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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수시 해설
드라이플라워 혹은 기억 꿈꾸기
변학수(경북대 교수)
우리가 꽃을 꿰뚫듯이 응시한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시드는 것이 아니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0. 시작하며
<시는 시인보다 더 많이 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나는 시를 읽을 때마다 체득한다. 사사로운 개인사적 경험에 바탕한 연상이나 기억에 의지하여 시의 매력을 느낄 경우, 시읽기가 시인의 개인사적 맥락을 추이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시에 짜인 스펙트럼을 읽어내기보다는 시인의 뒷조사에 매달리는 경우가 흔하다. 시도 어느 정도 사회사적 맥락에 의해 조건지어진 존재이므로 어떨 경우에는 시인의 경험공간을 궁구하는 것이 필수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많이 안다>는 표현에 나타나듯, 시는 언어로 매개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전달하고자 하는 만큼, 시인의 경험 하나만을 겨냥할 수 없다. 시는 침묵하는 부분이 더 많다.
우선 시는 우리(독자)가 시인의 경험과 만나는 것을 도와준다. 시는 의식처럼 불분명한 것, 그리고 갑자기 의식에 떠오른 것에 이름을 지어준다. 또 그 이름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 이름이 붙여진 경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객관적인 것으로 대두되어, 새로운 방식으로 완성되어 간다. 시인과 나, 이렇게 남남으로 있던 세계는 서로 관련을 맺게되고 공동의 관심사가 된다. 가상적으로 설정한 시인의 경험과 나의 경험이 만나면서 시는 의미지평을 확대한다. 이제 나는 시를 통해 '나'를 말할 수 있다. 시는 성경과 같은 모범답안이 아니라, 그 우연적 상황 때문에 시인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 어떤 결정체다. 그 자유로워진 결정체라는 이유 때문에 나는 윤희수의 시를 말할 수 있고 또 이 시집을 뒤에서부터 읽을 권리가 있다.
I. 기억
윤희수의 시를 읽으면 잔잔한 감동이 가슴저며 온다. 그가 그려내는 <쥐소리>는 어깨를 시리게 하고, 그가 펼쳐보이는 <개짖는 소리>는 기억을 새삼스럽게 한다. 또한 그의 삶의 질곡(桎梏)은 후패(朽敗)한 우리 삶의 콧잔등을 시큰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의 시는 눈이나 머리로 읽을 수 없다. 때로 그의 시는 어깨로 읽어야 할 때도 있고, 콧잔등으로, 또는 눈을 감고 가슴으로 읽어나가야 할 그런 노래다. 무엇이 그의 시를 이렇게 시리도록 아름답게 만드는 것일까? 그가 이불 속에서 우르릉거리는 천장의 쥐소리를 듣는, 비교적 좁은 시골의 공간을 노래하는데도 호소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마 그리움에 대한 개인사적 경험 때문이다. 「서산西山에서 보낸 어린 시절 1」이 함축적으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작은 산이 뜰 앞을 돌아다닙니다
죽림이 소리내어 바람에 웁니다
세월이 거두지 못한 목숨 먼지처럼 쌓입니다
파시破市 꿈 속에서 장터는 살아나 닻을 올립니다
숨어서도 갈 수 없는 집, 비오는 날이면
승천하는 이야기들 메아리 가득 몸살 앓고 있습니다
겨울 초목 아래 들쥐같은 궁색
들불 아득한 봄비에 고사리순마다 살아납니다
어둔 세월 눈물로 데불고
어둔 사람 가슴에 먼저 내립니다
-「서산西山에서 보낸 어린 시절 1」,전문
시인은 서산에서 보냈던 삶의 구체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그저 회상의 무늬로서 간결하게 암시할 뿐이다. <파시破市>, <작은 산>, <들쥐같은 궁색>들이 쓸쓸하고도 궁핍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남의 잔칫집 주변에나 어슬렁대는 것 같은, 삶의 가장자리에 놓인 주인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가장자리의 삶은 <하얗게 비어있는 필름 한 장>이자 현상을 해보아도 그저 <하얗게 비어 있는 인화지>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다 합해도 없고, 다 빼도 있는 숫자는 아마 시詩라는 숫자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윤희수의 시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을 서정적으로 처리하면서 역사적 차원의 의미망을 엮어내는데 성공한다. 그가 그리는 농촌은 산업화의 대열에서 낙오되였다. 그러면서 기껏해야 기억의 공간에 그 존재론적 위치를 점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이제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삶을 시적 주관으로 재구성하는 동안 주관적인 것이 객관적 역사가 되고 객관적인 역사가 주관적인 서정이 된다. 「西山에서 보낸 어린 시절 6」에서는 현실이 음화적으로 가시거리에 들어 온다.
뒷간에 앉아 거적대기 타고 앉은 거미와 이야기 했다 뒷간에 앉아 외할아버지 석 달 밭노동으로 바꿔온 회충약 먹고 효험 기다렸다 감나무 그늘 길게 엉덩이 끼워넣었다 흰마당에 내린 볕살이 눈부셨다 산토닌 당의정 달콤함에 반한 검둥개 볕살에 드린 그림자를 쫓아 멤을 돌았다 노랗게 뒤집히는 뒷산 참나무에서 참매미는 그렇게 울어쌓고 해살거리는 뒷간 앞 봉숭아밭을 헤집는 꽃술 붉은 장닭이 붉은 목청 뽑았다 마당보다 얕게 둘러진 울이 섬돌로 기둥으로 초섶지붕으로 하늘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西山에서 보낸 어린 시절 6」,전문
역사에 대해서 인간은 영원한 국외자이다. 왜냐하면 그곳에 가보면 이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농축된 주관적 의식이 역사에 대한 그의 시적 반응이 될 수밖에 없다. <회충약 먹고>, <뒤집히는>, <붉은 목청 뽑았다>, <기어오르고 있었다> 등의 표현은 여흥이나 분위기를 뛰어넘는다. 한마디로 그의 초록빛 서정을 붉게 물들여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사회변화는 필연적으로 시적 변화를 요구하였다. 시라는 장르 내에서도 운문시와 산문시는 수평적으로 나란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차례로 발생한다고 본다. 이것은 또한 시의 내용과도 상응한다. 다른 시에서 <저녁놀>과 <안개>, 그리고 <꽃향기>처럼 서경적 이미지가 부상한 반면에, 이 시에서는 소외의 이미지가 부상을 하면서 시는 단단한 밀도를 지니게 된다. 그것은 <무의식적 역사기술>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비판으로까지 전개되고 있다. 더욱이 <석 달 밭노동으로 바꿔온 회충약>과 같은 표현은 구체적 사회사적 맥락 속에서 파토스와 핍진성을 부축받고 있다. 친근한 불만을 터뜨림으로써 식상하기 쉬운, 단순한 낭만적 정취의 이스케이피즘escapism에 머무르지 않고 표현주의적 기법에까지 도달하고 있다. 시인의 기억공간에 있는 아버지의 <헛기침>과 어머니의 <젖가슴>은 바로 이러한 이율배반을 상호보족적 역학관계에서 그려내려는 시인의 글쓰기 전략이다. 또한 시인은 삶 가까이서 발견한 시각적 경험을 언어로 명징하게 굴절시킴으로써 역사적 순간을 망각으로부터 건져내려는 마술을 부리고 있다. 근대화와 산업화의 와중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망각했다. 그 망각의 이삭을 이제 이 시에서 다시 기억으로 줍는다.
II. 꿈꾸기
시는 필요에 의해, 즉 유용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내적인 흥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선사시대 사람들이 유용성 때문에 배를 만든 것이 아니라 정신적 흥미 때문에, 즉 몽상하는 흥미 때문에 만들었다고 한다. 그 흥미가 더 이상 전통에만 매여있지 않고 그가 사는 현실을 유희하는 동인이 될 것이다.
슬픔은 충분히 썩으면서
말똥가리풀처럼 충분히 썩으면서
늪에 갇히다
썩은 뒤의 깨끗함으로
갇힌 뒤의 자유로움으로
- 「갇히다」, 부분
충분히 썩거나, <들불>로 태워야 <욕신(欲身)>이나 <먼지들>같은 현실은 비로소 자기정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눈 말똥이는 말똥가리 풀의 열매>는 다름아닌 자신의 고통이 변신한 결정체라는 것을 시인이 시각적 지음(知音)으로 형상화한다. 이런 자기정화는 희랍신화에 나오는 미다스 왕과 그의 이발사에 대한 신화에서와 같이 <교신하는 휘파람 소리에 무성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것이 윤희수의 현실읽기의 팡파레가 된다.
의미심장한 사건은 원시상태의 인간에게 행동하라는 욕망을 자아낸다. 그런데 동물과는 달리 인간에게는 이 욕망을 충족할 본능적 우세함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에게 항상 미정의 부담감을 남기어, 태도의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Arnold Gehlen). 이 당혹감을 제의나 신화와 같은 성스러운 상황이 충족해주었다고 본다면 후기문화에서는 심미적 표현이 그것을 재현한다. 현실을 살아가는데 항상 무시되는 슬픔, 충격, 불만, 성적 충동은 모두 터부시되지만 자기목적과 자기존재가 되고 있다. 그런 충격적인, 의미심장한 사건을 볼 때마다 태도의 당혹감이 생긴다. 때론 손을 어떻게 두어야 할지, 말을 이렇게 해서 될런지 늘 불안하다. 이것들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정화의 과정을 통해서야 충족시킬 수 있다. 이 시집의 모티브에 자주 등장하는 <들불>, <늪>, <못>, <호수>, <농무濃霧>, <일몰>, <비>, <폭풍>, <폭설>, <밀물과 썰물> 등은 자기정화의 현시적인 상징체이다. 이것을 통해 비로소 시인은 <낡은 세대의 욕망끼리>존재하고, <푸른 빛으로 깨어나는 소리>로 인지하며 <말과 말 사이 상처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윤희수의 시는 그래서 직접적인 심상을 피하고 있다. 그의 시가 보여주고 있는 분명한 언어의 거부는 일체의 언어에 대한 불신과 맥을 같이 한다. 욕신(欲身)과 미메시스적 충동을 그의 존재이유로 삼고 사는 시인에게 기존의 분명한 기표는 굴레가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에게 있어 현실은 그저 <마스크를 쓴>, 허위로 도배한 세계를 의미하고 있다.
녹색 마스크를 쓰고
건조하게 발라내고 칼질한
삶의 뼈에 감염된,
꿈과 알콜의 욕신欲身은 차갑게 깨어나고
-「잠시 몸 흔들리다」,부분
<건조하게 발라내고 칼질한> 일상은 자기상실에 기여한 억압적 사회제도이다. 그는 이렇게 속된 현실을 단순히 폄론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질척거리고 가누지 못하는 자신으로부터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윤희수의 시적 관심이 소시민적 삶의 세계를 지향한다면 그것은 아마 당착어법적 표현을 담고 있는 「검문소」라는 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루에 두 번씩 긴장은 아름답다
검문소 앞을 일상처럼 지날 때 그 속일 수 없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도망칠까, 도망칠까, 쳐놓은 덫 아름답다
퇴직급 받던 날, 주민등록증을 제출하며
강을 건너면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초과근무수당이
다리를 일상처럼 따라 건너고
-「검문소」,부분
이 시는 단순화를 통해 야무진 시적 야심을 다지고 있다. 지배와 피지배라는 생활세계가 공포라는 투망에 어떻게 포획되어 있는지를 간결하고도 견고하게 표현함으로써 소홀치 않은 예기(銳氣)를 품고 있다. 하이덱거가 말한 바, 불안은 존재의 실체라는 언명을 이 시는 체현(體顯)하고 있다. 우리의 생활이 자아밖의 억압적인 상황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불안이 암시되어 있다. 우리는 진정한 자기삶을 살지 못하고 억압과 충동에 의해 그저 놀림을 당할 뿐이다. 그는 이런 억압적 사회구조에 의해 사회와 개인이 조종되는데 대한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충동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 있는 모순을 벗어나 훈계하는 시인처럼 그렇게 내면세계를 성역시하지는 않는다. 그저 생활인의 원죄에 대한 불가항력을 보여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회적 문맥화에 성공한 시가「아무도 젖지 않는다」이다.
비는 내린다
아무도 젖지 않았다
[...]
비는 내린다 하염없이 비는 내려서 나무를 적신다 비는 내린다 하염없이 비는 내려서 길을 적신다 비는 내린다 하염없이 비는 내려서 그러나 사람을 적시지 않는다 젖은 것을 적시고 젖은 것은 젖어서 비되어 내린다 하염없이 비되어 내려서 비는 내린다 내린 비는 땅을 슬프게 적시고 나무는 젖은 뿌리에 다시 젖는다 내린 비는 길을 적시고 길은 사람을 적셔도 사람들은 조금도 젖지 않는다 조금씩 함정을 만들고 함정을 구덩이처럼 묻는다 기억을 묻는다 무너진 생명을 묻는다 부끄러움을 묻는다 아름답게 치장한 말을 묻는다 사람들이 그들의 발에 점령당한 줄 눈치채지 못한다 젖지 않는 사람들의 무더기무더기 사이로 한 빗줄기가 나무를 넘기고 길을 감추고 사람들 사라진다 비가 내린다 땅을 점령한 엉겅퀴들도 비에 젖는다 꽃술도 젖고 손톱도 젖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도 젖지 않았다 와글거리는 소리로
하늘에서 비는 내린다
땅이 젖는다
젖지 않은 아, 따가운 내 발바닥
아무도
젖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젖지 않는다」
이 시는 오히려 자아의 내면세계 그 자체가 현대의 자기상실에 기여하는 억압기재임을 천명하고 있다. 감정적 반응을 숨기고 서로 손가락질을 하면서 사회적 미신(소위 관례상이라고 말하는)을 설정함으로써, 확실한 지배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는 노예화 메카니즘이다. 사회적 존재를 무시하는 내면세계의 배타적 숭배야말로 독재나 부정, 사회비리, 안전불감증 같은 것보다 더욱 위태로운 자기상실의 함정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왜곡된 현실을 합당한 것으로 여길지 모른다. 공권력에 항거하기 위해 또 한번 폭력을 사용해야하는 현실이 그런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것처럼, 사이비 종교나 사회운동과 같은 이 시대의 모든 숭배는 세속권력을 정당화해나가는 또 하나의 지배구조이다. 이 시는 그점을 비판하고 나선다.
III. 그리기
지금까지는 주로 일상과 인접하는 시인의 세계관을 그려보았다. 내용에서 형식을 떼어 내놓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키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시적 거시세계에 대해, 형식이 갖는 미시세계가 어떻게 응분의 분량으로 조응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엘리어트는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섬세한 생각을 표현하는 것 같은 원숙한 지적 능력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원형질적인 정시(靜詩) 한 편이 눈길을 끈다. 「추락한다」는 그에 대한 당돌한 심상을 제공해 주고 있다.
낮은 담벼락에 기대어 아이는 꽃술을 세고 있다
기름종이 루핑지붕 위 햇볕 추락한다
팽이꽃 고개를 들고 순종한다
송편나무 벽틈새에 버들바구미 묻어 있다
그 고정된 숫자 바람이 흔들어댄다
창틀 안에 먼 산은 먼 산으로 서 있다
-「추락한다」,부분
묵시적 암시로 그 기저를 이루는 시를 상술적 해설로써 어찌 마감하랴. 창문을 통해 달을 바라봄같은 여유로움이 범죄영화의 효과음과 같은 긴장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사진처럼 나열하였다. 고도의 긴장과 무관심함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면서 시는 팽팽한 장력을 얻는다. 이때의 언어는- 윤희수 시의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영화의 언어를 닮아 있다. 개개 시행의 이미지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염시킨다. 개개 시행의 의미는 다음 행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마치 영화의 각 장면이 다음 장면에 이미지를 남기는 것과 같다. 이 내용적 전염을 귀납효과라 부른다. 이 전염은 서로 다른 내용을 의미있는 단위로 보이게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리고 모든 시에 적용되지만, 특히 윤희수의 시쓰기에 이 전염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행의 진술은 잠복하여 있다가 3행으로 연결되면서 2행과 대비된다. 나아가 홀수행과 짝수행이 서로 감염시키면서, 각 인상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반향된다. 이런 기법은「프리지어꽃 출렁이다」,「개 짖는 소리」,「공검지」등 일련의 이미지즘의 시들에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이 의미귀납의 효과를 역으로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시인이 즐겨쓴 행갈이(더 분명히 말해 앙장망Enjambment)에 나타나 있다.「세상은 이미 감염되었다」라는 시는 이를 더욱 분명이 보여준다.
폐선 같이 누워있다 덜렁대는 역사驛舍의 문살
겨울 거미가 일몰의 잔해에 해바라기한다 겨울 수초
지붕 위에서 낡은 꿈 꾸고 있다 좌판 위의 망둥이
눈동자에 싹틔운 썰물이 밀려들고 있다
-「세상은 이미 감염되었다」,부분
1행은 <덜렁대는 역사驛舍의 문살이 폐선같이 누워있다>로 읽을 수 있지만, 사실은 <세상은 이미 감염되었다>라는 제목에서부터 의미가 감염되어, <세상은 폐선같이 누워있다>로 읽힌다.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덜렁대는 역사의 문살>은 <겨울 거미가…>라는 2행과 짝짓기를 해야 한다. 그러면 <덜렁대는 역사의 문살의 겨울거미가…>로 읽혀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덜렁대는 역사의 문살>은 공유구문(아포코이누)을 이루게 되고 이중의 의미를 부여받아 시의 의미는 배가된다. 이런 기법이 급기야 「편지」에서는 두 개의 시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어떤 형식적 연결사도 없는 일련의 시행은 의미의 귀납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 받는다.
이와 같이 현대시가 모호함이나 중의성을 통해 승부를 건다는 것은 기표를 통해 기의를 훼방놓는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논리의 비약이 따르면서 시어는 압축과 심상을 통해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왜 시인은 이런 기법을 사용하는가? 윤희수의 경우 이미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언어와 논리에 대한 불신이 압도적으로 작용하는 것같다. 그가 추구한 것은 자의적 심상과 논리 이전의 사고의 직접성이다. 하기야 누가 불가해한 현실을 언어로 명징하게 설명할 것인가? 누가 그것을 좋아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여기에 시를 쓰고 읽는 우리 모두의 아포리아가 있다. 그리고 그 아포리아를 설명해 줄 방법이 발견되지 않았다.
IV 마치면서
앞에서 시가 만남이고 또한 자기목적이라고 한 지금에 시인의 시적 습관과 특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모순인 것 같지만 부득불 시인의 발전을 위해 내키지 않는 한마디를 한다면 그의 시가 추상적 관념이나 관조, 직관에 의지하는 것에서부터 좀더 자유로워지고, 현실적 심상으로 더욱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온갖 현란한 말과 논리가 부리는 통제에 대항할 무기란 옷벗은 자아의 외침밖에는 없겠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을 절약하고 그냥 보여주란 뜻이다.
개인의 시적전통을 가지지 않은 시인이 없겠지만 그런 억압과 통제를 벗어나는 것 또한 진정한 자유의 표현이겠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그가 노래한 <드라이플라워>는 시들어 있어도 그 향기는 살아있는 것처럼, 그의 왜소하고 을씨년스러웠을, 그러나 지금은 아름다운 동경이 된 유년의 기억이 우리를 또한 꿈꾸게 한다. 꿈꾸고 있는 한 인간은 아름답다. 하여 <드라이플라워>는 시인의 삶의 흔적이 아니라 시인의 자기 목적이자 존재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