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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단비
박태환
숨통이 콱콱 막혀오는 남산동 오르막길을 진수는 두 권의 책을 왼쪽겨드랑이에 끼고 짜증스러운 듯 타박타박 걷고 있었다. 중복허리를 맞은 복실개처럼 모든 가로수는 축 늘어지고, 길을 오가는 사람들마저 하나같이 맥을 놓아 힘 들어간 걸음걸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곳 대구의 땅이 유별 무덥다는 이야기는 전부터 들어 왔지만, 이토록 견디기 어려울 줄은 몰랐다. 하필이면 올해가 삼십 년 내에 처음 보는 더위라니 짜증은 더했다. 바닷가에서만 살아 별로 더운 줄 모르고 지나던 여름이라 진수에겐 그 누구보다도 이 더위가 더 고통스러웠다. 얼음엔 날개가 돋쳤고 그래서 얼음공장 사람들은 좋아라고 했지만, 대부분 시민들에겐 무더위로, 상수도 사정 악화로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 환기통 하나 없이 꽉 밀폐된 방안처럼 오목하게 내려앉은 지형이라 더위는 더욱 극성인 모양이다. 성냥이라도 그어대면 단박 땅덩어리 전체가 확 불붙어 활활 타오를 것만 같다. 아스팔트길은 엿가락마냥 쩍쩍 녹아나 발걸음을 더욱 힘겹게 했다. 이파리는 모두 시들시들 아래로 축 쳐진 양이 꼭 며칠 안으로 말라 죽을 것 같다.
“올 들어 최고 더위야. 이놈의 날씨 정말 사십 도까지 올려놓고 말려나?”
이런 말로 투덜대고 하루를 지나면 온도계는 한 눈금씩 올라가는 실정이니 얼마나 볶아 대려는지 모르겠다. 피로에 지친 사람들은 불안마저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초중고 모든 학교에서는 전에 없이 방학을 서두르게 되었고, 그 방학이 시작되면서부터 거리에는 눈에 띄게 사람 수가 줄어들었다. 모두 찌는 더위를 피해 바다로 산으로 앞을 다투어 떠난 모양이다. 진수가 자취하고 있는 집은 오르막길 막바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슴이며 등마루는 땀이 나서 옷이 착 달라붙었다. 책 안 든 손으로 달라붙은 옷을 들썩이며 열려진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에는 누구 하나 밖을 내다보는 사람이 없다. 대문 옆 은행나무 그늘에 주인집 개가 혀를 한 자나 빼물고 늘어져 있다. 숫제 짖는 것조차 힘겨운지 몇 번 눈을 껌벅거릴 뿐, 그 멍한 눈길로만 진수를 쫓을 뿐이다.
책상 둘을 나란히 놓고 두 사람이 누우면 꼭 알맞은 조그만 방에는 전에 없이 영호가 일찍 돌아와 있었다. 앞뒷문을 활짝 열어 놓고 웃옷까지 벗어 던진 채 한 손으로 수건질을 또 한손으로 탁탁 소리를 내며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삼학년 진학반이라 방학도 없이 학교에 나가고 있었으나, 삼십칠팔 도를 오르내리는 더위 때문에 일주일간 휴강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오전 수업만 받고 고향엘 갈려고 도서관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둘은 오랜만에 한 자리에 앉아 찬 없는 점심을 먹었다.
“고집부리지 말고 진수 너도 함께 내려가자. 한 일 주일간 바닷가에 뒹굴다 오면 좋지 않겠니? 공부도 잘 될 테고.”
그 동안 볼 책 몇 권을 챙긴 영호가 진수에게 함께 내려가자고 졸랐다.
“싫어야. 빨리 일어나. 이러다간 시간 늦을라. 자, 어서…….”
방을 나와 영호가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고향 갈려고? 그래, 두 학생 함께 가는 거요?”
아닙니다. 저 혼자…….
“왜, 진수 학생은?”
“가지 않겠답니다.”
“저런, 이 더운 날씨에 함께 내려가 좀 쉬었다 오지 않고.‘
“예, 전 별로…….”
진수는 학원 때문이라고 변명하려다가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들이 집에서 나왔을 때는 해가 서쪽으로 상당히 기울어 있었건만 두 사람의 등엔 어느덧 땀이 송알송알 맺혀 흘러내리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영호가 그만 들어가라고 했지만 진수는 역까지 가겠다며 함께 버스에 올랐다.
역 대합실은 대부분 여행자들로 꽉 메워져 있었다. 그 득실거리는 인파 때문에 역사 주변은 열기가 한층 더한 것만 같았다. 한참 만에 개표가 시작되어 꽉 찼던 대합실은 물 빠지듯 한 사람 한 사람 플랫폼으로 빠져나갔다.
P시행 열차가 손님을 잔뜩 싣고 세 번 기적을 울렸다. 손을 흔드는 영호의 모습이 기차 꽁무니에 가려지고 그 기차마저 까만 점으로 사라졌다. 그때서야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봤다. 텅 빈 주위는 조금 전보다 훨씬 조용해져 있었다. 공허를 털어버리려는 듯 플랫폼을 잰걸음으로 빠져나왔다.
"참 진수 너 웬 고집도 그렇게 세니? 그래 나 혼자 집에 가서 너네 부모님 만나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니? 그러지 말고 그만 같이 가자."
기차가 떠나기 전 영호가 마지막으로 권유했을 땐 앞뒤 생각 않고 훌쩍 기차에 뛰어오르고 싶었다.
“내 걱정일랑 말고 잘 놀다 와. 난 학원 때문에 못 간다고 그러면 되잖아. 어서 들어가 봐. 부모님껜 이렇게 건강하다고 안부나 전해주렴.”
그는 어깨를 떡 벌리며 자신의 건강을 자랑이나 하듯 말했다. 사실 진수는 웬일인지 졸업 당시보다 건강해 보였다. 역사 앞 광장은 하루 종일 내려쬐인 태양의 뜨거운 열기로 까만 아스팔트 색깔이 더욱 진하게 보였다. 다시는 영호가 타고 간 그 기차를 탈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의 입에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진수가 서울로 입학시험을 보러 가던 날, 마을 사람들은 만나는 이마다 꼭 합격하여 돌아와 달라고 격려했으며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가족들은 동구 밖까지 전송을 했었다. 또 진수 또래의 아이들은 모두 얼마나 부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던가? 그런 고향엘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가다니, 안 될 말이야. 그럴 수 없어. 진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심한 도리질을 했다.
일 년 전 진수보다 한 살 위인 같은 마을의 장호가 이곳 K대에 합격했을 때의 일이다. 합격자 발표가 나고 장호의 합격 사실이 온 동리에 알려졌을 때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었다.
장호네 집에서는 전을 붙이고 술을 받아 온 동민들을 초청했다. 어른들은 하루 종일 노래와 춤으로 흥겹게 놀면서 경사를 모두 축하하며 좋아했다. 개선장군처럼 온 동민의 축복을 받던 장호의 그 늠름해 하던 모습이 지금도 진수의 눈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진수의 지금 처지로 진한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역 광장을 벗어나 버스 정류장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했다. 말갛던 하늘엔 구름이 모여 들고 있었다. 요즈음의 날씨는 아주 기이한 현상을 보여 주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하루 종일 태양이 혼자서 이글거리다가도 일단 그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이면 어디에 숨었다 나오는지 꺼먼 구름이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여들어 밤새 하늘을 잔뜩 찌푸리게 하였다간 햇살이 비칠 아침녘이면 하늘은 씻은 듯 구름 한 점 없이 말갛기만 하니, 사람 숨통 끊어 놓을 지경이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밤새 잔뜩 구름만 끼여 있으니 밤 또한 낮 못지않게 견디기 어려웠다. 처음엔 이와 같은 현상을 보고 모두 이제는 비가 올려나 보다고 좋아했지만 며칠을 속고 난 지금에 와서는 그 구름이 비로 변해 갈증을 덜어 주리란 기대감을 가지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몰려드는 구름장을 바라보는 진수는 밤늦도록 더위에 시달릴 것을 생각하니 더욱 짜증스럽고 답답해졌다. 못 가는 고향 바다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이 질식해버릴 것만 같은 무더위, 오늘 따라 그는 더욱 허전하고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이 되었다. 영호 앞에선 고집 세고 모진 체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은 약해지기만 했다. 역에서부터 빨리 멀어져야 되겠다는 마음에 버스에 올라 막 뒷좌석에 앉을 때였다. 출입문 쪽이 떠들썩해지며 배낭을 멘 등산복 차림의 대학생들이 오르고 있었다. 모두 다섯 명인데 하나같이 검게 탄 얼굴들이다.
“어휴, 덥다. 이럴 줄 알았다면 곧장 부산으로 직행하는 건데.”
맨 앞의 학생이 허리춤의 수건을 빼들고 얼굴의 땀을 훔치며 이렇게 말했다.
“야, 임마, 무슨 소릴 그렇게 하노? 그래 너네들 집엔 다 들르고 이곳을 지나면서 우리 집만 쏙 빼놓는단 밀이가?
이곳이 고향인 학생인가 보다. 키가 후리하게 큰 학생이 먼저 말한 학생을 보며 섭섭하다고 일축을 하자 모두 한바탕 웃어넘겼다. 검게 탄 얼굴과 그들의 대화로 미루어 보아 벌써 여행길에 오른 지 오래된 모양이다. 모두 진수 또래였다. 그는 부러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눈이 한 학생의 왼쪽 가슴팍에 머물렀다. 진수가 염원하는 대학의 배지가 그곳에 버젓이 달려 있지 않는가. 순간 그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요즘 같아선 어떤 배지든지 대학 배지를 단 학생만 봐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그인지라, 하물며 자신이 소망하는, 그것도 한 번 실패한 적이 있는 대학교의 배지를 달고 있음에랴! 그들이 자기를 밀어낸 것만 같았다. 하늘과 땅의 차이를 느끼면서도 결의와 각오가 굳어지기는커녕 그의 마음은 더욱 감상적이 되어 나약해지는 것 같았다. 옆 좌석 손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선 채로 한참을 부산히 지껄이다가 몇 정거장을 가지 않아 그들은 내렸다. 그들이 내리고 난 차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졌다.
차가 K여고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차에서 내렸다. 그곳엔 그가 상주하다시피 하는 Y독서실이 있다. 영호 없는 혼자만의 저녁을 지어먹기 위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나지 않았다. 몇 걸음 앞의 독서실 아래에 있는 분식점으로 들어가 라면을 시켰다. 별반 식욕을 느끼지 못하면서 그릇을 비우고 2층 독서실로 올라갔다. 버스 안에서 만난 학생들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독서실 문을 여니 방금 청소를 했는지 매캐한 먼지 냄새가 코를 찌른다. 저녁때라 대부분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겨우 우거지상 동료 재수생들이 서너 명 죽치고 앉았다가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거의 동시에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떨군다. 권태, 고독, 불안, 초조의 얼굴들. 그는 곧장 자신의 자리로 가는 대신 한길을 내려다볼 수 있는 동편 창가로 가서 섰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맞은 편 상점에는 하나 둘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상점들의 진열장에는 조금 전에 본 대학생들의 배지가, 수없이 많은 배지가 걸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크게 확대되는 그 배지들이 춤을 추며 조롱이나 하듯 진수의 눈앞으로 몰려오는 환상에 빠졌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게시판에 나 붙었던 1023번의 ‘3’자가 ‘5’자로 보이기를 바라던 생각이 다시 솟구친다. 그게 ‘5’번이었다면 지금쯤 이토록 그들을 부러워하거나, 독서실 구석에 처박혀 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걸, 고향을 애타게 그리워할 필요도 없을 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당시 시험을 치루고 났을 때는 완전 포기 상태였다. 다섯 과목 중에서 국어, 수학, 사회는 남들에게 그리 뒤지지 않을 것 같았지만 외국어 두 과목인 영어 독일어는 완전 백지 상태였다. 그래서 합격은 아예 기대하지 않았으나, 막상 합격자 발표가 나고 자신의 수험번호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절망감이 현실로 부닥쳐 왔던 것이다.
‘부모님이나 선생님들께서 아시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벌써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알고 계실 텐데.’
진수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낭패감은 형언키 어려웠다. 그 면목 없는 얼굴로 고향엘 갈 수 없어 이곳으로 내려와 영호와 함께 생활하며 그의 도움을 받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원래 두 사람은 같은 나이로 중학까지는 같은 학년 같은 반에서 공부를 했다. 중학을 졸업하고 진수는 제자리 고등학교에 눌러 앉고, 영호는 대구에 나와 K고를 봐 한번 낙방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이제야 고3이 된 것이다. 그래서 재수로 말하면 영호가 진수보다 선배가 되는 셈이다.
“진수야 너무 실망하지 마라. 사람은 누구나 실수가 있게 마련 아니니? 사내가 되어 그까짓 것 예사로 생각하고 힘을 내야지. 그리고 너무 미안해할 것도 없고, 한 해 늦게 태어난 셈 치지 뭐.”
진수가 영호와 함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생활도구를 준비해 주려 왔던 그의 형이 한 위로의 말이다. 정말 그 당시, 형과 영호의 격려로 어느 정도 느긋한 마음이 되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느긋했던 마음이 실타래 풀리듯 힘없이 풀려나는 것만 같았다. 재수를 결심하고 영호와 함께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정말 한 해 늦게 태어난 셈 치고 한 해만 더 노력한다면 어디든지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진수의 마음은 전혀 딴판이었다. 생각하면 먹고, 자고, 공부하는 일밖에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일과였건만 지난 여섯 달 동안 무얼 했나 싶다. 애써 책을 들여다봐도 재학시절처럼 정신이 집중되질 않았다. 학교에 다닐 때는 아무리 졸음이 오는 여름날 수업시간이라도 학습에 지장을 줄 만큼 졸아본 기억은 없었다. 그런데, 요즈음 그는 학관에서 강사 선생님의 강의가 잠 속에서 들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고개를 숙이거나 아예 이마를 책상에 대고 잠을 자도 일사천리식 강의는 그대로 계속되었고 누구 한 사람 옆구리를 쿡 찔러 잠을 깨워주는 사람은 더욱 없었다. 그럭저럭 하는 사이에 팔월도 중순에 접어들었지만 새로 알게 된 것보다 잊어버린 것이 더 많은 실정이니 진수의 마음은 불안 초조로 자꾸만 짜부라드는 느낌이었다.
“어이, 최, 그만 자리에 가서 앉지.”
어느 새 왔는지 진수의 등 뒤에서 실장이 낮은 목소리로 자리에 가 앉으라고 했다.
자리에 앉은 진수는 ‘삼위일체’영어책을 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커다란 나방 한 마리가 날개를 펄럭이며 진수가 앉은 머리 위 형광등 갓에 앉았다 날았다 한다. 실장이 파리채를 가지고 와서 곧 쫓아버렸으나 형광등의 먼지와 나방 날개에서 떨어진 가루가 뒤섞여 한동안 형광등 둘레를 맴돌았다.
형광등을 쳐다보던 진수는 한 칸 건너 서편에서 자기 쪽을 바라보던 여학생과 시선이 마주쳤다. 전에 없는 일이었다. 몇 달 동안 같은 좌석에 앉아 공부를 하면서도 아는 사이가 아니면 좀처럼 대화를 나누는 일이 없는 게 이곳을 드나드는 학생들의 실태였다. 서로가 대화를 피하고, 시선이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이웃을 하고 앉아 있으면서도 거의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시선은 조금도 싫지가 아니 두렵지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녀가 먼저 시선을 떨구고 공부하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고향의 분이랑 정이랑 생각이 났다. 그들은 모두 중학을 나와 집에 놀면서 수예나 뜨개질을 했다. 긴 겨울밤이면 그들이 한 곳에 모여 뜨개질을 하며 놀다가 무엇을 사먹을 때는 으레 그 일부를 떼어 진수가 공부하는 방으로 가지고 왔다.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학교에 진학하라고 격려해 주던 그들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버스 안에서 대학생들의 모습을 본 후 독서실 안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동류항으로 의식되었고 그녀 또한 고향의 친구들처럼 아름다운 마음의 소유자라고 느껴졌다.
차 엔진 소리가 점점 높아지는 것은 밤이 깊어가는 징조이건만 후덥지근하고 권태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실장 책상 위쪽 벽에 걸린 시계가 막 열점을 치고 난 후였다. 서늘한 바람이 서쪽 창문턱을 넘어드는가 싶더니 빗방울이 후두두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억수의 장대비로 변했다.
“야! 비다! 소낙비가 온다!”
모두들 하나같이 함성을 지르며 양쪽 창가로 몰려들었다. 실장도 너무나 반가운지 술렁이는 분위기를 수습할 생각도 않고, 자신도 좋아라고 하며 창밖을 내다보며 빗방울 튀기는 서쪽 창문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닫는다. 진수도 동편 창가에 가서 섰다. 장대 같은 빗줄기가 오가는 차량의 불빛에 반사되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정신없이 그 광경에 도취되어 있을 때 좁은 의자 사이를 헤집고 진수 옆으로 맞은 편 그녀가 와서 섰다.
“어마! 저 광경 좀 봐!”
탄성을 지르는 그녀는 밖의 광경을 더욱 자세히 보기 위해 진수 옆 창문에 얼굴을 바싹 갖다 대었다. 조금 전만 해도 그렇게 가깝게 서 있으면 덥게 느껴졌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들은 한참이나 밖을 내다보다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웃으며 스스럼없는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까지 서로를 너무나 굳은 표정으로 대했던 걸 사과라도 하듯, 서로 어려운 처지를 위로하는 뜻에서 짓는 우정의 미소이련만 진수는 그녀의 웃는 모습이 그렇게 예쁘고 다정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밖에는 모든 사람들의 갈증을 말끔히 씻어주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약간 빗줄기가 약해지긴 했지만 단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꼭 마력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꽁꽁 언 땅을 녹이는 봄날 아지랑이와 같은 것이었다. 실내의 모든 수험준비생들이 한동안 밝은 모습으로 명랑한 대화를 나누었다. 실내의 흥분된 분위기가 가라앉고 다시 잠잠해지자 그들은 각기 제자리로 돌아갔다.
진수의 마음에도 지금까지의 우울했던 마음이 가시고 전에 없는 새로운 힘이 솟는 것 같았다. 지루하기만 하던 독서실 생활이 앞으론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았다.
열 한 시가 되자 자리가 하나 둘 비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처음보다 약해진 듯 했으나 쉬 그치지 않았다. 모두들 비를 맞거나 아니면 문 앞 가게에서 비닐우산을 사 쓰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다른 날 같으면 그도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건만 대문을 열어 줄 사람이 없어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주인집은 언제나 일찍 잠자리에 들어 학교에서 돌아온 영호가 집에서 공부를 하다가 진수가 돌아가면 대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영호가 없어 지금쯤 곤히 잠들어 있을 주인집 사람들을 깨우는 수선을 피워야만 한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는 것을 단념했다. 남들보다 늦게 맞은 편 여학생이 책을 챙겨 일어섰다. 그를 향해 눈인사를 하고 쪼록 독서실을 나갔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갈 사람 중 마지막 사람인 듯 했다. 나갈 사람이 더 없는 것을 확인할 실장이 자정이 가까워지자 바깥문을 채우고 잠자리에 들어갔다. 여기 저기 띄엄띄엄 앉아 있는 학생은 모두 독서실 옆에 붙은 간이침실에서 기거하며, 식사는 시장에서 대어놓고 먹는 사람들이다. 요즈음은 여름이라 그냥 의자에 앉아 책상에 엎딘 채 자는 사람도 있었고, 의자를 여러 개 나란히 붙여 놓고 그 위에 자는 사람도 있었다.
자정의 종소리를 들은 그도 책을 펴둔 채 책상에 엎디어 잠이 들었다.
한기를 느끼며 진수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새벽 세 시도 채 못 되었다. 그러니까 세 시간도 못 잔 셈이다. 팔다리가 짜릿하게 저려왔다. 양 팔목과 이마엔 붉은 핏발자국이 선명했다. 그는 양손으로 그 흔적을 문질렀다. 그토록 무덥던 독서실 안이 썰렁한 한기를 느끼게 했다. 런닝구와 엷은 남방만을 입은 그는 그러한 한기가 몹시 견디기 어려웠다. 몇 시간을 엎디어 자서 그런지 심한 치통이 계속되었다. 이가 모두 위로 솟구쳐 오른 것 같이 잇몸이 아프고 쑤셨다. 여기 저기 책상에 엎디어 자는 학생들도 추운지 잠결에 ‘어어’소리를 내며 몸을 홀쭉이면서 떨었다. 두세 시간 내린 소낙비로 새벽의 기온은 상당히 내려가 있었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으로 내려가 봤으나, 아직 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 문 앞 계단에 서서 몇 번 굴신운동을 하고는 계단을 다시 올라왔다. 간이침실의 베니아 문을 여니 실장이랑 다른 학생 오륙 명이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었다. 그 속에라도 끼여 오슬오슬한 추위를 모면해 볼까도 생각했으나 코를 찌르는 야릇한 냄새 때문에 돌아나오고 말았다.
통금이 해제되는 네 시까지 기다리기란 상당히 지루했다. 감기가 오려는지 머리가 무겁고 띵해지며 뼈마디마저 쑤셨다. 첫차 다니는 소리가 들린 지 한참 뒤에야 출입문이 열렸다. 그는 독서실을 나와 집으로 줄달음질을 쳤다. 어느 때보다 새벽 공기는 맑아 있었다.
좁은 길로 접어들자 뜀박질하는 발자국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15분도 못되어 대문에 다달았다. 대문 틈 사이로 눈을 바짝 대고 집 안을 들여다봤다. 부엌엔 이미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대문을 가볍게 똑똑 두들겨 숙이를 불렀다. 숙이는 주인집 부엌일을 맡아보는 열 다섯 남짓의 소녀였다. 방에 들어가 책상 위에 책을 던지고는 벽장 속에서 솜이불을 꺼내 뒤집어쓰고 누웠다. 칠팔월 삼복에 솜이불을 꺼내 덮는 자체가 우스운 일 같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엄습해 오는 한기를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전신을 휩쓰는 한기가 차츰 가시고 밤 동안의 피로로 곧장 잠에 빠지고 말았다.
진수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침 햇빛이 동향인 방안 깊숙이 들이비치고 있었다. 부랴부랴 아침밥을 서둘렀다. 수돗물에 손을 담그니 시원한 기분보다 차가운 느낌이 더 강했다. 혼자 먹는 아침밥이라 그런지 밥맛이 없었다. 입안이 까슬까슬하여 몇 술 들지도 않고 수저를 놓았다. 띵해 오는 두통 때문에 오늘은 쉴까도 하다가 학관에 나간 것이 탈이었다. 아침 세수를 할 때 밤새 책상에 엎디어 자느라 약간 부은 기가 있는 발을 찬물로 닦아서인지 코가 막히고 강의가 시작되니 기침까지 목구멍에서 갈강거리며 속을 태웠다. 첫째 시간은 그런 대로 참고 견디었다. 그러나 둘째 시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칠판의 글씨가 흐려지고 마침내는 강의하는 선생의 얼굴조차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속이 마구 뒤틀리며 얼굴이 창백해지고 진땀이 흘렀다. 연신 흘러내리는 말간 콧물을 손수건으로 훔쳤으나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어 자리에서 일어나 빽빽한 강의실을 빠져 뒷문으로 나갔다.
강사 대기실 긴 의자에 한동안 누어 있다가, 좀 안정을 되찾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 1키로 남짓의 거리건만 꽤나 멀리 여겨졌다. 도중에서 감기약을 지어와 자리에 눕기 전에 복용하고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천정이 핑글핑글 돌아가고 땀이 비 오듯 했다. 무슨 별 같은 물체가 무수히 눈앞에서 가물거리며 떠다녔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가물던 날씨에 하루를 두고 비가 억수로 쏟아지더니 홍수가 났다. 그 전날 보리를 거둬들이지 못한 게 낭패였다. 완전히 건조된 보리를 묶어 단을 만들어 놓고는 날이 저물어 그만 일과를 마친 것이 애써 지은 보리농사를 망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모든 잘못이 진수 자신에게 있다고 여겼다. 그날 뛰어 놀지 않고 부모의 일손을 도왔다면 보릿단은 집 마당에 운반되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마을 앞 개울가에서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부치고 보릿단을 밖으로 집어던지기에 바빴다. 처음엔 개울물도 얕았고 떠내려 오는 보릿단도 숫자가 적어 큰 힘 들이지 않고 작업을 할 수 있었지만, 수위가 불어나는 것과 비례해서 보릿단도 점점 더 많이 떠내려 와 그만큼 더 힘겹게 되었다. 아무리 건져내도 보릿단은 자꾸만 떠내려 왔다. 그러는 사이에 물은 점점 불어나 무릎에서 넓적다리까지 드디어 허리까지 올라오고 말았다. 그러나 진수는 작업을 중단할 수 없었다. 어느덧 밖에 건져 내놓은 보릿단이 많아져 진수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는 한쪽 어깨로 넘어오는 보릿단을 바치고는 작업을 계속하였으나 물은 더욱 불어나고 자꾸만 밀려오는 보릿단을 혼자서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수없이 밀어닥치는 보릿단에 밀리어 급류에 휩쓸리고 말았다. 황톳물에 휩쓸리는 순간 그는 ‘아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니, 진수야! 허어 이거 큰일 났군. 이 일을 어쩐담?”
진수가 황톳물에 휩쓸리며 비명을 지르는 순간, 어렴풋이나마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이게 웬일인가? 내 곁에 어떻게 어머니가? 진수는 악몽에 시달린 후라 도무지 어리벙벙하여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눈을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분명 자신이 거처하고 있는 자취방이었다. 그때서야 진수의 한쪽 어깨를 꼭 누르고 있던 그의 어머니가 손을 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어머니 옆에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역시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를 지나서야 진수는 상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아파 누워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영호가 내려가 그가 그려준 약도와 주소를 가지고 찾아왔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순간 그는 죄송함과 반가운 감정에 휩싸여 콧등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돌아나는 것을 눌러 참고는 그의 어머니 손을 덥석 잡고 어머니를 부르며 일어나려고 했다.
“오냐, 그래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그런데 이게 웬일이고? 영호는 네가 전에 없이 건강하게 잘 있다고 하더니만….” 하며 어머니는 일어나려는 아들을 도로 자리에 눕게 하고는 이불을 다독거렸다.
“글쎄 말입니다. 어제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고 여태 함께 살아도 한번 앓는 것을 못 봤는데 말입니다. 아이고, 학생도 이렇게 아프면서도 내게 알리지 않고…….”
그는 그의 어머니와 주인아주머니에게 지난 밤 독서실에서 추워 떨었던 이야기며 오늘 학원에서 갑자기 열이 오르고 한기가 들어 일찍 돌아와 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다고 자초지종을 누운 채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젠 아무렇지도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더운데 나가 보라고 했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몸조리 잘 하라는 당부를 하고 나가고, 그의 어머니도 자식의 머리에 물수건을 갈아주고 미음이라도 쑤어야겠다며 엉덩이도 마음대로 내두를 수 없는 좁다란 부엌으로 내려갔다.
미음을 끓이고 점심상을 봐 왔을 때 진수는 땀에 젖은 이부자리를 밖에 내어 널고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한기가 가시고 그렇게 아프던 머리가 꾀병처럼 나았다. 아들이 일어나 앉아 한시름 놓은 그의 어머니는 점심을 먹고 당장 고향에 내려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러나 진수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성격을 아는지라 두 번 다시 권유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영호가 울 때까지 이곳에 함께 머물면서 한약이라도 몇 첩 달여 먹이겠다며 주인집에서 오지 약탕관을 빌어 놓고는 그 길로 약을 지으러 대문을 나섰다. 그저 보신에는 한약에 더 덮을 것이 없다면서 대문을 나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진수는 무한한 고마움과 자애의 정을 느꼈다. 부모의 곁을 떠나 있던 몇 개월이 진수로 하여금 어머니의 정을 더욱 절감케 했는지도 모른다. 다시 콧등이 시큰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방안에 혼자 선 채로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너무나 안이한 생각만 했구나. 남들에게 부끄럽다는 생각만 했지 사실은 자신의 처지만 원망하는 소극적이고 나약한 인간. 이기적인 인간에 불과했구나. 그래 저런 어머니를 두고 실의에만 빠져 있었다니, 어머니의 속마음이 얼마나 섭섭하고 아프셨을까? 꿋꿋하게 살자. 그리고 최선을 다해 내년에 꼭 원하는 대학에 합격해야지. 그래서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고 즐겁게 해드려야지. 이렇게 진수는 지난날을 뉘우치고 깊이깊이 반성하며 밖을 내다보았다.
대문 밖은 햇빛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맑게 갠 청잣빛 넓은 하늘을 온통 태양이 혼자서 독차지하고는 간밤에 내린 비로 식어있는 대지에 열기를 더하며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1967년 9월 지음
첫댓글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뒤늦게 발견하고, 자신도 그러한 부모님을 위해 반드시 성공을 해야 하겠다는, 지난 시절의 또하나의 전형을 봅니다. 그리고 여전한 학벌에 대한 갈등을 겪는 진수는 머잖아 자신의 내면과 만나게 되겠지요.
감상 잘했습니다.
1967년, 그때 저는 중학생이었습니다.1969년에 서울로 유학 떠났구요.
<삼위일체>영어, 저도 이 책으로 영어공부했습니다.
K大 합격한 얘기로 미루어 院3洞의 소문난 秀才 형님인 듯합니다.
기실 소설의 초기 작품에는 자신의 얘기가 주를 이루는 게 정상이지요.
저도 큰강(낙동강)이나 감천강 얘기가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거든요.
초기 작품이라 상큼한 맛에 푹 빠져서 감상했습니다.
최근작이 있으시면 소개해 주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