만 하면 열심히 녹음 해 줬어. 너 같은 친구 어디 또 있겠니. 꼬치꼬치 질문해 줘서 할 말 다 했더라.”
“그래도 나는 네 일은 쓰고 싶지 않아.”
“되게 도도하시네. 그래 그럼 굴레방아에서 굴레굴레 굴레같이 돌며 이쁜 글만 써라.”
“그러려고 해.”
그녀는 글마루를 ‘글의 정상’이라는 뜻 인줄도 모르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며 나를 놀렸다.
이렇게 우리의 대화는 빈정대기의 줄다리기였다. 그러나 허물없이 하고 싶은 말 다 하며 지낼 친구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었을까. 뒤를 돌아본다. 우리가 밟고 온 들이 그렇게 푸른 줄은 그녀가 가고 나서야 알았다. 이제 많이 허전해서 힘들어질 것 같은 느낌이 밀물같이 밀어왔다.
*
글마루에 어설프게 들여 놓은 지도 벌써 십년이 되었다. 백촉짜리 전구 밑에서 무릎에 공책을 놓고 쓸 것을 구상하고 있었던 시간들이 얼마나 흐뭇했던지. 교실에 나가 앉으면 가마솥의 밥 냄새를 함께 맡고 있는 행복함과 따스함이 있어 나는 글마루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각기 껍질 안에서 생각하고 쓰고 하지만 분모가 같은 식구라는 것도 알았다.
이 글마루 식구들을 나는 교향악 단원이라 부르고 싶었다. 그 지휘자에 그 단원이라고 생각했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 음을 맞추고, 즉 교수님의 지도로 그날에 써 온 원고를 수정 받고, 그런 작업들이 다 끝나면 지휘봉이 공기를 갈라 내려온다. 멋진 교향악이 되어있다. 한 사람의 음도 빗나감이 없었다. 명지휘자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연주로써 아름다운 교향곡은 문집으로 엮어 마무리 되었다.
친구에게 안길 수 없는 이번 글마루 문집. 그렇지만 땅속에서 굴레굴레하며 나를 놀리는 소리는 들릴 것 같다. 아니 참 땅속이 아니라 재를 바다에 뿌렸다지. 가루가 된 그녀를 날려 바다 위에 뿌렸다지. 그렇다면 고기들이 그녀가 흘리는 말을 먹고 굴레굴레 태평양을 굴러다닐지 모르겠다. 모두 글마루 학생이 되어 굴레굴레 굴러다닐지 모르겠다. 턱없는 생각으로 친구를 그리니 가슴이 컥컥 메인다.
■특집―글마루 20년을 돌아본다
밭을 갈며
송덕희
글마루에서 수련하시고 등단까지 하신 선배님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본다. 언제나 섬세하시고 조용한 품위와 인격을 골고루 겸비하신 분이다. 그 분의 안내로 글마루에 등록하였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글마루에 들어갔다. 말도 되지 않는 왕초보인 나, 그 때가 2004년 2월 봄 학기였다. 횡설수설 하던 나는 내 실력으로는 창피해서 이번 학기만 하고 그만 두려고 마음먹었다. 선배님께 내 뜻을 말했더니 “아니,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최소한 삼년은 해야 알게 아니야? 무슨 일을 시작했으면 노력 해 봐야지.” 라며 야단을 치신다. 찔끔한 나는 그래! 해보자는 생각으로 마음을 달랬다. 남편도 당신 잘 쓰는데 걱정 하지 말고 다녀 보란다.
고원 교수님께서 나의 한심한 글을 한 뜸 한 뜸 바느질하시듯이 지적하시고 격려 삼아 칭찬을 해주신다. 칭찬 받은 날은 내 머리 속에 그 글이 둥둥 떠다닌다. 일주일 내내 세상을 다 얻은 느낌이다. 남편과 함께 밥을 먹어도 내 생각은 그 떠다니는 글 생각으로 내 눈 길은 허공을 헤매인다. 산책길에도 내 마음은 하늘을 걷다온다.
그때 그 글을 지금 읽어 보면 내가 봐도 빈 들판에 세워놓은 허술한 허수아비다. 고매하신 교수님께서 은유법을 써라, 비유법을 써라 하셔도 아직도 난 얼떨떨한 눈망울로 교수님을 바라본다. 이제 조금씩 재미가 있다. 내가 글마루에서 좋으신 선배님들과 동료들을 만났다.
존경하고 싶은 두 분 선배님이 있다. 한 선배님은 나보다 연배가 조금 높으시고, 한 선배님은 나보다 연배가 한참 낮으신 선배님이시다. 내가 그분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본받기를 원하는 것은, 겸손하게 변함없이 교수님을 보필 하시는 그 분들의 삶의 모습이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에 의해서 심기운 것이 없으니, 지금부터 열심을 다해 쟁기를 붙잡고 밭을 갈고 또 갈련다. 십년 후엔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가의 조약돌같이 내 삶이 잔잔한 감사로 가득할 것이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특집―글마루 20년을 돌아본다
숨이 막혔던 그 순간
정정숙
하얀 종이 위에 까만 글자를 새기는 모습을 상상했다. 봄볕을 받고 발 돋음 하는 새싹이 파랗다. 연약한 새싹이 망가질까봐 물줄기를 가냘프게 줄여 요리조리 돌린다. 마음의 글을 가까이 하고 싶은 봄이 글마루의 문을 어렵게 열게 되었다. 글마루 수강생이 된 지 벌써 삼년 째다.
몇 년 전부터 글공부를 하고 싶어 글마루를 찾았다.
첫 시간은 어리둥절했다. 생소한 나머지 고개도 못 들고 입은 벙어리, 귀도 별로 들리지 않는 귀머거리가 되어 바늘방석에 앉았다.
작심삼일이 겨우 지나 작심 석 달이 될 것 같다. 내가 쓴 시(?) 두 편이 교수님 책상 위에 간신히 놓여진다. 교수님 말씀 따라 논평을 받고 싶으면 이름이 표시 되지 않는다. 글쓴이가 누군지 모르니 혹평을 마음 편히 해달라는 뜻이다.
두 번째 강의 시간이다. “너무 관념적이고 지루한 시다.” 어수룩하게 써낸 내 시에 대한 교수님 평이 날카롭게 들려왔다. 똑 같은 형태는 반복 되는데 몇 번 읽어도 문제가 일어난 만큼 독자에게 전달이 오지 않는다. 평을 받는 순간 난 부끄럽고 창피했다. 무안한 사과 빛 얼굴이 글 위에서 실력 없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탄로가 났다. “뼈를 깎을 수 있는 아픔으로 대담하게 형식을 파괴하여 형태성의 변화가 필요하다. 글로써 볼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교수님의 냉정한 비판, 하지만 사실이다. 고개가 기억자로 꺾였다.
난 그 혹평을 들을 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분명 내 호흡은 이 시의 장본인임이 밝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없어졌다. 글 쓰는 취미를 살리려고 했지만 무효가 되며 온몸에 힘이 빠졌다. “또 딴 의견 없습니까?” 모두가 의견이 교수님과 일치 하단다. 부끄러운 나머지 눈을 내리깔고 계속 아무하고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애매한 공책만 구멍이 뚫린다.
숨도 죽이고 혹평을 받고 보니 글 쓰는 자격도 없는 주제에 사치스런 생각을 하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옆에 분의 작은 메모, “내가 처음 시를 냈을 때 교수님의 혹평으로 내 시가 완전히 작살났었어요.”가 조금 위로가 되었다. 적어도 내 글은 작살이 안 났다는 뜻이다. 처음 작품은 그런 것인가? 고개가 들려지고 주위가 조금 눈에 들어왔다. 내게 밟힌 잔디도 이런 기분일까?
간신히 강의실을 빠져나와 바깥공기를 마셨다. 멎었던 호흡이 밤과 적응되어 적막한 내 마음과 일치되니 부끄러운 감정이 조금 사라졌다. 집에 돌아와 뚫어진 노트를 꿰매가며 점검했다. 내 실력 향상을 위해 옳은 조언을 해주셨구나. 고된 훈련에 감사했다. 강의시간이 반복되어 새싹이 이발할 때가 되었다.
여름에 싱그러운 바다냄새가 마음을 누구보다 시원케 한다.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글이 모여지면 글 냄새가 나를 시원케 한다. 열심히 노력하여 다듬어지니 혹평이 논평으로 변해갔다. 교수님의 “3다”를 명심했다. 많이 읽는다. 많이 생각한다. 많이 글을 쓴다.
가을하늘이 높이 띄워준 내 글 솜씨가 어느새 겨울을 맞이했다. 손가락도 꼭꼭 숨을 자리가 없는 겨울인 내 안에 글 마디마디가 줄지어 나올 때 곱게 단장시키고 싶었다. 아주 따뜻하게. “정선생, 이번에 한번 그 수필 내어봐.” 교수님의 말씀이다. 분명히 들었다. 기뻤다. 서당 개 삼년 만에 풍월을 읊게 된 것이다. 글마루의 모범생으로 뽑힌 기분이었다.
신인상을 받게 되었다. 제목은 ‘둥근해 와 햇감’이다. 둥근해가 나를 신인상으로 탄생시켰다. 글마루 수강생을 위해 열심히 교습시키는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특집―글마루 20년을 돌아본다
정말 그랬었는데
최향미
오늘 기온도 구십 팔도가 넘었다고 한다. 이 정도 더위는 아직 아무 것도 아니라며 이곳사람들은 은근히 겁을 준다. 하늘이 노래져야, 그때가 되어야 아기가 나오는 거라며 출산의 고통을 준비하는 산모의 두려운 다짐처럼 나도 이곳의 더위를 견뎌낼 각오를 하고 있다.
이민가는 심정으로, 그래도 우리 아버지 때보다는 영어를 조금 더 잘 하니까, 훨씬 쉬울 거라는 위로를 하며 이곳으로 이사 온지 벌써 여덟 달이 지나간다. 킹스캐년, 요세미티 등 멋진 산들 그리고 지천에 널려 있는 포도밭과 여러 농장들을 매일 볼 수 있어 정말 근사한 곳, 바로 ‘프레즈노’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다. 남가주 토박이가 중가주 주민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여름이면 모처럼 휴가 내서 구경 오던 곳에 이렇게 이사 와서 살게 되니 조금의 두려움 빼고는 그저 멋진 자연의 경치에 흠뻑 빠져 있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이곳의 기후와 그 외의 생소한 주변 환경에 익숙하지 않아 조금씩 불평도 생기고 다시 살던 오렌지카운티로 돌아갈 구실만 찾고 있는 요즘이다. 눈에 씌었던 콩 깎지가 슬그머니 벗겨지고 있는 중인가보다. 가장 두려운 것은 기후가 백 십도는 보통이라는 여름의 살인적인 더위이다. 하지만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죽기야 하겠어?’ 하는 마음으로 더위와 잘 사귀어볼 준비를 하고 있다.
오랫동안 살던 곳을 떠나 이사를 한다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나보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시때때로 밀려오는 그리움은 나를 힘들게 하는 큰 복병이었다. 그 그리움이란 것이 뭐냐고 한다면, 이십칠 년이 넘도록 나와 관계했던 그 모든 것들이다. 친정 식구들, 친구들, 늘 가던 식당의 음식 맛, 다니던 교회의 모든 것, 동네 마켓의 이웃들, 그들과 주고받던 대화까지 그 수많은 것이 나를 눈물나게 만드는 그리움의 대상들이다. 한번은 친구와 만날 약속을 하고 다섯 시간을 운전하고 내려와서 늦깎이 학생인 친구를 기다리느라 주차장에서 기다린 적이 있었다.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 학생들, 그리고 그들을 마중 나온 사람들의 모습이 왜 그토록 정겨운 건지, 그들 속에 더 가까이 묻어지고 싶어 차 창문을 내렸다. 순간 훅 하고 밀려오는 이곳의 공기가 결국 코끝을 찡하게 하더니 눈물을 흘리게 한다. 버리고 떠난 애인한테 다시 돌아왔는데 살갑게 맞아주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복잡하게 어우러진 그런 느낌이다. ‘물 설고 낯 설은 타향살이’ 란 말이 그냥 쓰는 말이 아니었던가 보다.
맨 처음 이민 와서 한국 책을 한국에서 보다 더 열심히 읽은 적이 있다. 한글을 읽을 때면 내가 한국에 있다는 착각에 빠져 들 수 있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그렇게 나마 달랜 것 같다. 요즘 한국어 신문을 열심히 읽는다. 일주일이 지나기도 하고 날짜가 뒤죽박죽 바뀌어 배달되는 신문이지만, 신문을 펼치면 내가 살던 그곳에 있는 느낌이다. 마켓 광고를 보면 그곳에서 장을 본 것 같고 아는 분이 쓴 글을 읽으면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눈 것 같다. 신문이외에도 반가운 것이 또 있다. 미주 문인들의 글을 모아 만든 책자들이 간간이 배달되어 온다. 친구가 찾아 온 듯이 정말 반갑다.
요즘 글을 읽으며 생긴 버릇이 하나 있다. ‘어? 이 부분은 조금 어색한데... 아이구 이렇게 쓰면 분명히 선생님이 지적하실 텐데...’ 하면서 생선 가시 발려 내듯 글을 읽다가 딴지를 거는 것이다. 내 상태가 조금 더 심각해지면 옆에 있던 남편까지 끼워 넣는다. “자기 이것 좀 봐. 이렇게 쓰면 안 되는데 독자가 혼동이 되잖아. 그리고 여기는 ‘아’ 가 아니라 ‘어’ 라고 해야 표현이 더 부드러운데... 쯧쯧쯧... 소리 내서 몇 번 읽어 봤으면 분명히 알아냈을 텐데... 교정이 잘 안됐나?” 이렇게 글을 읽으며 시비도 붙이고 칭찬도 하고 혼자서 북 치고 장구를 친다. 그때마다 남편은 그저 내 말을 들어주는 척만 하면 된다.
내가 남의 글을 요리조리 발려내고 나서 하는 마지막 순서를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왜 그러는지도 알고 있는 것 같다. “시간만 되면 글마루에 한번 나가야 되는데, 글마루에 못 나가니까 글을 정말 안 쓰게 되네....선생님한테 글공부 더해야 되는데, 난 정말 멀었는데, 아! 보고 싶다. “ 이렇게 내 넋두리로 마무리가 된다.
남편의 권유로 ‘글마루’에 처음 나갔을 때의 감동은 ’환희‘ 그 자체였다. 좋아하지만 제대로 문학공부를 해 본적이 없던 내가 고원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는 사실만으로도 벅찬데,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미 등단해서 소설가로, 수필가로 또는 시인으로 활동하는 분들이 많이 있었다. 그렇게 ’글마루‘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벌써, 내가 동경하는 분들의 정신세계에 같이 서 있는 것처럼 황홀했다.
처음 발표한글이 ‘참깨’라는 짧은 수필이었는데 익명으로 내 놓은 글에 여러분들이 칭찬을 해주셨다. ‘누구 글이야?’ 하면서 해주는 칭찬에 난 벌써 글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숨겨진 보석이었던 양 우쭐해져 버렸다. 이런 보석을 알아본 남편도 너무 고마웠다. 나의 천재성을 확실히 알리기 위해 또 글을 써서 발표를 했다.
‘할’자만 생각해도 (지금도 눈물이 벌써 고여 버린)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나의 ‘무조건 왕 팬’이신 내 할머니에 대한 글이었다. 할머니께 글로나마 효도하고 싶어 밤새 눈물 콧물 흘리며 쓴 긴 글이었다. 그 글이 어느 분의 입을 통해 읽혀질 때 내 글임을 숨기려고 목구멍이 터지도록 눈물을 참느라 애를 썼다. 그런데...‘자 글을 읽고 느낌이 어떤지 한번 얘기들 해보세요’라는 교수님의 말씀에 긴 침묵이 흘렀다. 내가 내심 기대했던 순간은 이게 아니었는데... 긴장이 되어 목이 어깨에 붙어 버린 것 같이 뻐근해지고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나자 시인이신 이 선생님이 ‘정말 이런 느낌일까? 할머니에 대한 이 부분은 너무 과장된 감정 표현 같은데.. 공감이 약한데.’ 라는 평을 하신다. 나는 야속했다. 속으로는 ‘정말인데. 정말 그랬는데. 정말로 그랬었는데...’라며 내 맘을 몰라주는 그분이 야속하고 할머니에 대한 내 마음이 깎여버린 것 같아 억울했다.
내 글이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에 실패했다는 것보다 할머니를 향한 내 감정을 폄하 당한 듯한 억울함이 더 속이 상했다. 천국을 다녀온 듯한 첫 번째 글 발표와 지옥에 빠져 버린 것 같은 두 번째 글 발표 후에 한동안 글쓰기가 무서웠다. 글을 잘 쓰고 못쓴다는 것이, 내 원래 감정과는 상관없이 이리 저리로 변질되어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 같아 두려웠다. 정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르다가 혼이 빠지게 혼난 꼴이었다.
교수님께 은근한 꾸중을 자주 들을 정도로 글쓰기에 게으르고 그래서 좋은 글을 잘 쓰지는 못하지만 남이 쓴 글을 지적하는 데는 아마도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글마루에 새로 들어오신 분들의 글을 읽다 보면 문득 내가 느꼈던 오래전의 억울했던 기억이 떠올라 웃음이 나곤 한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고 생각을 정리할 방법과 순서가 매끄럽지 않아서, 글은 길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실타래처럼 엉킨 글을 대하면 ‘얼마나 답답할까 ’하는 안쓰러움이 든다. 나 역시 이런 것들이 내가 글을 아직까지 잘 쓰지 못하고 있는 큰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우리말이 기억난다. 부드럽게 지적해주고 예를 들어 설명해주고 지나간 얘기들을 재미나게 들려주시는 고원 교수님의 가르침이 어느새 내 문학 세계에 깊이 배어 버린 것 같다. 남의 글을 읽으며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 번 더 감탄하며 부러워하고 또는 내 생각으로 조금씩 수정해 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교수님의 제자로 나지막이 서있는 모습에 조금은 대견한 생각이 든다. 교수님의 문학세계의 한끝부분을 간신히 나마 이렇게 붙잡을 수 있었음을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원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글마루 출신임을 자랑하고 싶은데 너무 보여줄 게 없어 부끄러운 막둥이다.
이제부터 배우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부터가 정말 시작인데...하며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글마루를 그리워하는 나에게, 이모처럼 나를 예뻐해 주시는 송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최 선생, 꼭 이곳으로 다시 오라고 기도해 줄께. 우리같이 공부할 수 있게 말이야.”, 안부전화 주시다가 간간이 들려주시는 글을 들으면 질투가 날 정도로 송 선생님의 글이 그 동안 한층 발전했음을 느낀다. 그럴 때마다 나의 게으름 탓보다는 꼬드겨서 먼 곳으로 이사시킨 남편에게 눈 한번 흘기고, 어떻게 해서든 글마루에 나가 더 배워야 하는데 하는 안타까움만 커진다.
‘글마루’가 스무 살 생일을 맞는다는데 나는 얼마나 자랐나 되돌아본다. 처음으로 내 글을 지적해 주신 이선생님의 잊을 수 없는 회초리 때문에 절대로 교만 할 수 없고, 성실한 배움의 자세를 놓치지 않으신 배 선생님의 주옥같은 글들을 문예지에서 접할 때마다 나도 열심히 해보자는 도전 때문에 글쓰기를 포기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세월의 공간을 떠나서 내가 감히 접할 수 없는 많은 옛 문인들을 소개해 주시고, 맛 볼 줄만 알았지 아무것도 정리 할 줄 모르던 무지랭이에게, 숟가락 젓가락 놓고 밥 지어서 국 담고 밥상 차리는 순서를 알게 해주신 교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제는 참기름과 깨소금으로 간하고 마늘과 식초로 입맛을 돋우고 된장과 국간장으로 감칠맛 나는 깊은 여운을 남기는 그런 글상을 차려야 되는데...
내일은 또 얼마나 더울까 걱정을 한다. 뒤뜰로 나가본다. 더위가 조금은 수그러진 듯 밤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유난히 까만 밤하늘에는 달도 보이지 않는데 별이 흐드러졌다. 높이 솟은 나무에 무성한 나뭇잎들이 바람에 강물소리를 낸다. 처음 이곳에 와서 보았던 키 높은 나무들과, 킹스캐년 높은 산 속에서 놀다 잠시 내려온 듯한 파란 산새들 그리고 담을 타고 건너와 뒷뜰 나무를 바쁘게 오르락내리락 하던 다람쥐들의 등장에 얼마나 흥분했던가. 아름다운 경치에 ‘하나님이 글 많이 쓰라고 이런 곳에 보내 주셨나봐’ 하며 호들갑 떨던 지난해 가을이었는데, 어느새 두 계절이 바뀌어갔다. 아무것도 해놓은 것 없이 말이다.
생일잔치가 지나면 더위도 조금 지나갈 테고 이제 이곳 온 지 일년이 가까이 되면 글마루 시간 맞춰서 생활표도 짤 수 있겠지? 그때는 그 동안 눈물 뿌리며 준비해놓은 온갖 산나물이랑 양념이랑 싸들고 글마루에 나가 펼쳐 놔야지. 그러면 선배님들이랑 오물딱조물딱 손맛으로 맛있게 무쳐 놓으면 교수님이 예쁜 그릇에 ‘여기에 놔야지, 저기에 담아보렴’ 그러시면 정말 맛난 글밥상을 차릴 수 있겠지. 그때는 ‘정말 그랬어요, 정말이라니까요’라며 설명하지 않아도 신선한 재료 맛을 제대로 전할 수는 있을까. 회원들이랑 글잔치를 그렇게 벌이다보면 글마루에 솔솔 가을바람이 올라앉을 것 같다. 갑자기 푸드득 새가 날아간다. 깊은 밤인데 저 새는 어디로 가는 걸까.
■특집―글마루 20년을 돌아본다
그리운 질투
이용우 (소설가)
1990년 겨울이었다. 자전적 소설 ‘꽃가마 언덕길’을 쓰신 김순애 권사님(고인)의 아파트에서 조촐한 연말 파티가 열렸다. 글마루에 나오시며 한참 문학에 재미를 느끼시던 김순애 권사님이 몇 차례나 우리 집에서 한 번 모이자 모이자, 노래를 부르던 끝에 어렵사리 성사된 자리였다. 참석자는 고원 선생님, 이숙표 수필가와 동생 이인표 씨, 그날 모임에 앞장 선 시조 시인 최경희 여사, 최여사의 성인영어학교 동료라는 일본인 노처녀 사찌꼬, 그리고 김순애 권사님과 나, 이렇게 일곱 사람이었다. 크지 않은 노인 아파트 거실에 교자상을 펴놓고 둘러앉기에는 마침맞은 인원이었다.
올리브 스트릿의 노인아파트 11층에 위치한 김순애 권사님의 리빙룸에서는 다운타운의 아름다운 야경이 시원하게 내다보였다. 때는 마침 크리스마스 부근이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꿈도 꿀 수 없는 도시이지만 세모에 들뜬 문청들의 가슴에 모닥불을 지피기에는 더없이 좋은 밤이었다. 김순애 권사님이 이웃 친구들과 함께 하루 종일 만드셨다는 음식도 맛갈스러웠지만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했다는 석류주와 딸기주는 정말 입에 짝짝 붙도록 달았다. 그래서 그랬던가. 어느만큼 술잔이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으레 그렇듯이 노래판이 시작되었다.
두마안 가앙 푸른 무래…… 분명히 처음엔 그렇게 건전한 국민가요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때쯤부터였는지 일본 노래도 나오고 팝송도 부르더니 까불까불 동요까지 뛰어다녔다. 지금 그때 부른 노래를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충 머리를 쥐어짜 보면, “~안따 고노요메 나니시니 기따노” 어쩌구 하는 일본 가요에 ‘예스터데이’ ‘러브미텐더’ 따위 팝송, 그리고 동요와 대중가요를 마구잡이로 섞어 불렀다. 일본 노래는 아마도 최경희 여사와 성인영어학교 동료인 사찌꼬라는 여인으로 인해서 부르게 되었지 않나 생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처음에는 예의 있게 돌아가며 부르던 노래를 언제부터였는지 나와 인표 누나(나는 이인표 씨를 이렇게 부른다) 둘이서만 무슨 경쟁이나 하듯 번갈아가며 불러재낀 데에 있었다. 인표 누나로 말하면 미모는 그저 그렇지만 끼 하나는 철철 넘쳐 흐르는 여성이다. 자기 학교는 물론 남의 학교 동창회에도 불려 다닐 만큼 명사회자로 이름 난 사람이다. 지금껏 ‘국민교육헌장’을 한달음에 주르륵 꿰고, 언제라도 노래 열두 곡쯤은 연속으로 불러재낄 수 있는 만능 엔터테이먼트 이다. 이런 재사가 팔 걷어붙이고 꿍짝을 맞추니, 한다 하는 나로서도 맛이 살짝 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나는 기뻐요, 나는 기뻐요, 나는 기뻐요 정말 기뻐요.”
“와이짱 깔라, 와이짱 깔라, 와이짱 깔라 짱짱 깔라.”
“와다시와 우레시, 와다시와 우레시, 아이앰 해피, 아이앰 해피”
TV 속의 뽀뽀뽀 한 장면처럼 서로 마주보며 까불까불 고개짓도 하고 손춤도 살레살레 추어가며 인표 누나와 나는 노래를 주고 받았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어 가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어 있고, 아~아~ 대한민국”
“꽃 피이히는 동백 서엄에, 봄은 왔꺼헌만, 형제 떠허난 부산 하앙에”
“yesterday, all my troubles seemed so far a way”
“love me tender, love me sweet, never let me go”
평소 자리를 봐가며 적당히 어울리고 밉상스럽잖게 처신을 한다고 자부하는 나였는데 그 날은 제동장치 없는 경운기가 비탈길을 내달리듯 부르고, 마시고, 낄낄거렸다. 김순애 권사님이 손수 담궜다는 석류주에 취했는지, 연말 분위기에 젖어서였는지 풀어진 기분이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지만 나는 그쯤에서 ‘제비’를 원어로 부르려고 막 폼을 잡던 중이었다. 그 노래는 놀자판의 분위기와 그날의 컨디션이 잘 맞아 떨어지면 부르는 내 비장의 십팔번이다. 선생님의 냉랭한 음성이 떨어진 것은 그런 어간에서였다.
[이용우!]
세상 모르고 희희낙락 하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른 고개를 돌려보니 선생님께서 노한 얼굴로 나를 보고 계셨다. 언제나 이 선생, 하고 부르시며 무엇을 시킬 일이 있으시면 이것 좀 해주실 수 있으신가, 또는 그렇게 하세요, 같은 하오체로 말씀하시는 선생님이시다. 그런데 딱 잘라 이용우! 하고 부르셨다. 얼씬 뵈오니 선생님께서도 취기가 완연하셨다. 얼굴이 붉으래 상기되셨고 가끔 술이 취하시면 나타나는 선생님 특유의 야성(?)이 노한 눈빛 속에 형형히 떠올라 있었다. 아차 싶었다. 김순애 권사님이 애써 자리를 마련한 이유도 존경하는 선생님을 모셔서 대접하려는 뜻에서였지 우리 노는 꼴 보려고 한 일은 아닐 것이었다. 노래를 부르던 대화를 하던, 선생님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깜빡 잊고 방자하게 굴었다는 생각이 그제사 떠오른 것이다. 더구나 그 자리의 여인들 중 가장 젊고 괜찮은(?) 여성을 내가 독차지하고 있지 않았던가. 큰일이었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나는 짐짓 영문을 모르는 체 하며, 네! 하고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처분대로 하십시오, 그런 뜻이었다.
[자, 이 선생, 내 술 한 잔 받아요.]
뜻밖에도 선생님은 좀 전의 노기를 싹 지우신 음성으로 평소처럼 내 술 한잔 받아요, 하시며 석류주병을 들어 올리셨다. 나는 감지덕지 “네, 감사합니다.” 하며 두 손으로 받아 마셨다. 나 또한 얼른 선생님의 잔에 석류주를 가득 따라 올렸다. 위기는 그렇게 무마되었다. 동석했던 사람들도 기억 못할 정도로 선생님의 노기는 한 순간의 바람으로 지나갔다. 허지만 나는 그날의 바람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 선생님의 안광에 서렸던 그 질투(이 낱말을 죄송한 마음으로 사용한다)의 눈빛을 선명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남자끼리만 알아채는 느낌이 있다. 아무리 밑바닥에 꼭꼭 숨겨진 마음도 무심을 가장한 헛기침이나 슬쩍 치뜨는 눈빛에서 꼬투리를 잡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자리건 그곳에 여자들이 있기만 하면 남자들은 약속하지 않고도 당장 경쟁관계에 돌입한다. 경쟁의 농도가 진하냐 엷으냐 하는 그 차이가 있을 뿐, 판세를 읽느라 머리 속이 분주하기는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 탁자 아래에서 손을 부비던가 구두코를 탈탈 털며 보이지 않게 견재하고 은근히 공격한다. 속은 꼬이면서도 너그러운 체 허허 웃고, 오줌누러 갈 때도 거룩한 표정으로 자리를 뜬다.
누구든 자, 이제부터 질투를 시작하겠다, 그렇게 마음 먹고 질투를 시작하지 않는다. 질투는 무의식 상태에서 생성된다. 생각이 질투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질투가 생성된 한참 후에 생각이 따라오는 거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질투는 시작되어 있는 셈이다. 질투는 무의식에서 자란다. 무의식은 마음과 정신의 저변이다. 그러니까 질투는 인간 생명의 원천인 것이다.
이 세상에 여자가 없었다면 모든 남자들은 철학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고맙게도 우리 문학동네에 여류들이 많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른다. 만약 문학판에 남자들만 득실거린다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아마도 나는 진즉에 노트북을 팽개치고 문학판을 떠났을 것이다.
고금의 무수한 명문 명작들이 사랑과 질투의 산물이다. 평생 문학 외길을 걸어오신 선생님의 빛나는 치적도 이 사랑과 질투의 남성성이 빚어 낸 산물에 다름 아니다. 3시간의 글마루 강의 시간을 항상 넘기시는 열정 역시 그곳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곳은 무의식이 지배하는 곳이다. 무의식은 질투가 생성되는 곳이다. 사랑의 모태다. 기회가 닥치면 즉시 발화하는 휴화산이다.
선생님의 휴화산은 안녕하신가. 그리운 질투는 평안하신가. 선생님의 휴화산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씨가 웅크려 있기를 기원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