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시아문200712/기뻤던 그 순간
이상희
주말 아침 숲 골짜기 집 뒷산에 오르면 늘 앉았다 오는 바위가 있다. 길쭉한 1인용 소파 겸용 침대처럼 생긴 그 바위 한가운데에다 입고 온 조끼를 벗어 깔고 반가부좌에 법계정인, 눈을 감곤 한다. 비록 삼매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이제 막 떠오른 해의 빛살이 눈꺼풀을 간질이고 새들이 벌레 쪼고 노래하는 소리가 귀를 어지럽히는 사이 잠시 잠깐 마음을 놓아보곤 하는 것이다.
뒷산 참선 바위에 앉지 않더라도, 언제 어디서든 그렇게 잠깐이나마 고요히 빈 마음을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은 길고 깊은 수련을 거쳐서나 가능한 소망일까… 한밤중에도 세 시간 토막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는 신세에 언제 시간을 내며, 어느 세월에 그 경지에 이르도록 수련에 몰입할 수 있을까…
가당찮은 욕심이 줄줄이 물음표를 찍던 터에 얼마 전 위로가 될 만한 순간을 얻었다. 외국을 떠돌며 사는 친구가 잠시 귀국해서는 미국에서 뵙곤 했던 숭산 스님이 조실로 계시던 화계사를 가보자 했을 때였다. 대웅전, 명부전, 삼성각, 대적광전을 차례로 들어가 향 피우고 절한 다음에도 우리는 무엇인가 아쉬워 선뜻 발길을 못 돌리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친구가 대적광전 위층 계단을 오르며 손을 잡아끌었다.
‘출입 금지’ 팻말을 슬며시 지나쳐 국제선원 현판이 걸린 법당 문을 여는데, 벌써 그 방의 서늘한 적요가 청정 공기인 듯 머리며 가슴에 시원하게 사무치는 것이었다. 그 적요 덕분이었을까. 분향 삼배하고 방석 위에 좌선 방석을 덧깔고 앉자마자 거기가 바로 숲 골짜기 집 뒷산 참선 바위가 되었다. 푸드득, 새 소리가 들리고 친구의 기쁨 넘치는 옆얼굴이 보이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돌아보니 나지막한 천장에 맞닿은 창 밖 테라스에 숲 골짜기 그 새 소리도 새 소리요 이 새 소리도 새 소리라는 듯, 새들이 날아들고 있었다. 우리는 소리 없이 한번 마주 웃고는 깊숙이 허리 숙여 반 배 한 다음, 방금 들어오는 외국인 스님께 목례하며 법당을 나왔다.
올 한 해 내게 좋았던 일을 세어보지 않으리라. 그저, 너무 적지도 너무 많지도 않았다고만 생각하리라. 가슴 뛰게 기뻤던 순간 몇 장면만 기억하리라. 새해에도 그런 순간을 만나려 간절히 원하고 찾으리라.
여시아문200711/하룻밤 머물고 간 검둥개
이상희
산골짜기 집에서 개를 기르면서야 세상의 개들을 유심히 쳐다보게 되었다. 각각 두 해째, 한 해째, 두 달째 함께 살고 있는 그 셋이 짖어대는 소리가 어디서든지 우렁우렁 들리는 듯하고, 고기 음식이라도 먹게 되면 일부러 남겨서 산골짜기 집에 들어가는 주말을 손꼽아 기다린다. 이렇게 모여든 인연도 멀리서부터 시작된 것이겠거니, 하면서.
얼마 전엔 검둥개 하나가 와서는 곧바로 떠나가기도 했다. 저녁 무렵 도서관 열람실에서 막 노트북을 펴고 일을 시작하려는데 고등학교 2학년 딸아이의 문자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요컨대 미술학원 빼먹고 쉬고 싶다는 얘기였다. 함께 있어주면 좋겠지만 지금 들어가면 독촉 받던 원고가 또 늦어질 참이라 ‘감기약에 비타민 한 알씩 먹고 푹 자고 있어. 얼른 갈게’ 했는데 또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엄마, 작업실 가는 길인데 어떤 애가 개를 주고 가버렸어. 어떡해?’ 무슨 얘긴지 어리둥절해 하는데 또 메시지가 왔다. ‘일단 집에 데려갈게. 이제 어두워져서 어쩔 수가 없어.’ 나는 부랴부랴 일보따리를 싸고 말았다.
작업실에는 아프다던 딸아이가 라면박스로 멋진 개집을 만들어 제 머리맡에 놓았고, 그 속에선 검둥개 하나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딸아이가 누운 채로 종알거렸다. “엄마, 너무 예쁠까봐 안 보려는 거지?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까 얘는 슈나우저하고 요크셔테리어 잡종이래. 그리고 우리 개들하고 다르게 아주 얌전해. 안 짖어. 아파트에서 키웠나봐. 처음에 안았을 때에도 아주 좋은 냄새가 났어. 우유 줬는데 안 먹더라. 나, 이제 잘래. 힘들어.” 딸아이는 잠들고, 나는 여기저기 볼일 보고 다니는 걸 치우느라, 딸아이 이부자리로 올라가는 걸 말리느라, 야단치다 말고 그 까만 예쁜 눈을 멍하니 바라보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무엇보다 온종일 도서관 강의가 있는 다음날이 걱정이었다.
아침에 학교 가는 딸아이한테 낑낑거리며 안기려는 개를 떼어내 바구니에 담아 차에 태우고는 사료 한 봉지와 방울 목걸이와 개 줄을 사들고 그림책버스가 있는 공원에 가서 부탁했다. 저녁까지만 좀 맡아달라고, 혹시 아파트에서 기르고 싶어 하는 분 있으면 연락해달라고. 그러고 와서는 그 검둥개를 다시는 못 보게 되었다. 그날 오후에 바로 다도회 회장댁에서 데려간 것이다. 검둥개 소식을 문자로 주고받으면서 딸이 그랬다. ‘정들어서 엄마 울었지? 내가 나중에 가서 멍멍이 노릇해줄게, 울지 마.’
첫댓글 예쁜 딸...친구 같은 딸.. 선생님의 지칠줄 모르는 그 열정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겠어요..^^*
그 분의 정이 뭔지?
선생님 예쁜 따님 한 번 보고 싶네요..딸에게 늘 이모같은 엄마가 되어야 하는데, 너무 엄마같은 엄마가 되어서 우리 딸들이 힘들어 한답니다. 조금이라도 잔소리가 늘어지면 " 엄마, 또 욕심나서 그러지?" 이렇게 일침을 가합니다. 마음 조리지 않고, 느긋하게 뒤에서 바라보는 여유를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까요? 엄마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을 것 같은 선생님 따님이 너무 이쁘네요..